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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23]연중 제3주일: 예수님의 전도와 어부 네사람 (수원교구 조욱현신부님 강론)
작성자김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05-01-22 조회수865 추천수1 반대(0) 신고
성 바오로 수도회 홈피 선교네트 http://www.paolo.net/catholic/

     --성서의 세계--말씀 묵상 방에서 퍼옴

      (수원교구 조욱현신부님 강론)

 

 

연중 제3주일: 가해: 예수님의 전도와 어부 네사람


복음: 마태 4,12-23



12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갈릴래아로 가셨다. 13 그러나      

 

나자렛에 머물지 않으시고 즈불룬과 납달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가파르나움으로

 

가서 사셨다. 14 이리하여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 15 "즈불룬과 납달리, 호수로 가는

 

길, 요르단 강 건너편, 이방인의 갈릴래아. 16어둠 속에 앉은 백성이 큰빛이 비치리

 

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17이 때부터 예수께서는 전도를 시작하시며 "회개하여

 

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하고 말씀하셨다. 18 예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걸어가

 

시다가 베드로라는 시몬과 안드레아 형제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셨다. 그들

 

 어부였다.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하시자 20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21예수께서는 거기

 

서 조금 더 가시다가    이번에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보셨는데

 

들은 자기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을 부르시자  22 그들은 곧 배를 버리고 아버지를 떠나 예수를 따라갔다.

 

23 예수께서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서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 묵 상 -



오늘의 제1독서와 복음은 해방과 구원의 결정적 사건이 전개되는 지형적 동일성 뿐

 

아니라, `빛`이라고 하는 상징적 개념에서도 나타난다.

 

우리는 그 빛의 개념을 성탄시기 내내 그리고 지난 주일에도 다루었다.

 

오늘의 화답송도 같은 주제를 되풀이 하고 있다.

 

`빛`이라는 것은 생명, 행복, 구원, 기쁨 등의 의미로 빛이 없는 곳이란 생명도 안전

 

도 성장의 가능성도 없다. 그러기에 `어둠`은 죽음과 같은 의미이다.

 

그러므로 1독서의 `캄캄한 땅`(9,1)이라는 대목을 "죽음의 그늘진 땅"(마태4,16)으로

 

바꾸어 놓고 있다.

 

하느님은 생명과 구원의 원천이시기때문에 그분은 "빛의 싸여 계신 분", "빛 가운데

 

계신 분"(1디모6,16)이시고 `빛`자체이신 분이시다.

 

 


복음: 마태 4,12-23: 예수님의 전도 시작

 


오늘 복음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즉 예수께서 가파르나움으로 가심(12-17절):

 

첫 번째 제자들을 부르심(18-22절); 예수님의 활동에 대한 간략한 요약(23절)이다.

 

우선 예수께서 가파르나움으로 가셨다는 것은 그 지역이 옛날 즈불룬과 납달리

 

종족이 쫓겨나 있던 곳에 있었기 때문에 이사야의 예언(8,23-9,1)이 가파르나움에서

 

실현됨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빛`이라는 상징적 개념을 통해서 표현되고 있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보는 그 `빛`은 정치적인 해방보다도    더 깊은 의미의 해방을

 

모든 인간들에게 가져다 주시는 그리스도이시다.

 

또한 이 지역은 `이방인들의 갈릴래아'  즉 `이방인들의 지역`이다.

 

여기에 큰 `빛`이 비친다는 것은 예수께서 유대인들만을 위한 구세주가 아니라,

 

온 세상의 구원자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가르쳐라..."(마태28,19)고 하시지

 

않는가?

 

 


그 민족들을 비추던 `큰 빛`은 바로 그리스도라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가르침 역시`큰 빛`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그래서 즉시 선교활동을 간략히 제시하고 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는 전도를 시작하시며`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하고

 

말씀하셨다"(17절).

 

즉 하늘나라는 이미 그리스도의 `전도`를 통하여 실현되고 있고 또 그분을 통하여

 

모든 사람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하느님의 왕권을 뜻한다.

 

그런데 이 하늘나라는 이미 이 세상에 생성되고 활동하고 있으며 종말의 상황에서

 

완성되게 될 것이다.

 

이제 이 `하느님의 나라`가 모든 인간들의 마음속에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에 예수께

 

서는 우리 모두의 마음과 정신과 생활습관의 깊은 변화를 촉구하신다.

 

`회개`하라는 말은 인간의 내면으로부터의 완전한 `전도`를 뜻한다.

 

그리스도의 메시지의 핵심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이고, `회개`는 거기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자신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즉`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아직 멀리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제 첫 번째 네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을 통해 `회개`의 정을 불러

 

일으키는 것을 보여주신다.

 

이스라엘의 스승들은 그들을 따르던 `제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름`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즉 제자들이 스스을 선택하여 따르는 것이 아니라, 스승이 제자들을 선택하신다.

 

또한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그분의 인격을 따르는 것이다.

 

그분은 제자들과 공동생활을 하시며 그들을 `벗`(요한 15,15)이 되신다.

 

마지막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은 십자가에 이르기 까지 그분의 여정을 다시 밟아간

 

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첫 번째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뜻 용기 있게 한 대답 자체가 그들 마음의 상태를 말해주고 있다.

 

그들은 예수께 자신들을 온전히 의탁하기까지 점진적 과정이 있었다.

 

맨 먼저 그물을 버리고, 그 다음에 배를 버리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아버지까지도

 

떠난다.

 

즉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이 세상 모든 것과의 결별이며,  더 나아가 자기 자신

 

으로부터의 결별이기도 한다.

 

`자기를 버리고`이 모든 것은 우리의 존재 전체가`회개`를 통하여 완전히 변화되어

 

다른 존재가 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

 

이 제자들의 부르심의 깊은 의미란 바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빛에 내맡겨 그 분을 따르기로 방향전환을 해야하는지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모범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제2독서: 1고린1,10-13.17: 의견을 통일시켜 갈라지지 마십시오

 

제2독서에서도 `회개`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바오로 사도는 순전히 개인적인 일

 

때문에 교회의 일치를 깨뜨리지 않도록 하라고 한다.

 

교회 안에서 갈라지거나 대립된다는 것은 교회의 개념 자체가 파괴되는 것이다.

 

교회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즉 그분의 이름과 권능 하에 모인

 

이들로 이루어지는 하나의 실체이다.

 

어떤 한 개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교회는 있을 수 없다.

 

`불러모으시는 분`이 오직 한 분 그리스도이시듯이 교회의 기초는 그리스도이시지

 

(1고린3,11) 어느 개인이 아니다.


 

 

그런데 교회는 역사를 통해 수없이 분열되어 왔다.

 

그리스도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갈라놓았으며(13절 참조),  개인들이 즉 루터나 칼빈

 

혹은 칼 마르크스 등이 그들을 구원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만이라도 구원하고자 한다면 분열과 자멸을 초래하는

 

그러한 어리석은 행동으로부터 `돌아서야`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참된 일치운동은 내적 회심 없이는 있을 수 없다"(일치7)고

 

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갈라져 있다는 것은 서로가 충분히 사랑하고 있지 않으며,

 

또한 그리스도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성부와 `하나가` 되신 것처럼, 당신 제자들도 `하나가` 되기

 

를 기도하셨다(요한17,21).

 

 

그리스도와 그분의 가르침의 `큰 빛`앞에 진정 우리 자신의 내적인 변화를 통해

 

그분과 하나가 되어있는 삶으로, 그분과의 참된 친교를 갖으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 안에, 그리고 그 말씀 안에

 

하나가 되어 진정한 형제애를 나눌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책임을 다 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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