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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21) 산책로에서의 묵상
작성자유정자 쪽지 캡슐 작성일2005-01-16 조회수997 추천수6 반대(0) 신고

요즘 남편이 방학이라서 내 운동친구가 되어 근처 약수터가 있는 산에 산책을 간다.

운동이라면 무조건 싫어하는 나에게 걷는 것만이 유일한 운동이기 때문이다.

요새 너무 컨디션이 안좋아 특별히 혹한이 아닌 날엔 약수터에 가는 것이 내 유일한 운동이다.

구릉진 산길을 걸으며 푸른 잎을 가진 청솔나무의 냄새를 심호흡하며 솔까래와 마른 활엽수의 떨어진 가랑잎을 밟으며 어떡허든 건강해지려고 애를 쓰는 자신을 느낀다.

 

참 살기 어려운 세월임을 산기슭 곳곳에서 보게 된다.

남자들이 수십명씩 군데 군데 모여 장기판 바둑판을 놓고 내기를 하는지 노름을 하는지 진을 치고 있는 곳마다 커피 파는 아줌마도 라면장사 아줌마도 끼여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할일 없는 백수이기에 대낮에 그렇게 산속에서 시간을 때우지 싶다. 우리 부부도 그들이 보기에 백수부부로 보일 것이다.

 

통나무 계단을 오르며 남편이 느닷없이 묻는다.

인과(因果)라는 말에 대해 묻고 因 과 果  사이엔 뭐가 있는지 아느냐는 것이었다.

인과는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는 것, 그래서 인과응보란 말이 있는거 아니냐고 그러나 그 두 글자 사이에 뭐가 있는지는 모르겠다고  하자 그 사이엔 연(緣)이 있다고 한다.

또 어느 책에서 읽었수? 어느 스님이 쓴 글을 읽었지요?

웃으며 묻자 남편도 따라 웃으며 법륜스님이란 분이 쓴 글을 읽었다고 새로운 사실을 알았노라고 신기해 한다.

씨를 뿌리면 열매를 맺는다. 그게 인과(因果)다. 그런데 씨뿌리고 열매를 맺으려면 그 사이에  연(緣)이 있어야한다. 물 공기 양분 바람 흙같은 것들이 연으로 작용하여 열매를 맺게 한다는 것이다.

 

요즘 난 책도 신문도 전혀 읽지 않는다.

눈과 머리가 아파서다. 오직 텔레비젼 시청과 컴퓨터만 한다.

남편은 잡다한 책 그중에서도 불교에 관한 책을 많이 사서 읽고 늘 내게 아는척을 한다.

난 성당에 다니고 남편은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불교적인 사상에 심취해 있다.

난 주모경을 바치고 남편은 반야심경을 외운다. 남편은 윤회를 믿고 나는 영생을 바란다. 하지만 서로간에 종교문제에 있어선 완전 노타치다. 지금 지구 곳곳에선 종교뮨제로 전쟁을 하고 사람을 죽이지만 우리집에선 종교만큼은 완전 자유다.

그래도 주일날이면 남편이 더 성당에 왜 안가냐고 채근을 할만큼 전폭적으로 지원을 해주므로 외짝교우의 불편함은 전혀 모르고 지낸다.

언젠가 교리공부하고 세례받고 성당에 다니지 않겠냐고 했더니 부처님이든 예수님이든 그 궁극적인 진리는 한가지이므로 굳이 어디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더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신앙은 강요해서 되는것이 아니고 스스로 마음에 찾아와야함을 몸소 경험했기 때문이다. 때가 되면 저절로 가게 되어있고 그역시 다 때가 있는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봄비가 메마른 대지를 촉촉히 적셔주듯이 그렇게 신앙은 마음속에 다가오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어느 병약한 사람이 전철을 타고 서서 가는데 갑자기 앞 사람이 그의 따귀를 후려쳤다. 화가 나서 쳐다보는 순간 너무 덩치가 큰 남자에게 기가 질려 저만치 몸을 피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억울하고 분이 치밀어 견딜수가 없었다.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그 남자에게 다가갔다. 왜 때렸냐고 이유를 묻자 그 남자는 아래를 가리켰다. 그 남자는 발에 기브스를 하고 있었는데 병약한 이가 그 발을 밟아 남자는 너무 아파 팔을 휘젓다가 그 손이 앞사람의 얼굴을 쳤던 것이었다. 그순간 맞은 사람의 가슴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분노가 봄눈 녹듯 사라졌다. 그렇게 인과 과사이에 연이 없어지면 누구를 미워해야할 이유도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인연을 알면 분노해야할 일도 원망해야할 일도 없으며 괴로워해야할 일도 없다는 것이다. 

 

근자에 내가 자식으로 인해서 하도 속을 끓이니까 아마 그런 책을 사온것 같았다.

자식들이 속썩히지 않고 무순 자라듯이 쑥쑥 자라주는 집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알게 모르게 크고 작은 사고를 치며 부모 속을 애타게 하며 자라는게 자식인것 같다. 주변을 보아도 그런 집이 많다.

그럴때 남편이 불교적 사상에 가까워 덕을 보는 경우가 많다.

늘 팔팔 뛰는건 나고 남편은 업이라고 업장소멸을 해야 한다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느긋한 모습이다. 나는 자신의 십자가로 받아들임에 아직 익숙하지 못하다.

성당에 나가 기도하고 복음을 읽고 미사 드리는 나보다 아무곳에도 나가지 않는 남편이 훨씬 너그럽다.

 

남편이 처음부터 그랬던게 아니었다.

불같은 성질과 서릿발같은 성질의 양극을 다 가진 사람이어서 젊은 시절 참 힘들었지만 대들지 않고 알아서 기었기에 별로 다툼없이 수십년을 살아왔고 이제 말년이 편안해졌다. 오히려 근래 들어 걸핏하면 펄펄 뛰는건 항상 나다.

무슨 연이 있어 우리는 만났을까?

첫눈에 반해서 뿅 간것도 아니고 한 직장에서 오랜시간 사귄 사이도 아니다.

아는 사람들이 몇 다리 건너 소개해 준 사이로 만나 몇 달 교제끝에 피차간에 이정도면 괜찮지 않은가 싶어 맺어진 부부다. 오래 살다보니 정도 쌓이고 신뢰도 쌓이면서 드디어는 이사람이 아니면 누가 결점많은 나를 보듬어 살아 주었으랴, 이여자가 아니면 누가 내 비위를 맞춰주며 살았으랴 (요 부분은 다분히 내가 강요하듯 다짐하는 부분이다) 그렇게 피차 느끼는것도 비슷할 것이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자식들이 사이에 있어 가교 역할을 해준다. 만나게 해준 사람들도 연(緣)이고 자식들도 연(緣)이며  과(果)임에 분명하다.

 

이 시간 인(因)과 연(緣)과 과(果)에 대해서 새삼 생각한다.

그리고 보니 내가 하느님을 만나게 된것도 어찌보면 그런 모든것들이 있어 가능했다는 생각이 든다. 인(因)없는  과(果)가 어디 있으며  연(緣)없이 어찌  과(果)가 있으랴!

하느님을 온전히 마음속에 받아들이기까지 많은 교우들과 신부님이 있어 바람과 양분과 물과 흙으로 연(緣)의 역할을 해 줌으로써 신앙의 씨앗이 내마음에 신심이란 결과로 열매 맺을수 있었던게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언젠가 나도 남편에게 신앙으로 가는 길에 연(緣)으로서의 작은  역할로나마 작용할 수 있는 때가 오지 않을까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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