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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물 포커스 ‘북한인권과 민주화를 위한 기도회’ 주도
작성자김현욱 쪽지 캡슐 작성일2005-01-07 조회수1,223 추천수0 반대(0) 신고
인물 포커스 ‘북한인권과 민주화를 위한 기도회’ 주도


[인물포커스] 김현욱 천주교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    

지난 12월 22일 서울 명동성당에서는 ‘북한인권과 민주화를 위한 기도회’가 열렸다. 천주교 평신도사도직협의회(회장 손병두)와 민족화해위원회(위원장 김현욱)가 주최한 행사는 230여 명의 평신도가 참여한 가운데 북한문제에 대한 전문가들의 강의를 듣고 북한주민을 위해 기도하는 자리였다.

평소 북한문제에 대해 ‘용서와 화해’를 앞세우고 중립적 태도를 강조하던 천주교회에서 이 같은 행사를 개최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김대중정부가 들어서면서 천주교 내에서는 과거 민주화 인권운동을 했던 사제들을 중심으로 북한문제에 대해 좌파적인 목소리가 주류로 떠올랐어요. 북한정권의 어려움을 남북공동의 책임으로 보고 적극적인 대북지원과 협력을 해야 한다는 시각이었지요. 이 같은 분위기가 교회보호와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시점에 와 있다고 판단하고 손병두 회장과 함께 기도회를 시작하게 된 겁니다.”

평화방송, 가톨릭신문 등 소위 진보성향 교회매체의 목소리에 익숙해 있던 천주교회 내부에서는 초기 기도회 개최를 반대하는 의견이 많았다. 이를테면 ‘북한인권’이나 ‘북한민주화’라는 단어가 교회의 공식적 견해를 담고 있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성서가 고통받는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이미 명시하고 있는데 교회의 공식견해가 아니라고 반대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라며 한 달 만에 기도회개최를 관철시켰다.

또한 이번 기도회가 이례적이었던 것은 평신도 중심으로 이뤄졌으며 개신교회에서나 볼 수 있는 뜨거운 통성기도와 찬양이 이어졌다는 점이었다.

“기도회가 성령쇄신운동과 접합돼 전개되고 있어요. 60년대 후반 미국에서 시작돼 70년대 우리 나라에 들어온 성령쇄신운동은 엄숙한 전례와 정해진 기도를 뛰어넘어 성령의 운행함에 따라 자유롭게 기도하고 찬양하자는 것입니다. 성령운동과 접목된 기도회가 새로운 모델의 북한인권운동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지요.”


  김현욱 전 의원
기도회는 교회 내에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성공적으로 정착하고 있다. 초기 행사를 회의적으로 바라보던 성도들도 기도회를 통해 북한내부 실상과 관련국제정세에 대해 새롭게 이해하게 됐으며 이것이 교회 내부에서 파급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이는 김 위원장이 천주교 15개 교구 홈페이지를 통해 기도회 결과와 북한인권문제를 설명하는 글을 꾸준히 올려온 결과이기도 하다.

지난 11월에는 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인권)위원회에서 북한인권문제에 대해 교회가 기도해야 한다는 내용을 포함한 6개항의 성명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 동안 ‘터부’시 되어온 북한인권문제가 천주교회의 공식입장으로 전환되는 괘거를 이룬 것이다.

김 위원장이 교회내부에서 일련의 변화와 성과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4선 국회의원출신으로 외교위원장과 교육위원장, 원내 사무총장 등을 지내며 수십 년간 쌓아온 국정경험과 북한문제에 대한 관심과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북한인권과 선교에 대해 직접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1990년 국제의원연맹(IPU)총회를 위해 9박10일간 평양을 방문한 것이었다.

“그때는 내가 성령쇄신운동을 하면서 뜨거워져 있을 때였어요. 평양을 방문하면서 고난 받고 있는 북한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봉사의 기회를 달라고 기도했지요. 북한인권문제가 불거지기 이전이었지만 신앙의자유가 인권의 가장 기본이니까요.”

김 전 의원은 당시 180여 명의 북한주민이 모인 평양 장충성당에서 15분간 즉석으로 강론하며 한국교회가 동포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했다. 그는 당시 담대히 강론할 수 있었던 것이 ‘성령의 특별한 지식과 지혜의 은사’였다고 설명했다.

김 전 의원은 이후 천주교 주교회의의 북한선교위원회 자문위원장으로 봉사하며 북한선교에 대한 사명을 이어나갔다. 1993년부터는 3년간 연변 과학기술대학에서 강의하며 북한주민과 탈북민의 인권과 북방지역 선교에 풀타임으로 전념했다.

그가 정치를 시작한 계기는 제헌국회의원을 지낸 아버지 김용재 전 의원의 영향이 컸다. 외국어대에서 독어독문학을 전공한 그는 오스트리아 비엔나대학에서 유럽의 인권협약에 대한 논문으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이후 6년간의 교수생활을 거쳐 1981년 정치에 입문했다. 민정당으로 출마한 그는 연이어 3선에 성공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이후 찾아온 패배는 신앙적 성장과 사명의 기회였다.

“소위 고관대작이나 명예라는 것이 허상이며 참된 위로와 기쁨은 신앙에 있다는 것을 1992년 4선 선거에서 떨어지면서 체험했어요. 그 전에도 선교가 궁극적인 목표이고 나는 하나님의 도구라는 생각을 해왔지만 그만큼 절실하지는 못했지요.”

4선 고비에서 낙선한 그는 1992년 ‘고통은 고통과 선교로 이기리라’는 신념으로 좋은 기회들을 물리치고 3년간 중국연변으로 건너가 해외 동포의 인권보호와 선교에 전념했다. 이후 그는 자민련으로 출마해 14대 의원으로 컴백했다.

“정치인으로서 DJ의 당선을 도왔던 것에 대한 후회가 가장 큽니다. JP가 DJ의 이념문제와 국가안보 문제를 책임진다고 했었는데 오늘날 사회가 이렇게 됐지 않아요. ‘대통령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JP는 결국 DJ에게 모든 것을 양보했고.”

김 전 의원은 한국의 시국을 “혁명적 회오리 바람이 부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옛 것, 옛 사람에 대해 인정하지 말아야 된다는 좌파 논리에 온 국민이 끌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경제가 점점 어려워지면서 가치전도가 옳지 않은 것이라는 것에 대해 국민들이 점차 인식하기 시작했다고 진단했다.

“북한에서 레짐체인지가 일어나면 남쪽에서도 큰 충격과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 시점이 전통적 가치가 회복되고 새로운 리더십이 나와 번영하게 되는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는 때가 될 것입니다.”

글/김범수 기자 bumsoo@
사진/이승재 기자 fotols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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