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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의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과 추종자인 교회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5-01-16 조회수1,406 추천수16 반대(0) 신고
 

◎ 2005년1월16일(일) - 연중 제2주일 (가해)


[오늘의 복음]  요한 1,29-34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


  29) 다음날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한테 오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신다. 30) 내가 전에 내 뒤에 오시는 분이 한 분계신데 그분은 사실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계셨기 때문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분을 두고 한 말이었다. 31) 나도 이분이 누구신지 몰랐다. 그러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푼 것은 이분을 이스라엘에게 알리려는 것이었다.” 32)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이 하늘에서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와 이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았다. 33) 나는 이분이 누구신지 몰랐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분이 ‘성령이 내려와서 어떤 사람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인 줄 알아라.’ 하고 말씀해 주셨다. 34) 과연 나는 그 광경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증언하는 것이다.”◆


[복음산책]  예수의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과 추종자인 교회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대사제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행한 증언(요한 1,19-28)에 이에 오늘 복음에서도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계속된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다. 오늘의 증언은 세례자 요한이 자기에게 오시는 예수를 보는 가운데서 진행된다. 세례자 요한이 활동하던 장소로 예수께서 오셨다면, 그곳은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요르단강 건너편 베다니아이다.(1,28) 이곳은 예루살렘 근처 동쪽으로 약 2Km 지점에 위치한 베다니아와는 다른 곳이다. 예루살렘 근처의 베다니아는 마르타와 마리아와 라자로가 살던 곳(요한 11,1.18; 12,1.19)이며,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전, 후 시점에 머물렀던 장소(마태 21,17; 26,6; 마르 11,1.11; 14,3; 루가 19,29; 24,50)이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곳은 예루살렘에서 동편으로 36Km 떨어진 예리고를 지나 8Km 지점에 있는 요르단강에 바로 인접한 베다니아이다. 오늘 복음의 서두에 의하면 이곳으로 예수께서 오신 것이다. 그것도 나자렛에서 100여Km 떨어진 베다니아로 말이다.


  세례자 요한의 오늘 증언은 이렇게 먼 길을 거쳐 자기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를 바라보면서 이루어진다. 청중이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저 독백형식으로 진행된다. 예수께서 왜 이렇게 먼 길을 오셨을까? 그것은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스스로는 요한이 예수께 세례를 베풀었다는 언급을 피하고 있다. 공관복음을 미루어 볼 때 예수께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마태 3,13-17; 마르 1,9-11; 루가 3,21-22) 요한복음은 왜 예수의 세례 받은 사실을 말하지 않는 것일까? 딱 잘라 말하면 요한복음이 1장 전체에서 애써 주장하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와의 대비구조(對比構造)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이 사실을 기술하는 것은 그가 ‘아무 것도 아니며’, ‘주님의 길을 곧게 하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이며’, 그래서 ‘오직 메시아 주님을 증언하러 온’ 자신의 사명에 어긋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요한의 증언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를 밝히는 것으로서 크게 세 가지 핵심적인 내용으로 요약된다. 첫째, 예수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이는 예수를 십자가 죽음으로 인류의 죄를 구속할 신약의 ‘파스카 양’으로 상징하는 증언이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곧 선재(先在)하시는 성자 말씀이며, 구약에 예언된 ‘하느님의 고통 받는 종’(이사 53장)이고, 약속된 메시아이다. 둘째, 예수 위에는 하느님 성령께서 머물러 계시며(이사 11,1-2; 61,1), 따라서 예수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다. 셋째,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이는 ‘하느님이 뽑아 세운 분’(이사 42,1)이며, ‘하느님이 낳은 아들’(시편 2,7)이고,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마태 3,17; 17,5)로 표현될 수도 있다. 바로 이 세 가지를 이스라엘에 알리기 위해 세례자 요한은 존재하는 것이며, 자기가 물로 세례를 베푼 모든 활동이 이 때문이라는 것이다.(31절)


  요한이 “나도 이분이 누구신지 몰랐다”(31절, 33절)며 두 번씩이나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예수에 관하여 요한이 증언하는 내용이 스스로 깨달은 지식이 아니라 성령 하느님께서 보여주셨고, 알려주셨다는 것이다. 원래 증언(證言)의 뜻도 그렇다. 증언이란 스스로의 생각이나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목격한 사실을 증명하는 말이다. 따라서 요한복음이 나중에 협조자이시고 진리이신 성령 하느님을 공관복음서에 비해 특별히 강조하고, 나름대로의 성령론을 피력하는 이유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제 눈으로 목격한 것조차도 제대로 증언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섞어 곡해하는 우리들에게 세례자 요한은 참으로 훌륭한 스승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우리 교회도 세례자 요한의 증언과 또 그의 활동과 절대 무관하지 않다. 그가 이스라엘에 예수를 증언하며, 오직 예수를 위해서만 존재하고 활동하는 선구자였다면, 교회는 이제 이 예수를 온 세상에 증언하며, 오직 이 예수를 위해서만 존재하고 활동해야 하는 추종자임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이를 망각할 때 교회는 언제든지 허물어지고 만다.◆[박상대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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