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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19]수요일-오그라든 손을 치유해 주심(수원교구 조욱현신부님 강론)
작성자김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05-01-18 조회수973 추천수1 반대(0) 신고

성 바오로 수도회 홈피 선교네트   http://www.paolo.net/catholic/

     --성서의 세계--말씀 묵상 방에서 퍼옴.

 

 

연중 제2주간 수요일: 오그라든 손을 치유해 주심

복음: 마르 3,1-6: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고치시다

그때에 1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마침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2 그리고 예수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기만 하면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3 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는 “일어나서 이 앞으로 나오너라” 하시고   4 사람들을 향하여는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것이 옳으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말문이 막혔다.  5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탄식하시며 노기 띤 얼굴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펴자 그 손은 이전처럼 성하게 되었다.
6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나가서 즉시 헤로데 당원들과 만나 예수를 없애버릴 방도를 모의하셨다.

-- 묵 상 --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다시 회당으로 가신다.  그런데 회당 한 쪽에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고(1절), 사람들은 예수께서 고쳐주시면 고발하려고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2절). 그들 중에는 유다인들의 최고 재판소인 원로원에서 나온 대표가 있었다.    원로원의 임무는 신앙의 오류와 오류를 전하는 사람들을 다루는 곳으로 그 대표가 있는 자리에서 안식일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율법을 보면 목숨이 위태로운 경우가 아니라면 안식일에 병자를 치료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즉 생명이 위독한 경우에는 안식일지라도 목숨을 구해야지 죽게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유대교의 법해석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병자까지도 고쳐주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악행을 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어제 복음 마르 2,27의 내용과 같이 안식일법보다 사람을 더 귀하게 여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보인다. 

즉 예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서 이 앞으로 나오너라”하신다(3절). 그리고는 주위에 있는 율법 전문가들에게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4절),

즉, 우리가 도와줄 가능성이 있을 때 사람을 비참한 상태에 그냥 내버려두는 것은

확실히 나쁜 것이고,

또한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을 돕는 것은 확실히 좋은 것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율법학자들은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탄식하시면서 노기에 가득 차 그들을 둘러보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펴라” 하시면서 성하게 해주셨다(5절).
그리하여 여러 차례 예수님의 처사를 비난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헤로데 사람들과 모의하여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다(6절).

여기서 처음으로 적수들이 예수님을 처치하기로 결의한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묵상할 것이 있다.

“손이 오그라들었다”는 것은 인간의 죽은 행동의 상징이다.

이것은 과거 언젠가 만들어 놓은 이데올로기에 아직도 사로잡혀

모든 것을 그 관점에서만 판단하는 태도에 비할 수 있다.

구약성서의 1열왕 13,1-10에 보면 여로보암이 베델에 제단과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친히 분향제를 올리러 갔다.

이 때 하느님의 사람이 예언하기를        “이 제단이 산산조각이 나고 그 위에 있는 잿가루가 쏟아지리라”고 했다.

그러자 여로보암이 제단에서 “손을 들어 그를 가리키면서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그를 가리키던 손이 곧 마비되어 오므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여로보암의 간청대로   “하느님의 사람이 주님께 기도하자 왕의 손이 즉시 나아서 전과 같이 되었다”

인간의 행동의 상징을 손이라고 한다면,

죽은 행동의 상징은 오그라든 손이 될것이다.     이 오그라든 손은 하느님의 축복의 표시가 아니니 하느님의 축복으로 풀어주어야 한다.

성서에서 생명은 축복의 표시이고 죽음은 저주의 표시이다.

그러니 생명으로 가는 것은 축복을 받는 것이고 “좋은 것”이며,

이것은 행하는 것이 “착한 일”이며 그 반대되는 일은 “악한 일”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죽음의 위협을 느끼는 사람이며

죽음에 가까워지는 사람이다.
그래서 시간을 끄는 것은 그가 죽음으로 가도록 방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 손을 펴주신다.  저주에서 축복으로 옮겨갈 수 있었다.

이 축복은 낡은 율법해석에 매여서가 아니라

그것에서 해방되기 때문에 받은 것이다.

이러한 기정 사실 앞에 낡은 종교적 이데올로기는 말문이 닫힌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과거의 종교적 이데올로기의 권좌에서 일어나기가

싫어 과거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권좌에 있는 헤로데 사람들과 손을 잡는다. 예수님의 창조하는 손을 잡는 것이 아니라 오그라든 손끼리 서로 잡았음을 볼 수 있다.  오그라든 손끼리 잡았으니 창조의 손을 없애는 결과를,

즉 죽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헛된 생각을 하고 마음이 어두워져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받지 못할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무지하고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입니다”   (에페 4,17-18)라고 하신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 적합한 사람들이다.

그러면 나는 어떠한 손을 잡고 살아가는 신앙인인가?

내 손도 오그라들었는데 내가 잡고 있는 다른 손은 나의 손을 펴줄 수 있고

창조하는 생명을 주는 손인가?
아니면 창조하는 손을 없애버리려고 하는

낡은 이데올로기의 권좌에 있는 손인가?

나 자신을 성찰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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