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1-1.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 사랑의 계시
작성자김신 쪽지 캡슐 작성일2004-12-31 조회수1,130 추천수3 반대(0) 신고

디트로이트 '성심 대 신학교', 생명이슈 석좌교수이자 교황청 가정평의회 자문위원인 자넷 스미츠 박사를 중심으로 개발된 "새천년 복음화 계획"을 소개합니다.  견진교리나 신자 재교육 교재로도 사용되고 있는 인기있는 강좌입니다.

 

"새천년 복음화 계획"은 가톨릭 신앙의 기본을 생각해 보고 정리할 수 있는 좋은 내용이라 생각됩니다.  슬라이드를 사용하여 시각적 효과를 높였으며 총 5편의 강좌 (각 편당 4개의 강의) 로 구성되어 있어서 요약적이면서도 포괄적인 특성이 있습니다.  1-1강부터 4-1강까지 차례로 올려 드리겠습니다.

 

번역을 전문적인 업으로 하는 사람도 아니고 신학이나 철학을 배워보지도 못했습니다.  부족하지만 나누고 싶은 내용이기에 용기를 내어 게시판에 올립니다.  영문제목을 클릭하시면 원문으로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제1-1강: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 사랑의 계시

(Talk1: Jesus Christ: Revelation of God’s Love)

 


 

1101.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 사랑의 계시

 

 

다가오는 제 삼천년기에 관한 사도적 서한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0년을 어떻게 준비하면서 기념할 것인지를 교회에 가르치셨습니다.  그 문헌에서 교황은 1997년을 성자께서 인간 예수 그리스도가 되심을 묵상하면서 봉헌하도록 정하셨습니다.  그러한 묵상의 일환으로 우리는 본 강좌,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 사랑의 계시”를 계획하였습니다.

 

1102. 강 좌 소 개

 

문: 제1-1강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물으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답: 제1-2강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요 벗이시다.

답: 제1-3강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자비 넘치는 사랑을 계시하신다.

답: 제1-4강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사랑의 성령을 보내신다.

 

 

제1편은 네 강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 두 강의, 즉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요 벗이시다.”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메시지와 사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함양시킵니다.  그리고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믿어야 할 중대한 필요성”보여줍니다.

 

세 번째 강의와 네 번째 강의,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자비 가득한 사랑을 계시하신다.”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사랑의 성령을 보내신다.”는 육화의 신비를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 순서에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성서에서 예수께서 제자들과 우리 모두에게 던지신 "그분은 우리에게 누구이신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에 대한 답변의 첫 부분, 즉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요 벗이시다"가 두 번째 강의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라는 점증된 질문에 답하는 세 번째, 네 번째 강의로써 완결됩니다.  이러한 항목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만한 진리가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1103.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우리의 첫 번째 묵상 주제는 성서로부터 직접 인용한 것입니다.  당신 제자들을 양성시키는 일정 시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로부터 믿음의 행동을 이끌어내길 원하십니다.  성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적절한 답변을 합니다.  당신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오 16:16)

 

예수 그리스도와 베드로의 대화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 개개인과 갖기를 원하시는 대화의 모델입니다.  놀랄 정도로 다양한 방법으로 언제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질문하고 계십니다.  “나는 너에게 누구이냐?”

 

우리가 어떠한 길을 택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 진리에 관한 질문, 그리고 삶의 목표와 의미에 대한 질문에 직면할 때마다,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묻고 또 묻고 계십니다.  “너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너의 길이냐?  나는 너의 진리이냐?  나는 너의 생명이냐?”

 

 

1104.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바로 인간에게 드러내 보여 주신다.

 

 

 

이러한 피할 수 없는 질문을 통하여, 우리는 곧 그리스도와의 이러한 대화가 우리 삶의 여정 전반에 걸쳐 계속됨을 어렴풋이나마 직감합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삶과 그 의미와 목적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어 주십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이러한 진리를 다음과 같이 확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당신을 계시하시고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내주셨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삶의 의미와 목적을 묻는 인간의 질문에 결정적이고 풍부한 답을 주신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68)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을 계시해 주시며 우리 자신을 우리에게 밝히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하느님 모상대로 지음받은 우리는 하느님의 진리에 비추어 봄으로써만 우리 자신에 관한 진리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왜 이러한 계시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까?  왜 이러한 계시가 복음일까요?  복음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왜 현대 인간은 종교와 그리스도교 신앙에 그렇게도 무관심해 보이는 걸까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요한 바오로 2세의 문헌들을 사용하여 본 강좌는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모든 질문에 대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답변해 주셨음을 발견할 수 있도록 인도할 것입니다.

 

Ⅰ.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성서를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마태오 16:16)

1. 예수께서 이 질문을 하셨을 때 제자들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2. 누가 정확히 답변했습니까?

3. 그 사람은 어떠한 인정과 상을 받았습니까?

요한 복음 14:6을 읽고 예수께서 진정으로 당신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지 스스로 질문해 보세요.

 

1105.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무엇을 가르쳤는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관련있는 몇몇 단어가 나열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공의회가 1962년부터 1965년까지 개최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공의회에 대해 이야기하는 듯 하지만, 그 공의회가 실제로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쳤는지 우리는 알고 있는가요?  우리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마음 안에 2000년 대희년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이에 중대한 연계가 있음을 알고 있는지요?  요한 바오로 2세는 다음과 같이 가르치십니다:

 

"새로운 천년기를 위한 최상의 준비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을 각개인과 온 교회의 생활에 되도록 충실하게 적용하려는 새로운 투신으로 표현될 수 있을 뿐입니다."(제삼천년기, 20)

 

우리는 이러한 언급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선, 우리의 참여를 요구하는 짧은 연습으로 시작하도록 합시다.  “단어 잇기” 놀이를 해 봅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라는 말을 들었을 때 여러분 마음에 떠오르는 단어나 생각은 무엇입니까?

 

 

1106. 거룩함에 대한 보편적인 부르심

 

 

다른 대다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마도 당신은 “변화”라는 단어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공의회에 뿌리를 두고 있는 특정한 변화들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당신이 생각한 몇몇 변화는 미사와 관련이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이제 미사는 모국어로 기념하고, 사제는 신자들을 향하며, 남성이나 여성이 예외적 성체 분배자로 봉사합니다.

 

그밖에도 많은 변화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더불어 도래했습니다.  모든 금요일에 금육해야 한다는 규정이 (비록 우리가 여전히 금요일에 어떠한 유형의 보속이라도 해야 할 중대한 의무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완화되었습니다.  많은 평신도 남성과 여성이 교구와 본당 사목 그리고 재정 위원회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위원회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 외에도 변화된 실례들을 무수히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만, 여기에서 요점은 방금 말씀드린 모든 변화들은 가시적이고, 제도적이거나 절차적인 변화라는 것입니다.

 

1107. 회개

 

 

하지만, 이 공의회가 가장 깊이 간직한 비밀 중 하나는 그 우선적인 목적이 다른 유형의 변화, 즉 그리스도인과 가톨릭 신자의 삶 안에 지대한 성숙의 표징인 회개, 우리 마음의 변화였다는 사실입니다.  공의회는 자체의 목적이 “신자들의 그리스도교적 생활을 날로 증진시키는” 것임을 선언했습니다.(전례에 관한 헌장 1)

 

당시 공의회의 영향력있는 참가자였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목적은 단순히 우리의 신앙, 즉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맺는 관계를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공의회의 사목적 본질에 대한 그분의 이해입니다.(참고, 쇄신의 원천)

 

공의회의 목적에 대한 이러한 표현들은 공의회가 거룩함을 추구하는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에 대한 새로운 부르심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보완적인 방법입니다.

 

공의회가 가져온 모든 가시적이고 제도적인 변화나 쇄신은 우리 마음, 우리 삶 전체의 내적인 쇄신에 봉사하기 위한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이러한 목적을 다음과 같이 재확인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구조는 온전히 그리스도 지체들의 거룩함을 위해 있는 것이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773).  “교회의 모든 활동의 목적인 인간의 성화와 하느님의 영광이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는 것이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824).

 

1108. 거룩함이란 무엇인가?

 

잘못된 답변:

* 거룩함은 따분하다.

* 거룩함/종교는 도피이다.

* 거룩함은 오직 사제들과 수도자들의 몫이다.

* 거룩함은 특이하며 기적적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우리가 삶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변이 되시는지를 탐구해 나가면서 우리는 거룩함에 대한 이러한 부르심을 마음속 깊이 간직해야 합니다.  공의회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문헌들을 통하여, 우리는 신앙과 거룩함이 영웅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결정적인 요점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거룩함에 대한 네 가지 잘못된 관념을 몰아 냈습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거룩한 생활은 따분한 것, 그래서 만일 내가 거룩해진다면 나는 어떠한 즐거움도 누릴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종교가 삶의 진정한 도전을 대면할 수 없는 사람을 위한 도피처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거룩함이란 사제나 수도자만을 위한 것이지 일반 대중을 위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어떤 사람은 거룩함이 특이하고 기적적인 무엇을 의미한다는 잘못된 인식 아래 있습니다.

 

1109. 참된 답변

 

*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거룩해질 수 있도록 은총으로써 힘을 북돋아 주신다.

* 은총과 믿음과 희망과 애덕의 삶.

* 모든 일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

* 충만히 인간적인 삶을 살기.

* 하느님께서 사랑하심과 같이 사랑하기.

* 복음화와 선교 사명의 모티브.

 

 

하지만 교회는 거룩함에 대해 매우 다른 무엇을 가르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는 바와 마찬가지입니다.

 

* 세례를 시작으로 모든 사람은 거룩함으로 부르심 받았다.  

* 우리를 부르실 때 하느님께서는 당신 말씀과 성사를 통한 은총으로써 우리에게 힘을 북돋아주신다.  달리 이야기한다면,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거룩해지는 것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 거룩함이란  은총과 믿음과 희망과 애덕의 생활이며, 우리는 그로써 가장 일상적이고 평범한 사건들 안에서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어 살아갑니다.

* 거룩함이란 모든 일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함을 의미합니다.

* 거룩함이란 충만히 인간적인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은총은 우리가 충만한 인간적 잠재력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합니다.

* 거룩함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가 가장 심원한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 거룩함은 교회 안에서 복음화와 선교 활동의 기반입니다.

 

1110. 거룩함의 선교 사명적 차원

 

질문: 누구를 복음화한다는 것입니까?

답변: 모든 사람입니다.

 

 

복음화와 선교 활동이라는 논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교황 바오로 6세와 요한 바오로 2세의 비젼에 의하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쇄신, 즉 신앙의 풍성함과 거룩함의 증진은 세상을 복음화하는 사명으로 부르심받았다는 우리의 인식을 다시금 고양시킬 것입니다.

 

거룩함은 우리를 하느님과 더욱 닮게 해줍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고 사랑은 그 사랑을 받는 사람에게 삶의 선(善)과 충만함을 가져올 수 있는 모든 일을 마다 않고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당신 아들을 보내시어 당신 생명을 우리와 더불어 나누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당신 생명을 나눌 수 있도록 초대하는 사명을 받으신 당신의 아들--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의 아들!--을 이 세상 속으로 보내길 멈추지 않으십니다.

 

1111. 거룩함은 역동적인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거룩함이란 개인적인 깊이가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적인 실재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역동적인 힘, 하느님께서 가지고 계신 생명과 사랑의 힘입니다.  그리고 거룩함은 할 수 있는껏 많이 소통될 것을 지향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공유할 수 있는 어떤 좋은 것이라도 실제로 더불어 나누지 않는다면 그것은 온당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느님처럼 다른 사람과 더불어 그 생명을 나눌 때에만 하느님의 생명을 충만히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 안에 머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요한 15:5)라는 주님의 말씀, 또는 투자할 달란트를 받은 종들의 비유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는 가지들은 줄기로부터 잘려나가고 맡겨진 것을 늘리지 못한 종은 주어진 것마저 빼앗기게 됩니다.

 

1112. 세상은 그리스도에 적대적인가?

 

 

거룩함에 대한 이러한 역동적인 견해는 거룩함이 순전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것이라는 잘못된 관념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세상을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태도에 대한 공의회의 처방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유약(幼弱)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명에 반대하여 활동하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이러한 세력에 대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높은 벽을 쌓는 방어적인 자세만을 취하는 식으로 대응해서는 안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따르면, 교회는 교회와 그리스도에 대한 반대를 우리의 사랑과 복음화의 노력을 강화시키라는 하느님의 분명한 부르심으로 인식합니다.

 

1113. 거룩함은 전기충전과 같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거룩함이 전기 충전같다고 봅니다.  우리가 거룩해지고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게 되면서 우리는 충전됩니다.  땅에 접지한 무엇이든 누군가를 만지게 되면 그러한 전기 충전을 잃게 될 가능성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서 우리는 유약하거나 주제넘게 말하고 행동해서는 않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 전기충전의 힘이 너무도 큰 것이어서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기만 해도 그들이 충전될 거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우리 모두에게 “누군가에 손을 뻗어 그와 접촉하라”촉구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1114. 성령의 선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공의회를 성령께서 오늘날의 교회에 주신 선물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교황은 묵시록의 다음 구절을 자주 언급하십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요한 묵시록 2:7)

 

예를 들어, 당신의 저서  『쇄신의 원천』Sources of Renewal 에서 교황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공의회의 전체적인 체험에 걸쳐 우리는 교회들에 말씀하시는 (참조, 요한 묵시록 2:7)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께 빚을 졌습니다.”(쇄신의 원천, 9-10)

 

빚을 졌다는 말씀!  귀중한 선물을 받은데 대한 감사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앞에서 제가 “2차 바티칸 공의회”라는 단어를 말씀드렸을 때 여러분의 마음속에 처음으로 들어왔던 단어가 과연 그것이었습니까?  하지만 그것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그 공의회를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선물이라?  분명히 자신이 받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열어보지 않고 지나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으로부터 온 이러한 가르침의 선물을 열어 보셨습니까?

 

1115. 아브라함과 라자로

 

 

저는 이러한 선물을 매우 면밀하게 묵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가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군요.  여러분은, 죽은 자들로부터 라자로를 다시 살려내어 자신의 다섯 형제들에게 보내어 경고함으로써 영원한 고통을 피하게 달라고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간청한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에 대해 아브라함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네 형제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될 것이다.”  죽은 사람들로부터 누군가를 자신의 형제들에게 보낸다면 그들은 뉘우칠 거라고 고집하자 아브라함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까 16:29-31)

 

이 비유를 오늘날의 우리에게 적용시킬 수는 없을까요?

 

오늘날 많은 사람이 교회를 인도해줄 기적을 하느님께 청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엄청난 볼거리를 제공하는 특이한 개입 방법으로써 쇄신되는 것이 과연 하느님의 지혜일까요?  아마도 우리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반복적인 훈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이 세대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이라는 선물을 통한 성령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면, 그들은 하느님께서 보다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말씀하신다 할지라도 듣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의 선물을 경멸하지 맙시다!  특별히 2000년 대희년을 준비하는 시점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성령께서 오늘날의 교회에 말씀하고 싶어하시는 바로 보는 교황의 호소에 관심을 기울입시다.  교황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써 우리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새로운 천년기를 위한 최상의 준비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을 각개인과 온 교회의 생활에 되도록 충실하게 적용하려는 새로운 투신으로 표현될 수 있을 뿐입니다.”(제삼천년기, 20)

 

Ⅱ.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거룩함에로의 부르심.

1. 바티칸 공의회는 무엇을 가르쳤습니까?  요한 바오로 2세에 따르자면, 새천년기를 가장 잘 준비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공의회에 관여한 주교들이 아무런 본질적인 것도 변하지 않았음을 확증했음에도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느낍니다.

2. 어떻게 본질적으로 변한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3. 본 강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우선적인 목표를 무엇이라 인정합니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네 가지 목표가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 제1항에 명시되어 있음을 주목하십시오)

회개는 거룩함으로 이어집니다.(참조, 가톨릭 교회 교리서, 773)  “교회의 구조는 온전히 그리스도 지체들의 거룩함을 위해 있는 것이다.”

4.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5. 거룩함이란 무엇입니까?  거룩함에 대한 흔한 오해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6. 거룩함에 관해 교회는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진실된 답변: 가톨릭 교회 교리서 773, 824, 레위서 11:45, 베드로 전서 1:13-21을 보십시오.  아울러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제5장을 살펴 보십시오.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제5장은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거룩함에로의 부르심이 보편적임을 천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이란 사제나 수도자들에게만 유보된 무엇이 아닙니다.  

7. 거룩함이 어떻게 복음화와 관련을 갖습니까?

거룩함이란 역동적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생산적으로 배가시키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요한 복음 15:5마태오 복음 25:14-30을 보십시오.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는  “공유할 수 있는 어떤 좋은 것이라도 그것을 실제로 더불어 나누지 않는다면 온당하게 소유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8. 세상은 교회에 적대적입니까?  무엇에 관해 그렇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대응합니까?

9. 거룩함은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 안에 어떻게 영향을 줍니까?

10. 요한 바오로 2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무엇이라 부르십니까?  우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반응합니까?

11.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하여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들은 바에 비추어 본다면 우리는 아브라함과 라자로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까 16:29-31)는 우리가 들어야 할 내용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나요?  이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가르침에 어떻게 적용되나요? (제삼천년기, 20을 보십시오.)

 

1116. 질문: 우리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성서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자주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질문한다는 사실은 주목할만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말을 들은 청중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루까 3:10, 12, 14)라고 묻습니다.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군중은 “형제 여러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사도행전 2:37)라고 묻습니다.  바오로가 기적적으로 감방에서 빠져 나오자 간수는 “제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겠습니까?”라고 질문합니다.(사도행전 16:30)

 

그 패턴은 분명합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현존을 알게 되면, 즉각적으로 “제가 무엇을 해야 좋겠습니까?”라는 질문이 생겨납니다.  하느님 현존에 대한 인식은 기적이나 깊이있는 감동적인 가르침, 또는 증언을 통해서 올 수 있습니다.  그 원천과는 상관없이,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인식하게 된 사람에게는 질문이 솟아 오릅니다.  왜 그럴까요?

 

1117. 답: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만들어졌다.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직관적으로 우리는 전생애에 걸쳐 우리를 따라오는 질문--행복해지고 완전해지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만 하겠는가?--에 대한 명시적인 답변을 주실 수 있는 분이 하느님밖에 없음을 압니다.  

물론, 이러한 질문을 다양한 형태로 제기할 수 있습니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행복하다는 것은 가능한 것인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왜 우리는 고통을 받는가?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인가?  이러한 물음은 우리 자신이 누구이고 왜 창조되었는지 알고자 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갈망의 다양한 표현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신앙의 실존적 가치를 밝히 드러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서 성서적 주제들을 발전시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실존적”이라는 말을 삶에 관련된다, 삶에 의미를 준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구체적인 내포적 의미를 갖는다는 뜻으로 사용하였습니다.

 

1118. 질문: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도와주와기 위해 교회가 세워졌다고 이야기합니다.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각 세대에 알맞은 방법으로 교회는 현세와 내세의 삶의 의미 그리고 그 상호 관계에 대한 인간의 끝없는 물음에 대답해 줄 수 있을 것이다.”(현대 세계의 사목헌장, 4)

 

“세계의 현재 발전을 직시하며 가장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거나 새삼 예민하게 절감하는 사람들이 날로 더욱 많아지고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토록 커다란 발전이 이루어졌음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고통과 불행과 죽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막대한 대가를 치르고 얻은 저 승리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인간은 사회에 무엇을 줄 수 있고 또 사회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이 지상 생활 다음에는 무엇이 따라오는가? (현대 세계의 사목헌장, 10)

 

1119. 답: 오직 하느님만이 인간의 마음을 충족시킬 수 있다.

 

 

“오 하느님,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 쉬기까지 쉼이 없나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가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주실 수 있다고 말합니다.  더군다나, 하느님께서는 교회에게 하느님의 신비를 인간에게 드러내줄 임무를 위임하셨습니다.  교회는 인간이 결코 이 세상이 주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인간 마음의 가장 깊은 열망을 만족시키실 수 있습니다.  

 

1120. 질문: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으려면 제가 무엇을 해야 좋겠습니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러한 방식으로 신앙을 바라보는 관점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한 당신의 이해, 그리고 당신의 가르침 전체의 중심 요소로 삼으십니다.  교황은 “바티칸 제2차 공의회는 인간의 영원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 계시 안에 있음을 본다”고 생각하십니다.(쇄신의 원천, 63)  이러한 주제는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으려면 제가 무엇을 해야 좋겠습니까?”라고 예수님께 물은 부자 청년의 질문에 대한 교황의 묵상에서 가장 충만히 발전되었습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예수께 와서….” 마태오 복음이 이름을 대지 않은 그 젊은 사람은 의식적으로든 아니든 인간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 다가와 윤리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모든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젊은 사람에게 있어서 물음은 따라야 할 규정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삶의 진정한 의미에 관한 것입니다. (진리의 광채, 7)

 

1121. 답: 그리스도를 따르라.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 선한 무언가에 대한 자연적인 열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만족시킬 절대적인 무엇과 궁극적인 선--그러한 선(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이 있음을 감지합니다.

 

“부자 청년이 나자렛 예수께 던진 질문은 그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삶에 근본적이고 피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행해야 할 윤리적 선에 관한 질문이고 영원한 생명에 관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는 윤리적 선과 자신의 삶의 완성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무엇이 선한 것이고 무엇이 악한 것인지에 대한 질문의 답을 듣기 위하여 다시 한번 그리스도께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조건과 그 소명 전체에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진리의 광채, 8)

 

우리가 자신을 알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앎으로써만 가능합니다.  만일 우리가 다른 기준--우리의 문화나 또래 그룹이나 가족, 허깨비같은 이데아--으로써 자신을 재보려 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정확히 판단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의 약함과 죄많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에 가까이갈 수 있고 그리스도를 닮을 수 있습니다.

 

1122. 문:우리는 어디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

 

 답: 양심, 종교, 교회

 

 

기본적인 질문에 대한 하느님의 답을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는 신앙으로 사람들을 이끄는중에는 성령의 선물의 협력이 있습니다.  

 

우선, “진리의 성령”께서는 기본적인 질문을 주십니다.  그후 다양한 방식--예를 들어 우리의 양심을 통해서,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종교, 특별히 가톨릭 교회를 통해서--으로 답을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궁극적인 답변이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역사 전체의 열쇠요 중심이요 목적”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 편에 선 사람”(요한 18:37)과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귀가 있는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가져다 주십니다.

 

1123. 질문: 양심은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목소리이다.

 

 

“이렇게 하느님이 새겨 주신 법을 인간은 그 마음에 간직하고 있으므로 이 법에 복종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존엄성이며 … 양심은 인간의 가장 은밀한 안방이요 인간이 저 혼자서 하느님과 같이 있는 지성소이며 그 깊은 곳에서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려 온다.”(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헌장, 16)

 

이러한 질문과 답변의 역학은 자연과 초자연의 “교차점”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교차가 일어나는 지점이 인간의 양심입니다.  그곳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완성되는 법이 밝혀지는” 장소입니다.(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헌장, 16)  우리는 양심을 통하여 알게되는 진리 안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양심은 하느님의 목소리를 중재하기 때문입니다.  종합해서 말씀드리자면, 양심으로써 알려진 하느님의 법을 따름으로써 인간은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습니다.”(인간의 고통 Dolentium Hominum, 3)

 

1124. 답: 종교는 답을 찾고 준다.

 

 

종교 안에서 인간은 위에 제시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습니다.  그리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우리 존재를 둘러싸고 있는 신비’와의 관계를 정립합니다.  다양한 비그리스도 종교들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인간적인 추구에 대한 표현인 반면, 그리스도 신앙하느님의 계시에 기초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에 다른 종교들과 몇몇 유사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인 차이를 발견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 1985년 6월 5일 일반 알현)

 

모든 종교는 공통적으로 동일한 시작점, 즉 모든 사람이 질문을 회피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물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질문은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것입니다.  그 답변은 궁극적으로 오직 하느님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질문하고 있는 사람이 그 사실을 의식하고 있든 그렇지 않든 모든 경우에 해당됩니다.

 

1125. 질문과 답변: 계시 종교들

 

 

갖가지 종교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견지하는 신념 체계입니다.  모든 종교는 그것이 계시에 기반을 둔 것인지 아닌지에 따라 나눌 수 있습니다.

 

이슬람교, 유대교, 그리스도교의 세계 삼대 종교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계시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 세 종교는 각기 계시가 어떻게 완성되고 그 충만함에 이르게 되는지에 대한 이해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고 충만함에 이르게 됨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1126. 나는 너에게 누구이냐?

 

 

삶과 그 의미에 관한 가장 근원적인 모든 질문은 궁극적으로 종교적인 물음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만이 답변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답변이 되시기 때문에, 암시적 또는 명시적으로 모든 그러한 질문에는 그리스도에 관한 물음이 따라 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질문하길 원하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너에게 나는 누구이냐?”

 

모든 이의 구원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이 용기있는 종교가일는지는 모르지만 그 메시지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 평가절하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어 그분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임이 별로 실천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인 것입니다.  다른 이들은 예수님의 메시지에 관심이 없습니다.  잘못된 질문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재물을 쌓는 일이나 다른 사람들의 좋은 평판을 얻고자 하거나 즐거움을 극대화시키는 일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에게 과연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1127. 답: 당신은 저의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에게 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치유하는 소명을 가진 의사에 당신을 비유하십니다.  의사가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 병자들에 봉사하듯이, 예수님께서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러 오셨습니다.  “나는 의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까, 5:32)

 

예수님께서는 또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십니다.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약함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사람입니다.  제1-3강에서도 살펴볼 것이지만, 그들은 성 바오로 사도처럼 다음과 같이 질문하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러한 질문은 더 깊이있는 물음으로 이어집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로마서 7:14-25)

 

이러한 질문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음입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은 흥미진진하고 중요하며 생명을 줍니다.  그것은 기꺼이 가진 모든 것을 팔아 살만한 엄청난 가치를 지닌 진주가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올바른 질문을 할 때에만 그렇게 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죄와 고발하는 양심, 그리고 화해하지 못하는 죄책감, 그리고 죄로 말미암은 두려움에 대한 하느님의 답변이십니다.  신앙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주셨음을 발견한다면, 그리스도는 진정 그분 자체, 우리의 구원자로 보이게 됩니다.

 

1128. 진정한 모습의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

 

* 위대한 예언자

* 좋은 사람

* 기적(奇蹟)을 행하시는 분

 

 

이에 대해 명확히 합시다.  예수님과 관련을 맺고 “내가 너에게 누구이냐?”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 안에서 위대한 예언자, 깊이 있는 교리 체계를 가르치는 교사를 봅니다.  그분은 분명히 그러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예수님 안에서 그것만을 보고 있다면 그 사람은 그분의 가장 깊이 있는 정체성을 아직 모르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 안에서 모범적인 삶을 살은 성자(聖者)를, 하느님과 관련을 맺는 법의 완전히 모델을 봅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그러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것도 그분의 정체성의 핵심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권능을 봅니다.  그분께서는 기적을 행하시고 모든 유형의 고통, 즉 질병, 기근, 외로움, 자연재해, 죽음을 없애는 분이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그러한 분이십니다.  하늘과 땅을 다스릴 모든 권한은 예수님께 맡겨졌습니다.  복음은 예수께서 악을 제압하는 힘을 가지고 계심을 확인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돌을 빵으로 만드는데 그러한 힘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악(惡) 중 가장 큰 악인 죄에 대해 말씀하시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1129. 답: 예수님은 온전한 성삼(聖三)이시다.

 

 

우리가 예수님을 죄, 우리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으로 보게 될 때에만 예수님께서 당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신 대로의 그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부께서 성령을 보내시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파견하신 하느님의 아들이 바로 예수님임을 알게 될 때만이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충만히 대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교황께서 『제삼천년기』(Tertio millennio adveniente) 에서 교회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한 포용과, 거룩함에로의 부르심 외에도 진지한 양심 성찰을 요구하신 이유입니다. 이러한 성찰은 회개로 이어집니다.  제삼천년기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활을 보다 효과적으로 다스리시도록 내어드릴 때에만 앞의 두 천년들과 다른 시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구세주가 필요함을 더욱 깊이 인식하게 되는--고통으로 가득하지만 생명을 주는--실천을 거칠 때에만 그리스도의 다스림이 실현될 것입니다.

 

달리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자신의 삶의 죄의 실상에 대해 인식해야만 합니다.  이는 우리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도록 이끌 것입니다.  “누가 나를 구할 것인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발견할 때, 우리는 예수님께 보다 견고하게 붙어서 그분 안에서 보다 완전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Ⅲ. 신앙에 관한 문답식 접근

1. 자신이 하느님의 현존 안에 있음을 발견하게 될 때 거의 언제나 즉각적으로 어떠한 질문이 나오게 됩니까? (참고, 루까 3:10, 12, 14; 사도행전 2:37; 16:30)

2. 삶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누가 이에 대한 답을 줄 수 있습니까?

3. 교회의 사명은 어떻게 인간이 자신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끕니까?

4.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기 위해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참고, 마태오 16:19)

   본 문장은 요한 바오로 2세께서『진리의 광채』(Veritatis Splendor)에서 도덕적 삶에 대한 당신의 통찰로부터 이끌어 온 것임에 주목하십시오.

5. 이러한 질문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어떠한 이슈가 그와 관련됩니까?

6. 우리는 하느님의 음성을 어디에서 듣습니까?

7. 인간은 어떻게 “하느님께 다가갈”수 있습니까?

8. 모든 종교가 공유하는 시작점은 무엇입니까?

9. 이슬람,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공유하는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그러한 유사점 중에서도 이 세 종교는 어떻게 다릅니까?

10. 인간의 근본적인 질문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습니까?

11. 성 바오로는 인간의 상태에 대해 어떻게 묵상하십니까? (참고, 로마서 7:14-25)  예수께서는 우리를 무엇으로부터 구하십니까?

12. 세상의 비극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무엇입니까? (참고, 가톨릭 교회 교리서 387, 1440, 1846-1851, 1871-1872)

13. 우리의 양심에 대한 성찰은 우리를 무엇으로 이끌게 되어 있습니까?

 

1130. 답: 모든 질문들에 대한 궁극적인 답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이 모든 것을 말하고 실행할 때 우리가 삶의 의미에 대하여 물은 질문은 실제로 사랑에 관한 질문이 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우리도 사랑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1131. 질문: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사는 세상에 사람들이 사랑을 찾고 있다는 어떠한 증거가 있을까요?  단지 사람들이 듣는 음악을 들어보고 기분전환을 위해 보는 책이나 영화들을 보십시오.  단지 당신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고 자신의 체험에 대해 성찰해 보십시오.  이 모든 것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다음 가르침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은 사랑없이 살 수 없다. 인간에게 사랑이 계시되지 않을 때, 인간이 사랑을 만나지 못할 때, 사랑을 체험하고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할 때, 사랑에 깊이 참여하지 못할 때, 인간은 자기에게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남게 되며 그의 생은 무의미하다.”(인간의 구원자, 10)

 

이에 비추어 볼 때, 아마도 우리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가장 자주 인용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중 『현대세계 교회에 관한 사목헌장 』 제22장의 의미를 보다 충만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1132. 답: 사랑하고 사랑받음

 

 

“실제로, 사람이 되신 말씀의 신비 안에서만 참으로 인간의 신비가 밝혀진다. 첫 인간 아담은 장차 오실 분, 곧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예형이었다.  새 아담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신비와 그 사랑의 신비를 알려 주는 바로 그 계시 안에서 인간을 바로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내 보여 주시고 인간에게 그 지고의 소명을 밝혀 주신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현대세계 교회에 관한 사목헌장, 22)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당신을 충만히 계시하신다는 언급은 지극히 중요합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아담의 죄로 인해 상실했던 선을 회복시켜 주셨고, 사랑을 우리 실존의 중심으로 삼음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십니다.  그리스도는 지극한 사랑을 주시는 분이시며 자기를 증여하시는 분이십니다.

 

자신을 증여하는 것이 사랑의 행위입니다.  따라서 공의회는 인간이 사랑하고 사랑받음 안에서만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사랑을 위해 창조되었고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히 계시됩니다.  사랑에 관한, 자신이 사랑받을 가치가 있음에 관한, 그리고 사랑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관한 우리의 모든 질문에 대한 답변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합니다.  

 

1133. 올바른 질문하기

 

 

지금까지 강의를 들었다면, 우리가 올바른 질문들을 하고 있는지 자문해 본다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분명해졌을 것입니다.  우리의 문화는 과연 올바른 질문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까?  대중매체가 양심을 성찰하고 죄에 대한 진실을 대면해야 한다는 소명을 강화시키고 있습니까?  교육 시스템은 충만한 의미에서의 정신, 가장 중요한 질문들을 구체화하는데 봉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의 문화, 대중매체, 그리고 교육 체계는 세속적이고 즉흥적인 일과 즐거움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까?  그것들은 개인적 책임성과 초월적인 것에 대한 인식을 둔감시키는 인간의 견해를 전파하고 있습니까?

 

재산을 획득하는 일에 몰두(沒頭)하고 있고 있거나 이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데 사로잡혀 있거나, 또는 삶이 줄 수 있는 극대화된 즐거움을 찾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셔야 합니까?

 

1134. 증거자로 부르심 받음

 

 

그렇게도 많은 반대 세력이 있음에도 우리는 어떻게 달라지고 가정과 사회 안에서 복음의 전파자가 되기 시작할 수 있을까요?  신앙에 대한 질문과 답변의 역학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답하시는 올바른 질문을 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우리의 말과 행실을 사용하실 수 있음을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우리는 교황 바오로 6세의 복음화에 대한 생각을 불러 일으키는 텍스트로써 본 강좌를 끝마치려 합니다.

 

복음은 모든 것에 앞서 증거로서 선포되어야 하겠다. 가정으로 한 신자나 적은 신자 단체가 지역 사회 안에 살면서 주변 사람들을 이해하고 포섭할 줄 알고 그들과 행운을 함께 하고 고상하고 선한 일에 협동 단결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 밖에 순수하고 자발적인 방법으로 현세 가치를 초월하는 가치에 대한 그들의 신앙과 볼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사물에 대한 그들의 희망을 드러내보인다고 할 때 이와 같은 무언의 증거를 통해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주위 사람들의 마음에 “어찌하여 저 사람들은 다르며 왜 그렇게 사는 것이며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시키는 것일까? 왜 그들은 우리와 함께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어쩔 수 없는 의문을 가지게 할 것이다. 이러한 말없는 증거는 기쁜 소식을 힘 있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선포하는 것이 된다. 복음 선교는 바로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문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전혀 들어보지 못한 사람, 영세는 하고도 신앙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 그리스도교 사회에 살고 있으나 그리스도교적 원칙을 따르지 않는 사람, 고통 중에 누구라고 표현은 못하지만 어떤 절대자를 찾는 사람들이 제기하는 첫 의문이 될 것이다. 그리고 더 깊고 절박한 의문이 이러한 증거로써 제기될 것이다. 함께 살고 행운을 함께 나누고 결속하는 것은 복음 선교의 실천을 위해 필요하고 대개는 제일가는 분야라 하겠다.  이러한 증거를 하도록 모든 신자들은 부름을 받는다. 그리고 이러한 면에서 신자들은 참다운 복음 선포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현대의 복음 선교, 21)

 

1135. 우리가 사랑받은 것처럼 사랑하라.

 

 

우리는 이제 원점으로 돌아왔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목적에 대한 검토에서 시작하여 우리는 그 목적이 우리 안에 거룩함에 대한 하느님의 부르심에 너그러이 응답하는 자세를 다시 불러 일으키는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그 다음 우리는 거룩함이란 삶에 관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계시, 삶에 대한 우리의 질문에 대한 하느님의 답변인 계시에 의해 살아감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거룩함의 증거가 다른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앙으로 이끌 수 있는 질문을 불러 일으킴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쇄신, 즉 새로운 복음화에의 부르심(또는 선교 사명의 재활성화), 그리고 질문과 답변의 역학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하느님의 답변을 발견하기에 이른 우리는 타인을 위해 이와 같은 대화를 하는 대리인으로 부르심받았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것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천합니다.

 

다음 1-2강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질문에 대한 하느님의 분명한 답을 발견하는 이러한 신앙의 본질에 대해 묵상하면서 두 가지 근본적인 진리를 발견할 것입니다.  첫 번째, 신앙은 실존적인 것이기 때문에 깊이있게 인격적이라는 것입니다.  즉, 신앙으로써 우리는 자신을 하느님께 의탁해 드립니다.  두 번째,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님이자 벗으로서 알게 될 때 그분을 충만하게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