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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2.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요 벗이시다.
작성자김신 쪽지 캡슐 작성일2005-01-01 조회수984 추천수1 반대(0) 신고

제1-2강: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요 벗이시다.

(Talk 2: Jesus Christ is Both Lord & Friend)

 


 

1201.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 주님이요 벗

 

 

1-1강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하고 계신 대목의 복음서를 살펴 보았습니다.  이러한 질문은 성 베드로의 답변, "당신은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와 더불어 그리스도께서 우리 개개인과 더불어 나누길 소망하시는 대화의 모델 역할을 합니다.

 

존재의 의미를 묻게 만드는 삶의 상황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계속해서 질문하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러한 질문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베드로와 같은 믿음의 답변을 불러 일으키길 소망하십니다.  그것은 삶의 물음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을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는 답변입니다.

 

1202.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요 벗이시다

 

   * 구원의 대화

   * 믿음은 하느님께 의탁하고 동의하는 것이다.

   * 예수그리스도는 주님이요 벗이시다.

 

 

본 1-2 강은 하느님과의 대화의 본질인 믿음 속으로 깊이 탐구해 들어갈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신뢰 관계는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주님이자 벗임을 받아들일 때에만 온당이 균형을 이룸을 볼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믿음의 대화, 교황 바오로 6세께서 "구원의 대화"라 부르셨던 대화에 대한 전반적인 고찰로써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편에서 바라본 관점 즉, 하느님께서 어떻게 사랑으로부터 이러한 대화를 시작하시고 우리를 당신과의 친교로 부르시는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 편에서 바라본 관점 즉, 우리의 믿음에 찬 응답을 생각해 볼 것입니다.  그후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의탁과 동의의 행위로서의 신앙의 본질에 대해 묵상할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요 벗임을 아는 것이 우리 신앙 생활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볼 것입니다.

 

1203. 구원의 대화

 

* 신앙은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두드러진 일면은 신앙이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라 명시적으로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일부 가톨릭 신자들에게 갈등의 반응을 불러 일으킵니다.  어떤 신자들은 개신교처럼 들리는 용어에 거부감을 갖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를 갖는다"는 주장은 순복음교인들의 특징이 아니었는가?  일부 순복음교인은 교회, 특히 교황과 성모 마리아가 중간에 개입되어 있다는 이유를 들어 가톨릭 신자들이 이러한 인격적인 관계를 갖을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합니다.

 

어떤 가톨릭 신자들은 그러한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용어 사용을 환영합니다.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와 충만히 인간 관계를 갖을 가능성 -- 그외에 달리 인격적인 관계가 될 수 있겠습니까? -- 이 기쁜 소식으로 다가옵니다.

 

모든 종교적 수행과 믿음과 제도 안에서 그리고 이면에서 인간을 재발견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상쾌한 공기의 숨결처럼 감흥을 줍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하느님, 그리고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로서의 신앙을 강조한 것은 가톨릭 신앙과 실천의 본질적인 어떤 것도 희생시키지 않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그러한 강조가 우리의 가톨릭 신앙과 흠숭을 완성하게 될 것임을 짧게나마 볼 것입니다.

 

1204.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신앙의 신비는 위대하다." 교회는 사도 신경에서 신앙의 신비를 고백하며(제1편), 성사 전례 중에 이를 거행하여(제2편), 신자들의 삶이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일치하도록 한다(제3편). 그러므로 신자들은 이 신비를 믿고 거행하며, 또한 살아 계시는 참 하느님과 맺는 생생하고 인격적 관계 안에서 이 신비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 관계가 바로 기도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2558)

 

이러한 구절에서처럼,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네 부분으로 구성된 구조를 윤곽짓는데 그러한 새로운 표현을 사용합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우리가 사도 신경을 믿고, 성사들을 기념하며,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데 있어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갖는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1205. 마음으로부터의 기도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 안에서 신앙과 실천을 뿌리내림으로써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믿고 실천하는 것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 기도라고 가르칩니다.  기도는 생명을 줍니다.  왜냐하는 그것은 "우리의 내밀한 중심"인 마음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온갖 결정과 관계들이 마음으로부터 솟아 나올 때, 단순히 생각하는 부분이나 느끼는 일면만이 아니라 인격 전체가 개입됩니다.  이는『가톨릭 교회 교리서』가 마음을 "결단을 내리는 자리, 진리의 자리, 서로가 만나는 자리, 계약이 채결되는 자리" (2563) 라 가르침으로써 강조하고 있는 바입니다.

 

1206. 인간 내면의 신비

 

 

“인간 내면의 신비는 마음이라는 단어로 표현됩니다.”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설명하셨습니다.  교황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세상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유일무이하고 일회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신비 속으로 관통해 들어가셨고 인간의 ‘마음’ 속에 들어가신 분이시다.”(인간의 구원자, 8)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 인격적 존재의 깊이에까지, "내밀한 중심"인 우리 마음에까지 이르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행하실 때 그리고 우리가 신앙과 사랑으로 그에 응답할 때, 우리는『가톨릭 교회 교리서』가 우리가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갖는다고 한 의미를 체험합니다.

 

1207. 대화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로서의 신앙이라는 주제는 신앙을 대화의 견지에서 이야기할 수 있도록 많은 사람들을 이끌었습니다.  인간은 대화를 합니다.  서로 이야기를 하며 귀를 기울입니다.  그들은 다른 이가 이야기한 것을 곰곰이 생각하며 그에 반응합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대화'라는 단어는 드물지 않게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자유롭고도 인격적인 대화를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불타는 떨기 가운데 모세에게 주신 하느님의 계시를 "하느님께서 속마음을 털어놓으시는 대화" (2575)로 표현하였습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성서를 읽을 때에는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가 이루어지도록 기도가 따라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2653)고 가르칩니다.  마지막으로,『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성사를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라 표현합니다.  "성사 거행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와 만나는 것이며, 이 만남은 행위와 언어를 통하여 대화로 표현된다."  (1153)

 

1208. 우물가에서의 만남

 

 

아울러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성서에 포함되어 있는 실제적인 대화를 사용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기도에 관해 기술하고 있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제4편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사마리아 여인의 우물가에서의 대화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물을 길으러 가는 우물가, 바로 그 곳에서 기도가 무엇인지 놀랍게 드러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만나시려고 우물가로 나오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우리를 찾으시는 분이시고, 마실 물을 달라고 우리에게 청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께서 목말라하신다. 예수님의 청은 우리를 갈망하시는 하느님의 깊은 목마름에서 나온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기도는 하느님의 목마름과 우리 목마름의 만남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목말라하기를 갈망하신다."(2560)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질문과 응답의 동태구조(動態構造) 사용에 주목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우물가로 다가갈 때 우리를 만나십니다.  우물은 생명을 주고 유지시키는 물의 원천입니다.  그곳은 삶과 삶의 의미에 대해 우리를 가장 압박하고 있는 질문에 대한 응답을 발견하러 가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그곳은 바로 그러한 질문들에 대한 응답을 찾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만나러 오시는 입니다!

 

1209. 사랑에 대한 목마름

 

 

아울러 여러분은 예수께서 먼저 말씀을 건네심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먼저 마실 것을 청하십니다. (우리는 이 순간에 대해 다시 이야기할 것입니다.)  지금은 하느님의 목마름과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갈망의 깊이"에 초점을 맞춥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우리 마음이 하느님 안에 이르러 쉬기까지는 쉼이 없다고 이야기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하느님에 대해 그와 비슷한 내용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은 우리가 당신 사랑으로 되돌아갈 때에만 해갈될 수 있는 목마름과 같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느님의 외아들의 목마름에 대한 우리의 사랑에 찬 응답"(2561)입니다.  그러한 감명깊은 심상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우리 마음에 전달하여 충만히 인간적인 방식으로 우리를 확신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1210. 하느님께서는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계신다

 

 

요한 복음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는, 적어도 우리의 견지에서 보면, 구원의 대화가 급속히 우리의 통제 영역을 넘어서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러한 대화에서 하느님과 동등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시며 당신의 모상대로 만들어진 우리의 존엄성에 호소하십니다만, 우리와 대화를 시작하실 때 그분께서는 어떠한 목적을 염두에 두고 계십니다.  모세와 그분과의 대화를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이집트 종살이로부터 이스라엘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회피하려 모세가 제시하는 변명들을 대면하십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그것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이야기합니다:

 

"이 사명에서 하느님께서는 간청하시는 분과도 같으며, 모세는 오랜 줄다리기 끝에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맞추게 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당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으시는 이 대화를 통해서 모세는 기도하는 법도 배우게 된다. 곧, 모세는 회피하거나,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며, 특히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의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주님께서는 당신의 형언할 수 없는 이름을 알려 주시는데, 이 이름은 당신의 위대한 업적을 통해서 드러나게 될 것이다."(2575)

 

1211.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알고 계신다

 

"저에게는 남편이 없습니다."  

"나는 네게 다섯 남편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시금 우리는 질문-응답 동태구조가 작용함을 봅니다.  또한 우리는 하느님의 이름이 모세에게 계시된 사건과 그리스도의 정체가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계시된 사건 사이의 평행구조를 봅니다.  두 경우 모두 하느님께서는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대답하길 원하셨습니다.  대화 전체는 모세를 신앙으로 인도하길 지향합니다.

이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도 해당됩니다.  영민하게도 예수께서는 여인에게 남편을 불러 오라 말씀하십니다.  그녀가 자신에게는 남편이 없다 대답할 때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다섯 남편이 있었고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자는 그녀의 남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대면시키십니다.  그 여신은 대화에서 통제력을 잃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진실을 대면함으로써 그녀는 예수께서 메시아임을 인식합니다.

 

1212. 구원의 대화의 요소

 

* 하느님께서 먼저 말씀을 건네신다.

* 우리는 우리의 질문을 드린다.

*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자유로운 응답으로 초대하신다.

*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말씀을 건네신다.

*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참을성있게 가르치신다.

 

 

이러한 예시들은 구원의 대화의 일반적인 유형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그러한 유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의 목마름으로 표현되는 당신 사랑의 깊은 곳으로부터 하느님께서는 우리와의 친교를 세우시고 또 다시 세우시려 먼저 말씀을 건네십니다.  우선 천지창조를 통하여, 다음은 당신의 계약을 통하여.  이렇게 하느님 편에서 먼저 말씀을 건네심은 우리 마음의 쉼없음, 우리가 고통, 죄, 죽음을 체험하고 사랑을 추구하면서 생겨나게 되는 삶과 그 의미에 대한 질문과 상응합니다.

2. 하느님께서 먼저 말씀을 건네심은 삶과 그 의미에 대한 우리의 질문을 불러 일으킵니다.

3.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신앙과 사랑의 자유로운 응답을 갈망하시면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4.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자유로운 응답에 필요한 은총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5. 대화는 차별없이 모든 인간에게 건네집니다.

6. 대화는 인내의 작업이며 가장 지혜로운 신성한 교수법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한꺼번에 모든 것을 가르치지 않으십니다.  이러한 교수법은 하느님과 당신 백성과의 상호작용,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 개개인과 진행하시는 대화 모두에 적용됩니다. 

 

I. 구원의 대화

1. 그리스도와 베드로의 대화는 어떠한 방식으로 우리 삶의 모델 역할을 합니까?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던지실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불러 일으키고자 소망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2.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순복음 교회 신자들만의 특성입니까?

3. 분명히『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신앙이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임을 가르치며 그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여 네 부분으로 이루어진 전체 구조를 그리고 있습니다.  "신앙은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이다."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가톨릭 교회 교리서』 299, 2558, 2559-2565를 참조.)

4. 마음의 모습은 하느님과 그리스도와 우리의 대화를 어떠한 식으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줍니까?  예수 성심의 모습과 그러한 모습이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있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에 대해 묵상해 보십시오. (『창에 찔리신 분을 보라』에서 라징거 추기경은 예수 성심에 대하여 묵상하고 있습니다.)

5.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이야기하기에 "대화"라는 단어가 가장 적절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물가에서 그리스도와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를 묵상해 보십시오. (요한 4장)

6.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우리의 사랑을 목말라 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어떠한 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께서 우리의 사랑에 대해 가지고 계신 그러한 목마름을 해갈시키는데 있어 기도는 어떠한 식으로 개입합니까?

7. 모세와 불타는 떨기에 대한 성서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출애굽기, 3장).  이러한 대화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어떠한 식으로 특징짓습니까?  모세가 하느님께 드렸던 질문들을 묵상해 보고 그것이 모세가 야훼께 가졌던 또는 부족했던 믿음을 어떤 식으로 드러내고 있는지 묵상해 보십시오. (『가톨릭 교회 교리서』 2575를 참조하십시오.  예수회 존 코트니 머레이는 『하느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문제』에서 그러한 구약성서의 이야기에 대해 묵상하고 있습니다.)

8. 구원의 대화의 요소에는 어떠한 것이 있습니까?

 

1213. 신앙은 하느님께 대한 의탁과 동의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 제시된 대화라는 주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가르침으로부터 발전됩니다. 가톨릭 신앙에 관한 교의 헌장」은 그 첫번째 장부터 하느님께서 당신을 계시하시며 우리가 자신을 하느님께 의탁하고 그분의 계시에 동의하는 대화가 바로 신앙임을 암시적으로 제시합니다.  그 문헌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신앙의 복종’을(로마 16,26; 로마 1,5; 2고린 10,5-6 참조) 드러내야 한다. 이로써 인간은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지성과 의지의 완전한 순종”을 드러내고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가톨릭 신앙에 관한 교의헌장 「하느님의 아드님」, 제3장) 하느님께서 주신 계시에 자발적으로 동의함으로써 자기를 온전히 그분께 자유로이 맡기는 것이다."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헌장, 5)

 

1214. 신앙의 순종

 

 

아브라함과 마리아는 신앙의 순종의 빛나는 모범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그에게 요청하시는 일을 합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의 땅을 떠나 상속받게 될 땅으로 출발하고, 이사악을 번제물로 하느님께 바치고자 합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약속을 지키실 것임을 믿습니다.

 

마리아의 신앙 역시 하느님 뜻에 대한 순종과 하느님 가르침에 대한 동의라는 두 가지 특성을 드러냅니다.  마리아는 천사의 메시지에 "당신의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의 다른 표현인 "네"(Fiat) 로써 응답합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에 수반되는 모든 책임과 결과를 받아들입니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든 약속을 지키실 것임을 믿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순종은 성부께 대한 완전한 순동 속에 일생을 사셨던 그리스도와 우리를 일치시킵니다.  요한 복음 몇몇 상황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성부의 뜻을 이루려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주의 기도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라 우리를 가르치시며 그러한 순종을 올리브 동산에서 되풀이하십니다.

 

1215. 신뢰할만한 품성

 

* 지식, 전문 기술

* 배려, 사랑

* 힘, 능력

 

 

그러한 순종은 노예적이거나 기계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신앙으로써 자신을 의탁한다는 점에 주목하기 바랍니다.  우리는 신앙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위해 그분께 자신을 의탁하고 봉헌하며 헌신하고 내어 드립니다.  의탁이라는 개념은 하느님께서 신뢰받으실만한 분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하느님 손에 내어 드리면서 그분의 지혜와 사랑이 우리가 필요한 것을 주실 것을 신뢰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신앙의 의탁을 수술 받는 경우 자신을 의사에게 의탁하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 생명은 문자 그대로 그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수술 의사에게서 바라보는 세 가지 자질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몸과 그 작용에 대해 우리보다 더 잘 아는 수술의를 원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자신에게서 조언을 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에게 할 수 없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의탁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지식을 주의깊게 적용하여 우리를 돌볼 수 있는 수술의를 원합니다.  뛰어난 지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다른 생각에 골몰해 있어서 나에게 충분한 주의를 기울일 수 없는 수술의라면 나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지식은 효과적인 실천이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지식은 실천할 수 있는 힘, 능력도 함께 요구합니다.  명석하고 사랑에 넘치기는 하지만 수전증이 있는 수술의는 섬세한 뇌수술을 실행하기에 마땅한 사람이 아닙니다!

 

1216.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신앙으로써 의탁하기

 

* 하느님의 지혜

* 하느님의 사랑

* 하느님의 권능

 

 

이제 하느님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성서는 하느님의 지혜와 사랑과 권능의 증거로 넘쳐납니다.  그것은 천지창조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삶과 죽으심과 부활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노예 상태로부터 극적으로 구원하심에서, 당신 백성의 여정 각각의 새로운 단계에서 그들을 준비시키시는 하느님의 권능에서 명확해집니다.

 

우리 자신을 신앙으로써 하느님께 의탁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행복과 완성을 정의(定義)하려는 모든 노력을 포기함을 의미합니다.  대신 우리는 참된 정의를 하느님의 지혜에 의탁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러한 의탁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만이 충만히 우리를 사랑하실 수 있음을 깨달음을 의미합니다.  오직 하느님의 사랑만이 우리의 온 존재를 긍정할 수 있게 해 줍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충만히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자신을 하느님께 의탁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노력보다도 하느님의 권능에 더 큰 신뢰를 둡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위한 충만하고 행복한 삶의 비젼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러한 행복을 얻기를 바라시며 그것은 우리의 원의(願意)보다 훨씬 더 큽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선물을 받고 당신 안에 충실히 머물러 있게 하심으로써 그러한 행복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계십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지혜와 사랑과 권능에 관한 진실은 우리를 감동시켜 자신을 하느님께 맡겨 드리고 의탁하도록 이끕니다.

 

1217. 순종과 신뢰

 

 

진정으로, 아담과 이브의 원죄는 하느님께 대한 신뢰의 상실로 이루어집니다.  "악마에게 유혹을 받은 인간은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창조주를 향한 신뢰가 죽게 버려 두었으며, 자신의 자유를 남용함으로써 하느님의 계명에 불순종하였다."  첫 범죄는 모든 죄의 원형(原形)이 됩니다.: "그 후의 모든 죄는 하느님께 대한 하나의 불순종이 되고 하느님의 선하심에 대한 신뢰의 결핍이 될 것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397)

 

불순종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의 상실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은 우리가 하느님을 신뢰할 수 있도록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을 또다시 주셔야 했습니다.  이러한 신뢰의 열매는 신앙의 순종입니다.  성서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드리신 희생에서 드러난 하느님 사랑의 계시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하셨습니다. (로마서, 5:8)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꺼이 돌아가신 의미에 대해 지금 더 깊이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1) 자신을 하느님께 의탁하는 신앙의 순종, 그리고 (2) 사랑으로 인하여 당신 지혜와 권능으로써 우리에게 봉사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며 당신과의 친교로 우리를 불러 주시는 하느님에 관해 계시된 진리 사이의 중대한 연관성이 있다는 점을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1218. 동의와 의탁의 관계

 

 

신앙을 정의하는 마지막 요소는 자신을 하느님께 의탁하는 순종과 연관됩니다.  마지막으로 언급되는 것은 동의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의탁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가 설명하고 있듯이, "‘믿는다는 것’은 인격과 진리, 이 두 가지와 관련되어 있다.  진리를 증언하는 인격에 대한 믿음을 통해 진리를 믿게 되는 것이다."(177)

 

믿음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믿으라 요구하는 사람의 인격에 신뢰성를 요구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신뢰한다면, 우리는 그분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진리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주실 수 있는 권능을 가지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께서 당신 교회를 통해서 우리를 인도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1219. 신앙의 "일괄 처리" 방식

 

 

 

신앙은 하느님의 위격과 신뢰성에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신앙은 우리가 "실무율"(悉無率)이라 부를 수 있는 것에 따라 작용합니다.  일단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누구인가와 그분의 "신뢰성에 대한 특별한 요구"를 우리가 인식한다면, 그리고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 -- "자유로이 인식하고 신뢰로써 존중해야 할" 피조물 -- 를 깨닫는다면, 자연스럽게 완전한 의탁과 순종과 동의가 그러한 인식 뒤를 따라올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는 금지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인격적 권위는 각 계명 뒤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성 야고버께서 말씀 하신 대로, "누구든지 율법을 전부 지키다가 한 조목이라도 어기면, 율법 전체와 관련하여 유죄가 됩니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하고 이르신 분께서“살인해서는 안 된다.”고도 하셨습니다. 그대가 비록 간음하지 않더라도 살인하면 율법을 어긴 범법자가 되는 것입니다." (야고버, 2:10-11)

 

우리는 어떤 계명이 지혜로운 것이고 어떤 교회 가르침이 수용할만한 것인가를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입니다.  그러한 계명과 가르침 뒤에 자리잡고 있는 권위를 가지신 분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II. 하느님께 대한 의탁과 동의로 신앙을 정의함

1. "신앙"을 하느님께 대한 의탁과 동의로 정의하는 것은 우리와 하느님과의 대화를 이해하는 방식에 어떠한 영향을 줍니까?  아브라함, 마리아, 바오로와 같은 위대한 성서의 인물을 묵상해 보십시오.

2. "신앙의 순종"은 무엇을 지칭하며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을 줄까요?

3. 신앙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의탁한다고 할 때 하느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4. 개인적으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가 신뢰를 드릴만한 분이심을 믿습니까?

5. 어떻게 해서 원죄는 모든 죄의 원형이 되었습니까?  죄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얼마나 심각한 것일까요?  (참고, 가톨릭 교회 교리서 397)

6. 동의와 의탁은 어떠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까? (요제프 피퍼(Josef Pieper)는 그의 저서 『믿음, 소망, 사랑』에서 특별히 이러한 국면에서의 신앙에 대한 탁월한 묵상을 합니다.)

7. 우리의 신앙을 의탁하는 분의 인격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어떻게 그분의 말씀에 동의하는가에 어떠한 영향을 줍니까?  인격을 믿는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를 내포합니까?  이러한 인격에 대한 이해에 비추어 교회의 모든 가르침에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까요?

 

1220. 바오로 테스트

 

* 내일 시험: 예수님은 당신의 주님이요 벗이십니까?

 

 

이제 우리는 본 1-2강의 마지막 주제,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요 벗입니다"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전에 살펴 보았듯이,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그리스도와 인격적 관계를 맺으라 호소합니다.  본 1-2강의 상당 부분을 신앙이란 무엇인가를 해석하는데 할애하였고, 이제 우리는 우리가 예수님은 우리 주님이요 벗이라 부를 수 있는 관계를 맺고 있는지 성찰할 수 있는 보다 좋은 위치에 와 있습니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에서 성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도전합니다:

 

자기가 믿음 안에 살고 있는지 여러분 스스로 따져 보십시오. 스스로 시험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까?  깨닫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실격자입니다. (고린토 후서 13:5)

 

어떻게 우리는 이러한 시험에 응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믿음 안에 살고 있는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성 바오로께서 "신비는 여러분 가운데에 계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참조, 골로사이 1:27) 라고 하신 바를 우리가 살고 있다는 징표는 무엇입니까?

 

1221. 연구 지침:『가톨릭 교회 교리서』

 

  I. 신앙   

 II. 성사

III. 십계명

 IV. 기도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그러한 시험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총 네 편으로 이루어진 교리서는 전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의 가톨릭 신앙을 포괄적으로 드러내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에 대한 충만한 진리가 드러나는 분이십니다. (제1편)  그리스도의 생명의 신비는 성사 안에서 재현됩니다. (제2편)  예수님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원형이십니다. (제3편)  그리스도는 우리 기도의 원형이십니다. (제4편)  『가톨릭 교회 교리서』가 우리가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 나감을 어떻게 돕는지를 간략히 살펴 보도록 합시다.

 

1222. 신앙의 직무

 

 

신앙고백(Creed)을 설명하고 있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편은 우리의 신앙의 신비의 출발점을 알립니다.  교리서 제1편은 우리가 가톨릭 신자로서 무엇을 믿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이 부분은 친교를 이루시려 당신 백성을 부르시는 사랑의 하느님 (516) 으로서 당신을 계시하려고 하느님께서 행하신 바를 강조합니다.  그리스도는 계시의 완성이며 충만함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다른 모든 말씀들을 포함하고 있는 단일하면서도 무한하신 하느님의 말씀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말씀’ 안에서 모든 것을 말씀하셨다."(65)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편은 우리의 삶이 신앙고백에서 고백하고 있는 신앙에 부합하는 "아멘"이 되어야 함을 상기시킴으로써 끝을 맺습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성 아우구스티노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신경은 여러분에게 거울과 같은 것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믿는다고 고백한 모든 것을 정말 여러분이 믿고 있는지 그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십시오. 그리고 날마다 여러분의 믿음 안에서 기뻐하십시오."(1064)  곧 이어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를 위한 성부의 사랑에 대한 결정적 ‘아멘’이시다. 그분은 성부께 대한 우리의 ‘아멘’을 받아서 완성하신다." (1065) 고 부언합니다.

 

1223. 나는 믿나이다

 

 

만일 우리가 믿는 신앙고백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리고 신앙고백에서 표현하고 있는 대로  우리의 정체성이 그리스도를 반영하고 있다면 우리는 성 바오로의 시험을 통과한 것이 됩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질문해야만 합니다: 나는 나의 삶의 목적에 대한 충만한 진리를 알기 위해 나의 마음을 신앙고백에 두고 있는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생명의 신비는 나날의 사건들에 의미를 주고 있는가?  신앙고백은 구원의 대화를 시작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나의 응답을 표현하고 있는가?

 

나는 "믿음으로 신경(信經)을 고백함으로써 하느님이신 성부, 성자, 성령과의, 그리고 전체 교회와의 친교가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신앙고백은 성 암브로시오께서 "이 신경은 영적인 인장(印章)이고, 우리 마음의 묵상이며, 늘 현존하는 보호이고, 우리 영혼의 보물임이 확실합니다."(197)라고 말씀하신 바대로 나에게 다가오는가?

만일 이 모든 질문에 대해 긍정의 답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성 바오로의 시험을 통과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1224. 전례와 성사

 

 

전례와 성사에 관해 설명하고 있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편에서 시험은 계속됩니다.  마찬가지로, 전례는 만일 우리가 믿음 안에 있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신다면 우리가 비추어 보아야 할 거울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모든 믿는 이들에게 언약하신 축복, 즉 성령의 은총을 받습니다.

 

여기에서 다시금, 교리서는 "그리스도께서 성사 안에서 나누어 주시는 것의 기초가 되는"(1115) 그리스도의 생애의 신비를 강조합니다.  "그리스도교 전례는 우리를 구원한 사건을 상기시킬 뿐 아니라, 그것을 실현하고 현존하게 한다."(1104)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을 드러내고 우리를 당신과의 친교로 이끄려 행하신 일들은 교회 전례, 특히 성사 안에서 계속됩니다.  만일 그리스도가 우리의 인격적인 벗이시라면, 우리는 그분을 미사와 성사 안에서 자주 만나길 원할 것입니다.

 

1225. 나는 기념합니다

 

 

따라서, 성 바오로께서 우리에게 제시하는 시험에 이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습니다: 성사는 그 본 목적대로 나의 삶에서 중심 역할을 하고 있는가?  나는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신비를 만나려 전례에 동참하고 있는가?  나는 전례에서 하느님과의 구원의 대화를 체험하는가?

 

만일 전례에 관한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해 긍정의 답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성 바오로의 시험을 통과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1226. 십계명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편은 그리스도인의 도덕 가르침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령을 받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바를 행도록 내적인 힘을 얻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눈길 아래에서 살며"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듯이 성부를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을 행하도록 초대되었습니다 (1693).

 

그리스도인의 도덕 가르침의 계명은 비인격적인 규약이나 임의적으로 우리에게 부여된 제약이 아닙니다.  그것을 우리의 즐거움을 가로막는 성가신 규율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계명을 따를 때 우리는 우리를 위해 선한 일을 행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그에 따라 살 때, 우리는 보다 행복해지고 충만해질 것입니다.  사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우리가 십계명 안에서 우리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인격을 재발견하도록 초대합니다.(2053)  각 계명 뒤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완전하게 십계명을 사셨고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딸로서 우리는 십계명에 대한 순종을 통하여 그리스도처럼 됩니다.

 

1227. 나는 순종합니다

 

 

이와 같이 십계명 역시 성 바오로의 시험을 통과하는 기준이 됩니다.  십계명을 생활하는 사람은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생활하십니다.  그리스도는 그 사람의 삶을 인도하는 계명이 되십니다.  십계명을 생활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생활하셨던 대로 생활하는 것이 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품위에 합당한 일을 할 수 있다." (1698)

 

우리는 질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도덕 가르침에 대해 합당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십계명이 우리를 자기파괴 행위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진리로 보고 있는가?

 

만일 이 모든 질문에 대해 긍정의 답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성 바오로의 시험을 통과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1228. 그리스도인의 기도

 

 

끝으로,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있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4편은 자신을 성찰하는 또다른 기준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2614)  즉, 우리의 기도는 그리스도와의 친교로부터 흘러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우리는 예수께서 기도로써 청하셨던 것과 같은 것을 청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등.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기도로써 청하셨던 것과 같은 것을 청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같은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 안에서 기도하셨으며, 같은 성령은 우리가 기도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우리는 기도를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기도하게 하시는 성령은 우리가 기도할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기도하려는 열망을 표현하는 것 자체가 기도이며 그것은 언제나 응답을 받는 기도입니다.

 

1229. 나는 기도합니다

 

 

다시 한번 성 바오로의 신앙에 관한 시험으로 돌아가 봅시다.  우리는 우리 구원을 향한 하느님과의 대화로서 기도를 체험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마음으로부터 기도하면서, 우리 삶 안에 사랑으로 먼저 말씀을 건네시는 하느님에 대한 응답으로서 기도를 체험하고 있습니까?  기도할 때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그분의 나라에 마음을 모으고 있습니까?  우리의 기도 생활은 성사 기념으로부터 흘러 나오고 있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우리를 하느님과 그분의 진리로 이끌고 있습니까?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된 하느님의 사랑을 보다 깊이 체험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기도 안에서 지속적인 회개로의 부르심을 체험하고 있습니까?

 

만일 이 모든 질문에 대해 긍정의 답을 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는 성 바오로의 시험을 통과한 것입니다.

 

III. 바오로 테스트, 자기 성찰 또는 양심 성찰의 중요성

1. 고린토 후서 13:5골로사이서 1:27을 읽으십시오.  성 바오로께서 제기하신 질문들을 묵상해 보십시오.

2.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총 4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각 부분의 내용은 무엇이고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 맺음을 어떻게 도울 수 있습니까?

3. 예수님이 누구시고 우리의 신앙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논할 때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어떠한 신앙고백을 사용합니까?

4. 나에게 신경(信經)은 성 암브로시오께 주었던 것과 같은 의미를 갖습니까?  신경은 구원의 대화에서 먼저 말씀을 건네시는 하느님에 대한 당신의 응답을 표현하고 있습니까?

5. 우리의 구원 여정에서 전례는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까?  성사는 그리스도의 생애의 사건들을 어떠한 방식과 목적으로 기억합니까?

6. 전례는 내가 하느님과의 구원의 대화를 체험하는 곳입니까?

7. 십계명은 비인격적인 규약이며 임의적으로 우리에게 부과된 제약일까요?  만일 그렇지 않다면 십계명은 우리에게 무엇입니까?  십계명은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인지를 어떻게 반영하고 있습니까?

8. 우리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도덕 가르침에 대해 합당한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러한 가르침은 단순히 우리와 이웃이 따라야 할 규칙에 불과한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는 그러한 가르침이 우리의 본성을 이해하는 수단, 영적인 성장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할까요?

9. 단순히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던 것과 같은 말로만 기도하는 것은 적합합니까?  기도는 어디로부터 흘러 나와야 할까요?

10. 우리의 기도는 진정으로 우리 구원을 향한 하느님과의 대화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가장 중요합니다.  당신의 기도 생활안에는 보다 진보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까?  그것을 개선하기 위해 당신을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1230.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요 벗이시다

 

 

만일 우리가 성 바오로의 시험을 통과하고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서 발견하였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주님이요 벗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자 스승이신 분이 어떻게 우리의 벗이 될 수 있는지는 이상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님이 되시고, 어떻게 우리의 벗이 되시는지 보다 면밀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러한 진리 일체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우리 신앙이 우리 삶에 진정한 빛이 되는데 필요한 균형을 잡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가톨릭 교회 교리서』가 어떻게 성숙한 믿음을 그 목적으로 하는지 살펴 보았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자 벗으로서 알고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에 관한 이러한 두 가지 진리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1231.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

 

 

첫번째 진리는 하느님께서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님이심은 신앙의 기초이며 하느님의 권위에 대적하는 어떠한 권위도 인정하지 말 것을 명하는 제1계명과도 부합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창조주, 무한히 완전하고 영원하시고 전능하시며, 우리와의 관계에 있어 최고 권위이실 수밖에 없는 하느님이십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우리가 "하느님께 대한 자유로운 순종" 안에 살아야 하며 하느님께서 설정하신 선과 악 사이의 "넘어서는 안되는 한계"를 "자유로이 인정하고 신뢰로써 지켜야 한다" (396) 고 가르치면서 그러한 권위를 강조합니다.

 

더 나아가, 성서와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 있는 많은 구절들은 예수께서 진정으로 최고의 다스림과 권위를 갖는 주님이심을 보여 줍니다.

 

1232. "당신 앞에 무릎을 꿇나이다."

 

 

성 바오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권세와 권력과 권능과 주권의 천신들 위에"(에페소서 1:20) 계신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예수님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필립비 2:9-11)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그리스도의 주님이심에 대한 성서의 명백한 증언을 인식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의 시초부터, 예수님께서 세계와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단언은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지상의 그 어느 권력에도 절대적으로 종속시켜서는 안 되며, 오직 하느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만 종속시켜야 한다고 인정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450).

 

따라서, 예수님은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그분과 올바로 관계를 맺으려 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믿음의 순종으로써 계시하시는 모든 것이 응답해야만 한다.

 

1233. "나는 너희를 벗이라 부른다."

 

 

성서와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하느님에 대한 두 번째 진리도 함께 증언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벗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친구 대 친구로서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길 좋아하는 육화하신 하느님이십니다 (탈출기 33:11).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성사가 하느님과의 우정을 가져온다고 기술합니다 (참조, 1395, 1468).  더 나아가,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새 법의 한 가지 특성은 그것이 "'주인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 종'의 신분에서 그리스도의 벗이라는 신분으로 우리를 드높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1972).

 

요한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요한 15:15)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기도에서 사용하는 그리스도의 호칭 목록을 제시합니다.  그러한 목록의 마지막 호칭은 "사람들의 벗" (2665) 입니다.  아빌라의 데레사를 인용하면서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관상 기도는 다름아닌 "친밀한 우정의 관계를 맺는 것" (2709) 이라 이야기합니다.

 

1234. 그리스도를 주님이요 벗으로 안다는 것의 중요성

 

 

그래서 우리는 성서와 『가톨릭 교회 교리서』가 단순히 우리가 종종 정반대로 여기는 두 가지를 결합시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과 연관시키기도 하고 권위와 관련 짓기도 합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가 우리에게 호소하는 믿음은 그 두 가지 모두를 요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신적인 위격으로 인해, 모든 것 안에서 우리가 순종해야 할 분, 바로 우리의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우리 삶 전체를 인도하셔야 합니다.  우리의 몫은 그리스도를 시험에 붙이는 것이 아니며 겸손되이 자신을 내어 드리고 섬기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믿음이란 하느님께서 우정(friendship)으로 이끄는 방식으로 당신의 주님이심(lordship)을 행사하기로 당신 지혜로써 선택하셨음을 인정함을 의미합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우정과 주님이심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제한적인 관념을 정화시키려 노력해야 합니다 (참조, 42, 2779).  그리고 하느님의 주님이심을  그리스도께서 이해하고 계신 것과 같이 이해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벗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신비입니다.

 

1235. 두 가지 진리를 모두 받아들이기

 

* "나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고 보다 잘 믿기 위해서 이해합니다." - 성 아우구스티노

 

 

우리는 우리가 믿는 모든 것 안에서 이러한 두 가지 차원을 봄으로써 우리 신앙에 대한 충만하고 성숙한 이해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우리의 우정을 강조하는 진리만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님이심을 강조하는 진리만을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를 만들고 심화시키는 충만한 잠재력을 발견하기 전에도 어떠한 진리를 믿습니다.  마리아는 당신 아드님의 유년시절의 신비를 마음 속에 두고 곰곰이 생각하였고, 키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충분히 알지 못하는 상태로 메시아의 수난에 동참하였습니다.

 

진리를 단순히 믿어야할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우리는 우리가 믿는 바를 기도 속에서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발달시키는 잠재력과 그 의미를 통찰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믿음을 그 뒤에 계신 위격(the Person)에 맏겨 드려야 합니다!  지금까지 보셨듯이, 교회는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위격을 우선적인 초점으로 견지(堅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강조합니다.

 

1236. 한 분이신 그리스도의 두 가지 차원

 

 

주님이심(lordship)과 우정(friendship)은 그리스도 안에서 양립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중 하나라도 결핍되는 경우 그리스도와 멀어질 수 있습니다.  우정 없는 주님이심은 우정 안에서 전적으로 하나됨, 친밀함, 다정함이 결여됩니다.  한편, 주님이심 없는 우정은 내용과 객관성이 결여될 위험을 갖습니다.  만일 교리교육이 교회의 신앙을 다음 세대에게 전하려 한다면, 이러한 두 가지 요소 중 어느 하나에만 안주해서는 결코 안되며 그 두가지 요소 모두를 잘 결합시키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1237. 하느님의 진정한 이미지

 

 

본 1-2강의 주된 요점은 신앙의 순종과 동의는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하느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왜곡되었다면, 만일 우리가 하느님을 당신의 특권을 빼앗기지 않으려 조바심을 내는 분, "우리를 제 자리에만 머물게 하는데"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이라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분의 계명들을 밖으로부터 부여된 것, 우리의 완성에 대한 위협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옳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지혜와 권능으로 우리에게 봉사하시는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로 알 것이며 그분이 주신 계명들을 받아들이는데 별 어려움을 겪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확한 하느님의 모습을 담은 그림 (예를 들어, 우리가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발견하는 것과 같은) 을 가지고 있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실제로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에 대해 깊이 배우게 될수록, 우리 믿음의 순종은 더욱 완전하고 성숙해질 것이며 하느님께 더욱 자신을 의탁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 더욱 깊이 배우게 될수록, 우리는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자 벗이심을 더욱 완전히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1238. 다음 강의

 

*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자비넘치는 사랑을 계시하신다

 

 

다음 1-3강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 사랑에 대해 보다 자세히 살펴볼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명이 하느님의 자비 넘치는 사랑을 계시하시는 것임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러한 자비 넘치는 사랑은 다음과 같은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하는 죄인들에게 기쁜 소식입니다: "왜 나는 내가 하길 원하지 않는 일들을 하고 있는 걸까?  이러한 죄의식의 짐으로부터 누가 나를 구해줄 것인가?  올곧은 양심을 갖는다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하느님과 그리고 자신과 화해하기 위해서?  죄를 지은 이후라도 나는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실 수 있으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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