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왜 청하라고 하시나?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5-01-26 조회수955 추천수14 반대(0) 신고


성 디모테오와 성 디도 주교 기념일(1/26)






    독서 : 2디모 1,1-8 복음 : 루가 10,1-9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 예수께서 일흔 제자들을 떠나 보내시면서 가장 먼저 분부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은 왜 당신의 일을 시키면서 일꾼을 알아서 보내주시지 않고 제자들에게 청하라고 하시는가?
    나는 그것이 항상 의문이며 불만이었다. 그런데 이 의문을 풀어준 사건이 있었다. 새로 성당을 지어 분가(分家)했을 때의 일이다. 곳곳에 일꾼이 턱없이 모자랐다. 내가 속한 주일학교도 주일 미사에 평균 200명의 아이들이 나왔지만 경험있는 교사는 나를 포함하여 겨우 두 명으로 둘 다 40대가 넘는 늙은(^^) 교사였다. 나머지 두 명의 보조교사는 아이들 앞에서 입도 벙긋 해보지 못한 신참들로서 시작 전부터 걱정이 태산이었다. 어쨌든 4명이 교감, 교무, 성가대를 나눠 맡으면서 두 학년씩을 한꺼번에 전담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어머니들은 새성당에 아이들을 열심히 보내 주셨으나 정작 교사를 해보라고 하면 모두 꽁무니 빼기 바빴다. 몇 달 동안 두명이 충원되고는 그만이었고 교실도 없는 상태에서 어찌나 힘이 들었던지 방광염이 걸렸다. 쉬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도 그럴 수 없는 처지였다. 더구나 남편은 신자가 아니었으므로 집에서는 아프다는 이야기도 할 수 없었다. 교사 회합에 들어가기 전, 캄캄한 성당에서 조배를 하는데 눈물이 흘렀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라셨죠? 그래요. 당신이 청하라 하셨으니 제가 청하는 겁니다. 이제 일꾼을 보내주시지 않으면 저도 더는 못하겠습니다. " 한참을 울며 주님께 공갈 협박을 하다가 눈물을 닦고 회합에 들어갔는데 이게 웬일인가? 꿈인지 생시인지 교사가 한꺼번에 세명씩이나 와 있는 것이 아닌가? 교사회합 전에 '복음 나누기’를 한시간 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마침 그날 복음 중에서 나는 ’도망’이라는 단어를 선택했고, 방광염에 걸린 일과 힘들어서 교사 직분을 버리고 ’도망’할 궁리를 짜내던 일, 방금전 감실 앞에서 울며 일꾼을 보내달라고 간청을 하고 나왔는데 이렇게 빨리 청을 들어주실지 몰랐다며 감격에 겨워 숨도 못쉬고 줄줄이 꿰었다. 드디어 그날 처음 나온 교사(?)들의 차례가 되었다. 그들은 멈칫거리며, 계속된 수녀님의 요청에 못 이겨 오늘 직접 뵙고 못한다는 말씀을 드리러 나왔다는 것이다. 아, 그 말을 듣고 있는 허무한 심정이라니... 그런데 기적은 다음 순간에 일어났다. 각오는 그렇게 하고 나왔는데 교사들이 그렇게 힘들게 고생을 하는지 몰랐다며 혹시 이주에 한번씩 나와도 된다면 임시교사로라도 돕고 싶다고 했다. 그분들은 부업을 가지고 있었기에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우선 급한대로 이들이라도 붙잡아야 했다. 이주에 한번씩이면 어떠리... 그저 뒤에서 아이들의 뒤를 돌보아줄 일손이라도 필요했다. 그 후에 이분들은 부업을 조금씩 줄여 나가면서 교사의 직분에 매진하며 보람을 찾아나갔다. 지금은 교사를 천명(天命)으로 여기고 있으며 다른 본당으로 이사가서도 자진해서 교사를 맡고 있는 숙련된 일꾼들이 되었다. 그들이 교사로 있는 동안, 나는 그들을 제 발로 들어온 사람들이라거나 수녀님이 뽑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본 일이 없었다. 정말로 그들은 내게 있어 하느님께 간절히 청해서 하느님이 보내주신 일꾼이었다. 전자와 후자의 생각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교회 일을 하다보면 언제나 우리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서로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디까지나 하느님이 보내주신 일꾼으로서 하느님이 뜻하신 바 있어 공동체에 보내주셨을 것이라는 의식을 갖게 하였다. 적어도 사사로운 감정 따위로 하느님의 속뜻을 함부로 저버리지는 못하게 되었다. 우리는 일꾼의 능력에 주안점을 두기보다는 '하느님이 보내주신' 에 주안점을 두게 되었다. 즉 보다는 사람, 또 그 사람을 파견하신 분에 관심을 두었던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하느님이 보내신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뭉친 공동체는 서로의 장점뿐만 아니라 단점도, 서로를 보완해주라는 하느님의 뜻으로, 서로의 다른 의견들도, 공동의 유익을 위한 하느님의 지혜로, 개성이 다른 사람들끼리 서로를 인정하고 협력하는 학습장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렇다. 우리는 교사로서 불림을 받은 것이 아니라 늘 배우는 제자로서 불리움을 받은 것이었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끼리 모여 서로간의 사랑을 배워나가는 학교가 바로 교회인 것이다. 아직도 그때의 그 제자들은 서로 떨어져있어도 그 때를 그리워하며 그런 공동체를 각자의 처소에서 또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서로 상의하고 있다. 일흔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그 많은 제자들에게 추수할 일꾼을 청하라는 당부를 제일 처음 하시는 주님의 속내는, 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나가기 전에 서로가 서로를 하느님께 간청해서 하느님이 보내주신 일꾼으로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된다는 말씀이 아니겠는가? 제자들 사이에서 그 일이 잘 되지 않을 때, 그들이 이룩할 수많은 업적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어떤 조사에서 성직 생활 중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인가 하고 성직자들에게 물었다. 인간관계가 가장 힘들다고 했으며 그중에서도 같은 성직자들과의 관계가 일반신자와의 관계보다 훨씬 더 힘들다고 말했다 한다. 혹시 우리들도 비신자와의 관계보다는 같은 신자들과의 관계가 더 힘드는 것은 아닐까? 바울로의 참된 협력자, 영적인 친구, 든든한 후원자였던 디모데오와 디도. 이들이 진정 그런 아름다운 관계가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이 서로에게 보내주신 꼭 필요한 일꾼이라는 인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나의 경쟁자라고 인식될 수 있는 사람들, 내 생각과는 사사건건 반대되는 방해자라고 생각되는 사람들. 그들을 주님께서 보내주신 거들짝, 협력자로 '항상' 인식할 수 있는 영안이 열리길 간절히 청해본다. ♬시편 제15(1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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