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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순풍 산부인과로서의 교회(주님 공현 후 수요일)
작성자이현철 쪽지 캡슐 작성일2005-01-04 조회수1,491 추천수7 반대(0) 신고
 

                   순풍 산부인과로서의 교회(주님 공현 후 수요일)


  십자가를 안테나로!

  수년 전에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드라마 중에 ‘순풍 산부인과’라는 인기드라마가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안타깝게도 한번도 그 드라마를 보지는 못했지만 그 ‘순풍’이란 말이 재미있어 아직도 그 드라마 제목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순풍도 있다면 역풍도 있을 텐데, 그 산부인과는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길래 산부인과의원 이름을 순풍이라고 했을까?’ 하고 말입니다. 아마 자연분만, 순산은 순풍이겠고 인공유산은 역풍이란 뜻에서가 아닐까요? ^^*


   오늘 복음(마르 6, 45-52)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마침 역풍을 만나 배를 젓느라고 몹시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벽에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그동안 너무나 고생을 하고 겁에 질려서 그런지 “유령이다!”라고 비명을 지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나다. 겁내지 말고 안심하여라.”하시며 그들이 탄 배에 오르자 바람은 그쳤다고 합니다. 그동안 예수님의 제자들은 수없이 많은 기적들, 특히 빵의 기적을 보고도 마음이 무디어져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잘 알아볼 수 있을까요? 주님의 뜻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뜻을 고집하고, 주님이나 동료들과 함께 하기보다는 ‘혼자서도 잘 할 수 있어요’라고 고집을 피우는 아이의 모습은 영락없이 우리의 모습이며 이는 복음에서 역풍을 만나 애를 쓰고 또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다’라고 비명을 지르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하나 다를 바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방주인 우리 교회는 역풍 산부인과가 아니라 순풍 산부인과가 되기 위해선 끊임없이 주님의 뜻을 식별하고 실천하여 마치 순풍에 돛단배와 같이 많은 자녀들을 순산하여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도 바오로가 말씀하시는 다음과 같은 해산의 고통도 감수해야겠지요.^^*


  “나의 자녀인 여러분,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가 형성될 때까지 나는 또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겠습니다.”(갈라 4, 19)


  그리고 참고로 으뜸 사도인 베드로가 순풍도 역풍도 탄다는 박 선환님의 재미있는 묵상글을 퍼드립니다. 가브리엘통신


                                              <순풍 산부인과>


   시간이 날 때마다 즐겨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하나 있습니다. 저녁 시간에 하는 순풍 산부인과입니다. 출연하는 탤런트들이 저마다 개성을 갖고 주어진 역할을 표현하는데 한결같아 보이는 것은 좋고 싫음, 기쁨과 슬픔, 고통과 환희에 대한 감정의 표현이 두드러지도록 연출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제 저녁에는 표 간호사라고하는 남자 간호사의 주례 문제 때문에 원장님의 심기가 몹시 불편했습니다. 원장님이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표 간호사 커플에 대한 스트레스로 표현하자 본인들은 몹시 당황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여봅니다. 그러나 원장님께 여쭤봐도 주례 때문에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말과 함께 아무리 다른 일을 잘 하려고 해도 도리어 핀잔만을 듣는 웃지못할 난처한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원장님이 화를 낸 이유는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주례를 부탁했던 것을 진심으로 알고 준비하고 있던 차에 다른 사람에게 주례를 부탁했다는 표 간호사 커플의 말을 들은 다음부터였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주례를 해주겠다고 허락했던 인물의 급한 사정으로 주례를 할 수 없다는 연락을 받은 표 간호사가 원장님께 거짓말을 덧붙여서 이렇게 말합니다. “원장님 죄송하지만 저희의 결혼식 주례를 맡아주셔야 하겠습니다. 어머니의 간곡한 권유로 다른 분에게 부탁을 드렸었지만, 사실은 원장님밖에 없다는 것이 저희의 생각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원장은 조금씩 얼굴이 밝아지더니 결국에는 이전의 여유 있고 호탕한 인물상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극명한 감정의 대비처럼, 우리 각 사람의 심성 안에는 이성과 감성, 판단과 감정, 지식과 체험이 조화를 이루면서 우리들의 성격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유형의 사람이라도 세세한 상황에 따라서, 그리고 그 때의 컨디션에 따라서 상황에 대한 반응이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성격에 모가 났느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느니, 상종할 수 없는 사람이니 등등의 판단을 쉽게 내리기도 합니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

 

  오늘 복음 (마태 16,13-23)의 베드로 사도는 스승인 예수님께서 한 번도 알려주지 않은 사실을 주님 앞에서 고백해서 예수님께 ‘복 있는 사람’(17절)이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수난을 말씀하시는 주님께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22절) 라고 말씀드렸다가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는 사탄’(23절)이라는 심한 꾸지람도 듣게 됩니다.


    우리들 안에는 이렇게 금방 주님께 칭찬을 받다가도 또다시 금새 꾸중을 들을 수 있는 요소들이 참으로 많아 보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 앞에서 누가 완전한 생활을 해나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처럼 보여집니다. 영성생활이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를 향한 발전의 과정을 거쳐가게 되지만, 한번 지나온 길이라고 해서 다시 되돌아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상승과 하강이라고 하는 나름대로의 순환과정을 되풀이하는 가운데 점차적으로 상승해 나간다는 영성가들의 가르침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가지 기쁜 사실에 들떠서 자신을 잃어버리거나, 한 가지 슬픈 사실에 실망해서 자포자기하는 사람이 어리석어 보이듯이, 우리들도 주님과의 만남이라고 하는 커다란 목표를 생각하면서, 그 속에서는 기쁨과 슬픔, 고뇌와 환희, 혼동과 조화, 지식과 감정이 얼기설기 엮어져 있다는 사실을 전제해야만 하겠습니다. 아무런 긴장과 반전도 없는 영화가 재미없듯이, 우리들 인생 안에 깊숙이 들어오셔서 당신을 향한 긴장과 일치의 기쁨을 선사하시는 주님 앞에서, 마치도 꽃을 찾아 작은 날개를 퍼덕이는 나비처럼, 오직 주님만을 찾는 항구한 마음이 너무나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멘. (박 선환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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