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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51) 말과 행동이 같을 수는 없을까?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5-01-24 조회수999 추천수5 반대(0) 신고

2005년1월24일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 학자 기념일 ㅡ히브리서9,15.24-28;마르코3,22-30ㅡ

 

          말과 행동이 같을 수는 없을까?

                                             이순의

 

 

우연히 어느 집에를 갔는데 놀라운 사실을 보고 기절초풍 할 뻔 했다. 평소에 언어가 곧고 생각이 열려 있다고 생각했던 벗이였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자기의 생각과 같은 이미지를 소유 할 수는 없다지만, 또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가족이 아닌 이상에는 그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에 대하여 알 수는 없다지만, 너무나 다른 모습에 깜짝 깜짝 놀라고 말았다.

 

옛 말에 그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안다고 했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하여 잘 알지는 못 했으나 평소에 어울리는 사람들을 보며 매우 호의적일 수는 있었다. 늘 바른 신심에 대하여 말 하였고, 열린 사고로 개혁적인 안목의 폭이 넓었으며, 또한 환경적인 요인도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키우느라고 다른관심을 누리지 못 하는 전업주부는 아니였다.

 

어렵게 방문한 집에서 이미지에 맞는 차를 대접 받고, 두루두루 사회면에서 부터 경제와 교육, 종교 뿐만 아니라 환경에 이르기 까지 폭 넓은 대화의 장을 풀어 놓았다. 오랫 동안 외출을 하지 않았던 나로서는 오랜만에 근사한 지인을 만난 것 같아서 흡족했다. 최근에 읽었던 책이며, 음식물 쓰레기 문제를 놓고 작은 관심을 소홀히 해서 뉴스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흉보기 까지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실로 엄청나게 방대한 대화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분도 나도 너무나 오랜만의 반가움이라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언어의 삼매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외출했던 아이들이 귀가를 했고, 주부로서의 잔잔한 일거리들이 주어지기 시작했다. 돌아 가겠다고 했더니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챙겨주고 저녁 찬거리를 사러 가야하니 같이 나가자고 했다. 그래서 분주한 주방의 식탁에 앉아서 기다려야만 했다.

 

아이들에게 먹이고 남은 과일 찌꺼기와 음식물 찌꺼기가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고, 밀린 설거지를 하느라고 바빴다. 비누거품이 설거지 통에 가득하였다. 식기들은 한 개씩 닦아져서 옆으로 이동 되었다. 행굼을 기다려야 할 차례였다. 그런데 하얀 거품 속에서 씽크대 찌꺼기 바구니를 들어 올렸다. 비눗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노련한 솜씨로 그 바구니를 음식물 찌꺼기가 있던 그릇에 엎었다. 순간에 멀쩡하던 음식물 찌꺼기 그릇에는 비누 거품으로 가득했다.

 

다시 그릇들을 행구느라고 바쁜 중에 음식물 찌꺼기가 담긴 그릇의 비누거품은 음식물에 고스란히 스며 들었다. 거품이 사라진 찌꺼기에는 철 수세미 조각들이 군데군데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분과 나누었던 언어로 보아서 그렇게 아무런 느낌도 생각도 없이 벌어지는 그 모습이 이해되지 않았다. 거품속의 바구니를 건져 부어서 찌꺼기들과 섞기 전에는 그릇에 담긴 음식물들을 조리하면 분명히 사람도 먹을 수 있었다.

 

비누거품이 가득 든 찌꺼기를 섞어버린 음식물 찌꺼기는 먹고 싶지도 않았고, 먹을 수도 없었다. 더구나 아주 자잘한 철 수세미의 조각들은 또 어떻게 골라 낸다는 말인가? 표현은 못 하고 있었지만 그 날에 그 집에서 나누었던 모든 말 들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작은 일로 그 사람의 환경에 관한 모든 언어는 위선이 되고 말았다. 그 사람의 언어로 등장한 새만금은 위선이었고, 시화호도 위선이었고, 쓰나미를 논 했다는 사실이 분노로 다가왔다. 

 

집이 좁은 우리집의 개수대는 아주 작고 불편하다. 그렇지만 음식물 찌꺼기는 반드시 그릇에 담지만 혹시 개수대 바구니에 담겨진 찌꺼기라도 수세미 질을 해야 할 때는 꼭 쌓인 그릇들을 건져 내고 바구니를 꺼낸 다음 혹시라도 섞였을지 모르는 불순물을 위해 물로 여러 번 행구어서 음식물 찌꺼기 그릇에 담는다. 다시 바구니를 개수대에 넣고 수세미 질을 한다. 혹시 철 수세미가 들어 가더라도 설거지가 끝난 뒤에는 철 수세미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철 수세미는 일반 쓰레기에 털면 음식물 쓰레기에 철이 들어갈 일도 비누가 들어 갈 일도 없다. 복잡 한 것 같지만 아주 간단한 일이다. 손 한 번만 더 움직이면 되는 일이다. 비누거품을 내기 전에 그릇들을 맑은 물에 한 번 행구어서 음식물 쓰레기를 받아 낸 다음에 비누도 풀고, 철 수세미도 사용하면 된다. 그것이 번거로우면 밥상에서 정리 할 때 음식물 쓰레기를 잘 비운다면 굳이 개수대 바구니에 음식물 찌꺼기가 고일 일이 없다. 

 

옛날에 부뚜막에서 밥 해 먹을 때를 생각해 보면, 연탄 아궁이에서 밥 해 먹을 때를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가 사는 일상은 일이라고 할 것도 없다. 단지 그 손 한 번의 움직임을 허락하지 않아서 음식물 쓰레기가 음식물 일 수 없게 하는 것이다. 그것들을 사료로 먹은 동물들이 고스란히 내가 먹는 식탁에 오른다는 입장을 바꾸어 생각한다면 결코 비누거품이 만발하고,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쇠 조각들을 덜퍽 부어 넣지 못 할 것이다.

 

환경이란 멀리 있는 새만금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다. 시화호의 물이 어떨지를 걱정하는 것도 아니다. 쓰나미의 발악에 두려워 떨 일은 더욱 아니다. 환경이란 지금 내가 버리는 쓰레기들이 내 자신에게 어떻게 고스란히 돌아오게 할 것인가를 배려 하는 것이며, 지금 내가 사용하는 물을 다시 내가 걸러서 사용하는데 거리낌 없이 되돌릴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미 인류의 문명은 돌아 갈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학자들은 말 하고 있다.

 

인류는 다시 원시로 돌아 갈 수도 없고, 돌아가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서로가 공생관계에 있는 모든 지구의 생명체들을 하대 해서는 살 수가 없다. 사람이 보는 변도 옛날 것은 그대로 썪었다는데, 요즘 사람 것은 쉽게 썪지 않는다고 한다. 각종 약들의 발달과 복용에도 원인이 있지만 사람이 버린 쓰레기를 먹고 사는 채소와 동물들이 이미 뇌성을 지닌 상태로 식탁에 오른 이유도 상당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동물들이나 식물들이 음식을 선택하여서 고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이 아닌 생명체에 대하여 말과 행동이 다른 관심을 쏟았기 때문이다. 내가 버리는 음식물 찌꺼기가 다시는 나에게 돌아오지 않는다는 착각! 내가 쏟아 보낸 변기의 물에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락스를 풀면서도 그 물을 내가 마실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착각! 비누거품이 잔뜩 든 설거지 통에서 내 그릇만 깨끗하면 내 뱃속은 결코 더러워지지 않는다는 착각!

 

그분과 함께 음식물 찌꺼기 그릇을 가지고 나와 음식물 수거통에 부으며 한 마디의 말도 충고 할 수 없었던 나는 공범자였다. 사람이 제 아무리 잘난척을 해도 사람의 몸 속에는 수 없이 많은 벌래들과 공생한다고 한다. 그 벌래들과 공존하도록 신께서 만드신 이유는 그들의 도움이 없이는 인간이 살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로운 벌래와 해로운 벌래가 전투를 하며 면역성을 기르고, 생명력을 키워간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얼마나 잘난척하며 살고 있는가?!

 

그날에 그분과 나눈 모든 지식은 허구인 것 같았다.

그 비누거품과 그 철 수세미 조각들로 장바구니 가득 시장을 보아다가 저녁식탁에 풍성하게 차려졌을 상상을 해 보았다. 몸서리 처지는 끔찍한 상상이었다. 말과 행동이 같아야 되는 것은 아주 작은 일에서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 같았다. 손 길 한 번의 배려에 마음을 쏟아야 하는 것이었다.

ㅡ주님!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 아멘!ㅡ

 

ㅡ나는 분명히 말한다. 사람들이 어떤 죄를 짓든 입으로 어떤 욕설을 하든 그것은 다 용서 받을 수 있으나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영원히 용서 받지 못 할 것이며 그 죄는 영원히 벗어날 길이 없다. 마르코3,28-29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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