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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55) 꽃물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5-01-27 조회수1,099 추천수5 반대(0) 신고

 

완성도는 미흡하지만 소설<꽃물>입니다.- 시간이 넉넉할 때 클릭하세요.

                                      이순의

 

 

이 글은 써 두고 싶어서 오래 전에 써 두었던 글입니다. 최근에 살을 좀 붙여서 소설형식으로 꾸며 보았지만 자전적 이야기이며, 묵상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여인이며, 모든 생명체가 여인의 몸에서 태어 납니다. 그런데 최근에 굿뉴스의 몇몇 여성 벗님들 중에서 생명의 탄생 주머니를 상실하는 안타까움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졸작의 글을 공개합니다. 여인들은 여인들 대로 첫 경험들을 떠올리며 자신의 성전에 대하여 생각이 많아질 것이고, 남성분들은 남성분들 대로 경험 없는 세계의 노출에 대하여 생각이 많아지실 것 같습니다.

 

제 생각은 최근의 많은 여성들이 여성성을 상실하는 것 뿐만 아니라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읽으시는 각자에게 어떤 파장이 쏟아 질지는 모르나 저는 저의 미흡한 이 소설에 대하여 글의 솜씨 보다는 글이 가지는 묵상을 전하고 싶습니다. 아픔이 있는 많은 여성들께 돈독한 사랑을 전하며, 지켜보는 남성분들의 자상한 배려를 바래봅니다. 자전적 이야기를 아들의 관점으로 쓴 글입니다. 문학전인 평가는 하시지 않기를 빕니다. 제가 넘지 못하는 부족함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생명에 대한 묵상이 되시기를  빕니다. ㅡ아멘ㅡ

 

 

  꽃 물

         

                         글쓴이; 이순의



어머니 꽃님이 그때 그런 편지를 써서 아버지 차돌에게 보내드리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께서 그 소리를 들었을 때는 애석한 마음이 앞서실 거라고 생각했다. 아버지 차돌에게도 남자라는 권리가 어머니 꽃님의 남편이라는 의무보다 먼저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본심은 흔적조차 섭섭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글을 아버지께서 읽어보셨을지는 장담하지 못한다. 어머니께서 써주시는 편지뿐만 아니라 쪽지 글도 읽어본 기억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소리 내어 읽어드리는 글을 제외하고는 아버지 스스로 읽어서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린 적이 없었다. 젊은 시절에 예쁜 꽃봉투를 밥상위에 올려놓고 슬그머니 나가 계실 때도 아버지는 편지를 읽지 않았다.  아버지는 자네 마음이 내 마음이네라는 한마디로 알 수 없었던 내용들을 호도하셨다.

 

어머니 꽃님이 빛바랜 한 통의 편지를 나에게 주셨을 때는 아버지 차돌을 대신해서 꼭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인의 입장에서 외로움이 짙게 깔린 아픔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편지에서 어머니만 보지 못했다. 아버지 차돌의 우직스런 현실에 일방적인 동정심이 쏟아졌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지금 내가 지키며 살고 있는 것들에 대한 근원을 생각해 보았다.

분명한 것은 어머니보다 세련된 여성상위의 세상이며 아버지 보다 영리한 내 자신을 발견했다. 그래도 어머니처럼 아버지처럼 변함없는 세월을 채울 수 있을지 자신하지는 못했다. 여인은 여인대로 어머니의 모습이 아니었고 사내는 사내대로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었다. 계절이라는 축복을 누렸을 십리 길의 여학생도 없었다. 받은 사랑의 편지봉투만 만져보아야 하는 사내의 한탄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아버지 차돌은 어머니 꽃님에게 어떤 지아비였을까?

 

어머니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순간에 늘 혼자였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그런 순간마다 아내와 함께 있어주어야 되는지를 지아비인 아버지께서는 모르고 계셨다. 어쩌면 그런 때가 어머니에게 얼마나 아쉬웠는지를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세월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정말로 알지 못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설한의 추위에 수술날짜를 받아놓았다. 여러 가지 검사를 하러 병원에 다니고 계셨다. 그런데도 아버지께서는 어머니 옆에 있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셨다. 어쩌면 함께 지내야 할 만큼의 여유가 없다는 것을 어머니께서 더 헤아리고 있었을 것이다. 늘 그랬었다. 어머니께서 지아비인 아버지의 편에서 생각하는 배려가 먼저였다. 괜찮다고! 걱정 말라고! 그래서 아버지는 언제나 괜찮기를 바랐었고 무탈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재워두고 첫배를 타러 나가야 한다. 어미의 섬세한 정은 보드란 자식의 볼기에 입맞춤을 한다. 방문을 나서기 전에 눈길이 돌아서서 다시 또 입맞춤을 한다. 눈 안에 들어온 아들의 촉감이 안쓰럽다. 발길을 돌려 방문을 열어야하는 새벽이 원망스러웠다. 다시 한 번 더 다가가서 자는 아이의 볼기에 어미의 훈김을 쏘인다. 잠결에라도 하루치의 모정을 저장해 두고 싶어서다. 귓불에도 이마에도 콧등에도 목덜미에도 입술에도, 손등에서 발등까지! 애틋함을 담아주느라고 어머니께 배당된 시간은 짧아지고 있었다. 어두운 새벽 들길을 달려야한다. 모진 정을 두고 온 심약한 어미의 기운을 찬바람이 꾸짖는다. 첫배를 타지 못하게 되면 병원 예약시간을 놓치게 되고, 진료가 늦어지게 되면 기다리지 않고 막배의 뱃고동은 울어버린다. 섬마을의 고적한 밤을 어린 아들은 홀로 무서워할 것이다.

 

잘 짜여 진 극본이 캄캄한 새벽 스크린에 환하게 상영되고 있었다. 관객도 없었다. 동면에 든 대지는 발자국만 허락할 뿐 동무들을 깨우지 않았다. 그 영화는 어머니 꽃님이 혼자서만 봐야 되는 예고편이었다. 아버지 차돌이 함께 보아준다면 새벽 서리에 얼은 눈물이 덜 시렸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버지께 혼자 주인공이 되었다는 기별을 하지 않았다. 당신이 함께 주연이 되어준다면 따뜻한 이야기가 될 거라고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가장의 몫을 준비해야하는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짝이 되어 동행을 하고 있었지만 삶은 각자에게 지워져 있었다. 그 삶을 위해 서로가 서로를 배려할 뿐 대신 살아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버지의 마음을 청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수술비를 마련하느라고 고단했다. 아버지의 손금에는 아버지의 운명이 그려져 있었다. 산다는 것은 남편이 주인공일 때는 아내가 조연이 되어 주지만 아내가 주인공일 때는 남편이 조연이 되었다. 그 밤에 어머니는 사연을 담느라고 잠들지 못했다.


ㅡ오늘이 1995년 12월 19일 화요일! 음력으로는 단기 4328년 10월 27일 저녁 10시다. 나는 지금 내 일생에서 마지막을 고해야할 꽃물과 만나고 있다. 그 이별을 아쉬워하며 꽃물이 오시기를 기다렸다.

건강을 타고나지 못한 육신의 덕은 달마다 하는 달거리를 달마다 하지 못 했다. 완전히 건너뛰는 달도 있었지만 그래도 내가 여자임을 확인시켜 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생명을 잉태할 수 있다고 알려주는 확실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마음이 속절없어서였는지 독한 감기가 찾아와 훼방을 놓았다. 이대로 끝을 보시려나보다고, 다시는 만나지도 않고 가시려나보다고 야속한 미련을 아쉬워했다. 찬 겨울의 마음은 고생스러웠고 쏟아지는 피로는 기다림에 지치고 있었다. 이달에 꽃물이 다녀가실 날은 한참을 지나버렸다. 체념은 그냥저냥 저물어 갔다. 마지막 이별도 하기 싫었나보다고 자포하였다. 그런데 이 밤에 시작된 암갈색의 꽃물이 빠끔히 기척을 한다.

 

내일은 선홍의 꽃빛이 짙어 오시라고 청하였다. 반가운 기척만 살짝 내밀고 돌아서지 말아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했다.

나에게 처음 꽃물이 찾아와 수줍은 볼이 짙었을 때는 열다섯 살 나이, 여중학교 2학년의 5월이었다. 울타리 넘어 아카시아 꽃은 싱싱한 아침 냄새로 꿀벌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질컥한 느낌이 섬뜩하기는 했지만 원인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꿈결에라도 소피를 지렸을 조바심만 급해졌다. 뜀박질을 하여 변소에 앉아보니 맑음이 아니라 붉음이었다. 겁이 나고 무서웠다. 오줌 줄이 물컹하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재래식 변소의 똥 덩어리 위에 선혈이 흥건했다. 밑 닦이로 걸어놓은 신문지를 뭉쳐서 던졌다. 붉은 흔적을 가리고 싶었다. 또 뭉치고 또 던졌다. 쉽게 명중되어지지 않았다. 걸려 진 신문지는 남김이 없었다. 그 혈흔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뛰지 말아야한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비밀일 것만 같았다. 그냥 아침이 온통 비릿한 역겨움이었다.

 

부끄러웠다. 누구에게도 그 흔적에 대하여 말하고 싶지 않았다. 방해받지 않은 햇살이 변소 문틈으로 쨍한 미소를 지었다. 밖에는 아무도 없다고 손짓하는 것 같았다.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서랍을 열고 담겨진 속옷을 있는 대로 꺼내놓았다. 홍물 든 축축함을 벗었다. 그리고 크기가 작은 것부터 하나씩 차례로 집어 겹겹이 껴입었다. 내일은 무엇을 입어야 할지? 질컥한 선혈이 멈추는지? 흐르는지? 마음 쓸 겨를도 없었다. 서랍에는 다음을 위한 여분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벗은 얼룩은 신문지에 꼭꼭 싸서 비워진 공간에 채워 닫았다.

 

책가방을 들었다. 그날따라 사각의 빨간 가방은 유난히 붉었다. 싫었다. 내 책가방만 빨강이어서 싫었다. 그래도 학교는 가야한다. 주번이었고 카레라이스 만들기 가사실습이 있는 날이었다. 다른 날보다 등교시간을 서둘러야했다. 안절부절 한 경황에도 돈이 있어야 될 것 같은 예감이 스치고 있었다. 바깥에서 아침 일손에 정신이 팔리신 어머니께 준비물을 사야한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이유를 불문하고 등교하는 딸에게 너그러우셨다.

학교는 10리 밖에 있었다. 마을을 지나고 들을 지나고 다리를 건너서 읍 사거리를 관통하여 산과 들이 마주하는 변두리였다. 멀고 먼 불안의 끝에 교실이 있었다. 이른 학교 길은 까까머리 남학생들의 자전거 한 대도 없었고, 단발머리 여학생들의 종종 걸음도 그리 많지 않았다. 부지런한 마을사람들이 나만 처다 보는 것 같았다. 차라리 들판 가운데 신작로를 걸어갈 적에는 보폭이 자유로웠다. 다리를 건너 읍내에 들어서자 곳곳에서 모여든 학생들로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다시 걱정이 밀려들었다.

 

밖으로 새어나오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에 손이 자꾸만 뒤로 갔다. 책가방을 바르게 들지 못하고 앞으로 들었다가 뒤로 들었다가 아침기력이 소비되고 있었다. 등에서는 열이 솟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일생에 처음으로 경험하는 불편한 아침이었다.

주번조회종이 울렸다. 친구들은 등교를 하느라고 소란스러웠다. 각반의 주번들이 모여 교무실 앞 복도에 줄을 섰다. 그런데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열다섯 살 여학생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고통이었다. 허리가 뒤틀리는가 싶더니 아랫배로 돌아와 끊어질듯이 아팠다. 갑자기 왜 그렇게 아픈지 영문도 알지 못했다. 흐른 땀은 전신을 적시고도 남았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유전되어온 숙명을 견디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많이 껴입은 속옷들도 얇을 것만 같은 불안에 시달렸다. 걸음걸이조차 자연스럽지 못했다.

 

주번주임 선생님은 회초리를 들고 서서 교무실 앞의 넓은 현관바닥을 닦으라고 했다. 이미 하체는 경직되어버렸다. 쭈그리고 앉아 손 걸레질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선생님의 예리한 눈빛은 주번들 사이를 누비고 계셨다. 앉지도 못하고 서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한 상태로 선생님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기진맥진한 아침이었다. 출혈의 불안함과 진통의 고통사이에서 진땀은 범벅이 되어 끈적거렸다.

“너? 어디 아퍼?”

선생님의 지휘봉은 정확하게 내 눈을 향하고 있었다.

“아니요.”

엉겁결에 빠른 응답이 튀어나갔다.

“교실로가!”

지휘봉 끝은 수시로 방향을 틀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루 말로다 형언할 수 없는 감사였다.

어른이 되어 돌아보는 지금도 그날 선생님의 얼굴이 선명한 감사로 생생하게 떠오른다. 주번주임 선생님은 여선생님이셨다. 경험으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내 모습은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유리관이었을 것이다. 여자로서 여자에게 배려하시는 아량은 일생을 살아가면서 여성으로서 여성성을 존중하게 되는 지표가 되었다. 첫 경험에 대한 선생님의 배려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었다.

 

그런데 3~4교시에 가사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앉지도 서지도 못했던 주번청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환난이었다. 태어나서 단 한번 먹어 본적도 냄새를 맡아 본적도 없는 카레라이스 만들기 실습이었다. 2교시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 모두들 체육복으로 갈아입었다. 앞치마와 머리 수건도 둘렀다. 책상은 실습하기 좋도록 몇 개씩 붙여서 정사각형으로 배열하였다. 조별로 집에서 들고 온 석유곤로가 중앙에 올라서고 각자 맡은 냄비나 도마 같은 살림도구들도 꺼내 놓았다. 다행히 재료들은 공동구매를 했으므로 각자의 책가방속에서는 나오지 않았다. 미리부터 교실의 공기를 오염시킬 일은 없었다. 그러므로 음식냄새의 역겨움을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깍두기모양의 야채들이 숫자를 늘여갈수록 교실 안은 냄새로 천국을 이루었다. 석유곤로의 심지 타는 그을음과 구수한 밥 익는 향기와 꾸적지근하게 기름 끓는 증기뿐만 아니라 카레가루의 혼합은 질식을 할 것만 같았다. 그 시절에는 시골읍내의 중학교 교실에서 실습이나 해보는 이상한 맛에 이상한 냄새의 음식인 것만은 분명했다.

 

친구들은 새로운 재미에 희희낙락 하느라고 나의 불편이나 매스꺼움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교복치마를 벗고 하얀색 체육복 바지를 입었다는 것도 불안감만 가중되었다. 첫 경험이 있던 날의 모든 상황이 악재로 진행되고 있었다. 주번인데다 실습까지 있었으므로 잔심부름은 훤한 일이었다. 도무지 무엇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상황인지조차 둔탁해졌다. 진땀만 뻘뻘 흐르고 있었다. 걸음걸이는 종종거리고 두터운 속옷은 축축했다. 허리는 칼로 에는 듯이 아팠고 아랫배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머리는 천근처럼 무거웠고 냄새는 토하기 직전의 현실이었다. 헛구역질을 할 것 같던 목구멍에서는 신물이 넘어왔다가 삼켜졌다. 급기야 카레가루는 독가스로 변질 되었다.

 

그때는 왜 그러했는지를 몰랐다. 그냥 불편했고 그냥 싫었고 그냥 힘든 시간들이 대책 없이 흘렀다. 그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원죄로부터 내려온 값이었는지도 모른다. 분명히 어린소녀가 수용하기에는 너무나 큰 경험이었다. 뼈마디가 쑤셔오고 오돌오돌 한기에 온 몸이 떨려 와도 그걸 참아야했다. 여인이 된다는 것은 살을 찢어 생명을 낳는 연습에 불과했다. 그리고 닷 되들이 커다란 주전자에 물을 길러서 실습실에 공급했다. 짝이었을 주번친구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그만큼 홀로 외로운 날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매월 반복되는 월례행사라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여인이면 누구나 살아내야 하는 생리통이라는 것도 알았다. 지극히 정상적인 생리현상이었다. 생리통 약을 만들어서 부자가 된 제약회사들이 있었을 만큼 아플지를 몰랐을 뿐이다.

 

3교시 끝 종이 울리고 화장실에 다녀올 사람만 나가도 된다는 가사 선생님의 허락이 떨어졌다.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조퇴를 하고 싶었다. 교무실로 갔다. 담임선생님께 무슨 말을 하고 조퇴를 청했는지 선생님께서는 또 어떤 말씀을 하시며 허락을 했는지 모른다. 가사선생님께 들키지 않고 4교시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교실을 빠져 나가야 했다. 급하게 책가방을 싸서 뛰쳐나왔을 때의 한적한 들길이 너무나 시원했다. 5월의 연두 빛깔 대지위에는 나 혼자 있었다. 나도 5월의 연두 빛이었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하며 걷고 있었다. 

읍의 끝자락에 학교가 있었다. 학교가 읍이기는 했지만 작은 들판 하나를 건너가야 읍 사거리에 진입할 수 있었다. 나는 약국 앞에 섰다. 망설임이 한 바지게를 지우고 있었다.

 

네댓 개도되지 않는 읍 사거리의 약국들을 둘러보았다. 왜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약국 안을 살피고 다녔다. 일손이 바쁜 5월의 한적한 읍내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어떤 약국에는 손님이 있었고, 다른 약국은 약사가 남자였다. 쉽게 들어가지 못했다. 그래도 꼭 사야할 것이 있었다.

약국 안에 손님이 없어야하고 파는 사람이 여자여야만 했다. 갔던 약국 앞에 또 가보며 읍내에 머물렀다. 행인들의 시선까지 두렵게 느껴졌다.

인내의 시간은 흐르고 몇 번을 스쳐 지나간 약국 하나가 타는 마음을 빨아들였다. 손님도 없는 약국에서 약국 아줌마가 약사남편이랑 도란도란 정담을 나누고 있었다. 살그머니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갔다. 생각대로 아주머니께서 일어나 나를 맞았다.

“학생! 뭐 줄까?”

“........!”

얼른 대답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뭐 사러왔어?”

“피스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겨우 말을 놓았다.

“피스으?”

“네.”

아주머니의 표정은 아리송하게 변하고 있었다.

“그게 뭔데?”

“피스요.”

아주머니의 음성이 커졌다.

“패드 살 거야?”

“아니요. 언니가 피스 사오라고 하던데요.”

언젠가 사촌언니를 따라서 읍내에 나왔을 적의 어렴풋한 기억을 동원한 것이다. 그때 자세히 들어두지 않고 건성으로 귀동냥한 것이 탈이었다. 패드를 피스로 알아들은 것이다. 아주머니께서는 언니가 사오라고 했다는 말에 미소를 지으며 다시 질문을 하셨다.

“언니가 먹을 거야?”

아주머니는 열 고개 문제놀이를 하듯이 조목조목 물으셨다. 그리고 패드라고 단정을 지었다. 나의 입장에서는 잘 못 사가면 큰일이 나는 물건이었다.

“먹는게 아니라니깐요. 꼭 피스를 사가야 되요.”

나는 고집스럽게 우기고야 말았다.

 

약국아주머니는 그런 물건은 없다고 단호히 거절했다. 부끄러웠다. 당장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손님이 있거나 약사가 남자일 생각을 하면 그럴 수도 없었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분명히 모든 약국에서 파는 물건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 약국을 나오지 않았다. 언니들이 꼭 사오라고 했다는 말을 전하며 피스를 달라고 재촉하였다.

“그래! 언니들이 월경할 때 쓰는 물건이라구.”

“월경이 뭔데요?”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듣는 단어였다. 아주머니는 간단하게 대답하셨다.

“여자들만 하는 건데 그런 거 있어.”

대충 감이 느껴져 왔다.

“아줌마 맘대로 한 번 줘 보세요.”

 

무슨 비밀을 숨겨둔 것처럼 아주머니는 안으로 들어갔다. 두툼하게 신문지로 싼 물건을 들고 나오셨다. 아침에 거짓말을 하고 받아온 돈을 내밀었다. 원했던 피스인지는 모르지만 책가방속에 넣고 억지로 고리를 채웠다. 뚱뚱해진 가방조차 가릴 수는 없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읍내를 벗어났다. 친구들이 꿀꿀이죽 같은 역겨운 냄새의 카레라이스를 맛있게 먹고 있을 시간이었다. 해는 정오를 넘어 있었다.

읍내의 초입에 있는 다리를 건너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평야지대를 지나 마을의 끝에 집이 있었다. 아무리 마음이 급하다고 해도, 뚱뚱한 책가방이 거슬린다고 해도, 식은땀에 허리통증이 끊어질듯 하다고 해도, 먼 길은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옮겨가는 것이었다. 꺼림칙하게 젖은 옷을 갈아입고 싶었다. 뜨끈한 아랫목에 누워 자고 싶었다. 바라보이는 마을의 끝에 쉴 집이 있어서 좋다는 마음이 우러났다.

 

어머니께는 아파서 조퇴를 했다고 말씀 드렸다. 그리고 방문을 걸어 잠그고 의자에 앉았다. 책가방을 열고 찌그러진 뭉치를 꺼냈다. 책상위에 올려놓았다. 싸진 신문지를 뜯었다. 그것은 내가 필요로 하는 피스였다. 비닐포장은 분홍색이었고 글씨는 흩날리는 리본체로 ‘코텍스’라고 써져 있었다. 약국아줌마가 정확한 답을 알아낸 것이다.

그날 월경이라는 말도 패드라는 말도 처음 들어 본 날이었지만 여성용 생리대라는 글자도 처음으로 읽어 본 날이었다.

요즘은 가는 곳마다 생리대가 수북이 쌓여있다. 그것을 사는 사람도 파는 사람도 부끄러워 하기는 커녕 무엇을 파는지 관심조차 둔감한 상품이 되었다. 행여 남정네들 눈에라도 뛸까봐 꼭꼭 싸서 안쪽에 두고 팔았던 수줍은 물건이 아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피스를 사야하는 실수를 하지 않아도 된다. 더구나 가게주인의 눈치를 살핀다는 것은 웃기는 일일 것이다. 다양한 상표와 디자인에 따라서 이름도 무수하다. 날마다 다른 생리 량에 따라 두께가 다르고, 활동하는 내용에 따라 모양이 차별화 되었으며, 취침용은 크기가 다른 변별력을 앞세워 광고를 하고 있다. 그만큼 흔해빠진 물건하나를 집어오면 되는 세상이다.

 

그 후 우리 반 명자는 교복이며 의자에 붉은 물감을 흥건히 물들이고 말았다. 20리길을 걸어서 학교에 다니던 어린마음이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했던 것이다. 무엇인지 모르는 기척 때문에 종일토록 의자에 앉아 꼼짝을 하지 않았다. 그날 명자의 모습은 옷에 변을 본 초등학교 입학생과 다르지 않았다. 여선생님이셨던 담임선생님께서는 속옷을 급조해 오셨고 체육이 들었던 반에서 체육복을 빌려 일일이 타이르셨다. 그러나 명자는 손가락만 빠는 코 흘리게 어린아이처럼 친구들의 시선만 두려워하고 있었다. 다행히 덩치가 있었던 한두 살 위인 친구들이 명자의 손을 이끌고 교실을 나갔다.

그리고 다음 가정시간에 성교육이라는 수업을 받았다. 월경이라느니 배란이라느니 주기가 어떻고 임신이 어떻고 하는 수업이었다. 참으로 늦은 감이 들었다. 한없는 아쉬움이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나의 꽃물은 21년 7개월 동안 물들어 주었다. 어쩌다 가끔은 뜸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여자로서 성숙한 구실을 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단 한 번의 수정으로 한 명의 아이를 출산해 보았다. 여성국민의 반 이상이 경험한다는 유산이나 낙태의 경험도 없었다. 그런 꽃물이 이제 마지막 물감 칠을 하고 있다.

지금 나이 설은 다섯!

아직 얼마든지 출산이 가능하다. 이렇게 젊은 나이에 꽃물은 마지막을 고하고 있다. 불안했다. 하나 뿐인 아들에게 변고라도 생긴다면 어찌해야 할지 암담하였다. 남편에게 아이를 더 가져보자고 사정을 했었다. 남편은 한마디로 거절했다. 변고란 팔자로 받아들이며 사는 거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욕심 때문에 아이만 떨궈 놓고 어미가 죽는 변고가 생긴다면 그야말로 홀아비 신세를 어찌할 거냐고 일침을 놓았다. 아이 둘에 가난한 아비신세는 누구도 함께 하지 않는다고 격노하였다. 그럴 바에는 아들 하나에 만족하고 마누라랑 살고 싶다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렇게 허전할 수가 없다. 이렇게 슬플 수가 없다.

 

결혼을 해서 살을 섞고 사는 사람끼리 느끼는 촉감은 부부만의 선물이다. 그 성감의 결과로 쏟아지는 정열은 여인에게 주어진 신비중의 신비이며 환희중의 환희일 것이다. 그 희열은 닮은 아기를 낳고 싶은 갈망이 되고! 생명은 잉태되는 것이다.

나는 나의 삶이 중요해서 회임하기를 거부한 것은 아닐까? 나는 내게 닥쳐올 죽음이 두려워 아기의 삶을 허락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그러고도 임신에 대한 미련을 거두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성성의 상실로 인한 남성의 방랑을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는가?

어차피 죽는다는 것은 한 번뿐이다. 그 죽음을 미루고 있는 것이다. 삶을 연장 시키려한다. 나의 인생길을 계속 가려고 한다.

 

그런데 다시는 오시지 못할 손님을 맞고 있다. 숨결은 살리고 자궁은 희생한다. 나는 살아서 계속 여인의 길을 갈 것이다. 그러나 꽃물은 다시 돌아 올수 없는 곳으로 사라질 것이다. 남편에게 마지막 장식품을 보여주고 싶다. 내게도 이런 날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두라하고 싶다. 꽃물의 홍색 고운 빛깔과 생기 있는 비릿한 암내를 선물로 주고 싶은데 나는 이 밤에 내 남자를 그리워하고 있다. 세상이 정지되고 여성과 남성이 정지되더라도 부부가 이루고 살구는 합궁은 변함이 없기를 기원해 본다. 

“여보! 미안해요.”

나는 이 깊은 밤에 내 인생의 화려한 꽃물을 홀로 만나고 있다. 이별은 나만의 몫인가 보다.

“잘 가요. 꽃물!”ㅡ

 

어머니는 새벽 첫배를 타고서야 몰아쉰 숨결을 달랠 수 있었다. 농한기 새벽 배는 부지런한 섬마을 손님들로 빼곡했다. 어둠을 가르고 온 촌객들이 여객선 바닥에 얼키설키 누워있다. 틈을 찾아 어머니도 누워 지그시 눈을 감았다. 밤을 밝히고 온 피로가 밀려들었다. 다행히 진료시간에는 늦지 않을 것이고 막배도 탈 수 있을 것이다. 어린자식이 무서운 밤을 홀로 떨지 않아도 된다. 스미는 안도감에 곤한 단잠이 들었다. 두 시간 반 동안의 침묵이었다. 아픔은 배를 타고 둥둥 떠서 갔다. 어머니는 여객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공중전화박스부터 찾았다. 잠든 아이를 깨워야 한다. 한없이 울어대는 전화벨 소리에 아이의 아침은 차가울 것이다. 차려진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세수도 하는 둥 마는 둥 그런 아침을 이해하며 학교에 가야한다. 수화기 속의 어머니는 걱정이 물결 되어 출렁거렸다. 수술날짜를 잡아놓았으므로 아버지께서 오셔서 의지가 되어줄 때까지는 홀로 지탱하고 있어야 한다. 어린것에게도 몫이 있었다.

 

어머니 꽃님이 한 번만 더 꽃물의 수고를 허락했더라면 혼자 두고 오지 않아도 되었다. 둘째아이를 두지 못한 아쉬움에 마지막 붉음이 시리도록 아까웠다. 그래도 어머니는 이별의 끝이 싫었던 서글픈 밤을 아버지께 말하지 않았다. 쓸쓸한 체념의 적막을 직접 읽어서 남편에게 전달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여자로서의 소중한 담금질이었다. 담가놓은 심정을 남편이 꺼내서 헤아려주기를 바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는 기대감이 없었다. 우둔한 아버지께서 여인의 상실까지 살피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처연한 모습으로 수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여인들이 여성을 도려내야만 하는지 모른다. 악성 종양에서 간단한 물혹까지 생명이 살고 나야할 궁전에 위기가 닥친 것이다. 어머니도 꽃물의 덕이 있어서 생명하나를 얻었지만 돌아본 삶은 서글픔이었다. 어머니에게 조금만 더 너그러운 생활이 허락되었다면 궁전의 문을 활짝 열었을 것이다. 어지간만 했더라도 아버지께서 사내의 객기를 주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삶의 고단함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거처를 멀게 벌려놓은 것이다.

천 리 밖의 아버지께서도 어머니의 수술을 대비하고 있었다. 마지막 꽃물 따위는 별 의미가 없었다. 수술이라도 잘 못 된다면 어찌해야할지? 악성종양이라고 한다면 그 대책을 어찌 세워야할지? 섬마을에 두고 홀로 떠나온 용서를 어떻게 빌어야할지? 돌아보면 다가올 앞이 캄캄하였다.

고생만고생만 하느라고 좋은 날 하루도 살아보지 못한 탄식이 서울의 밤을 지세우고 있었다. 불러줄 날을 기다리며 밤마다 베개를 적셨을 어머니 꽃님을 생각했다. 아버지는 바르게 눕지도 못했다. 오므라들었다. 어머니에게서 덩어리를 도려내야할 이유가 남편인 아버지의 탓인 것만 같았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마음 둘 곳이 없었다. 한시바삐 어머니 곁으로 가고 싶었지만 마련되어져야 할 것들이 여의치 못했다. 배를 타러 갈 때마다 가슴이 미어질 어머니의 모성을 외면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안개 짙은 날이면 배는 출항하지 못한다. 어머니는 선착장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를 것이다. 어린 자식이 홀로 무서운 밤을 보내야한다. 아버지 차돌의 가슴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지는 순간이다.

어둠이 두려운 아이는 고꾸라져 지친 잠을 잔다. 아버지는 천 리 밖에서 뚝심을 돋우어 기를 모은다. 잠들지 않고 자식을 지킨다. 멀리서 멀리서 훈김으로 날아가 품어서 재운다. 어머니는 갯가에서 가슴을 태워 불을 지핀다. 잠들지 않고 자식을 비춘다. 멀리서 온기로 퍼져가 감싸서 재운다.

 

자식은 그 정성으로 무탈한 아침을 맞는다. 줄을 타고 달려온 울림소리에 잠을 깬다. 아비도 전화를 하고, 어미도 전화를 한다. 그렇게도 소중한 끈이 있어 허물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 끈으로 따로 멀리 사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합방을 하고 있다. 그래서 어머니는 가슴 저미는 꽃물이야기를 아버지에게 보여드리지 못했다. 조금은 어리석한 추억들을 간밤에 써 두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사내가 여인을 만나 동침을 하게 되면 상상의 꽃빛깔에서 해방이 된다. 막연히 떨리던 아녀자의 숨은 일을 경이롭게 대접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꽃물이 제 때에 기척을 해야 하고 그 고운 홍색이 밝아야한다는 것을 습득하게 된다. 잉태라는 목적과 직결되고 분신이나 다름없는 여인의 안녕과 필수 관계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함께 산다는 것은 아련히 그리운 추억조차도 무디게 한다. 그러므로 어머니께서는 섭섭한 이별의 아쉬움을 딱히 다르게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오로지 그 밤에 아버지 차돌의 품에서 잠들고 싶었다. 마음 가득히 간절함만 애달팠다. 어머니께서 여인이었다는 원초적 증거를 영원히 상실해야만 하는 아낙의 슬픔이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자신이 남편 차돌에게 취해서 살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사무치게 사랑이 그리웠다.

 

어머니 꽃님은 아버지 차돌에게 어떤 지어미였을까?

그날 밤의 독백을 외간으로 보냈다고 해서 아내로서의 도리를 벗어났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아버지께서 받았다고 하더라도 읽어줄 남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꽃님이 권하는 사랑고백 조차 무심하였던 사람이다. 자네 마음이 내 마음이네 라는 만족스런 미소로 겉봉만 만지작거렸을 것이다.   

어머니는 아버지 차돌이 읽어주지 않는 자네 마음이 내 마음인 것들을 포장하기 시작했다. 황갈색 쌀 포대를 잘라 크기에 맞는 봉투를 만들었다. 풀기도 마르지 않은 찐득한 봉투에 주소를 적었다. 수술 날이 다가 오기 전에 우표를 붙여야한다. 수술결과가 어떻든지 간에 인구의 절반인 여성의 첫 경험을 전해드리고 싶은 분이 있었다. 지구의 모든 인간은 그 절반의 여성에게서 출산되어진다. 남자라고 해서 여성의 자궁을 거치지 않고 얻어진 생명은 없다. 하늘과 땅과 바다의 거의 모든 동식물들도 암컷을 통해 육신을 취하게 된다. 그 기척이 되는 꽃물의 의미는 생명을 허락할 수 있는 푯말인 것이다. 

 

사회가 발달하고 간편한 세상이 왔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여인이 되어가는 과정은 인류의 변천만큼이나 다르게 격어 왔을 것이다. 사람의 각기 다른 얼굴만큼 많은 사연을 간직한 채 생명은 이어왔고 이어갈 것이다. 동물적 번식만 했던 시절에도 꽃물은 있었고, 광목천을 끊어서 삶은 빨래를 해야 할 때도 꽃물은 있었으며, 모든 매체가 1회용 생리대를 돈벌이의 목표로 삼는 지금도 꽃물은 있다. 아마도 기계인간의 착상을 도와야 하는 미래과학의 태반도 꽃물의 역할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 홍색 고운 첫 경험에 대하여 소감이 허락된 경우는 없었다.

여인은 여인대로 여성이라면 누구나 격은 사실에 대하여 신비감을 부여하지 않았다. 사내는 사내대로 여인의 음밀한 사실에 대하여 모르는 체하고 살아왔다. 그러는 동안에 잉태된 태아조차 거부하는 시대가 오고야 말았다. 사회는 목숨보다 우선적인 변화를 허락했고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사는지 돌아보지 않았다. 모성이 물욕에 밀리는 형질의 변화는 성역을 지키는 사명이 둔화되고 여인은 수술대 위에 누워야 한다. 꽃물의 의미를 가르치지 않았고 배우지 못했을 때에도 자손만은 강건했었는데......

 

그러나 인류는 스스로 성감이라는 쾌락과 생명이라는 출산의 이중적 선택권을 쥐고 있다. 한편에서는 쾌락이라는 결과물을 삭제시키겠다고 낙태를 자행하고, 한편에서는 출산이라는 결과물을 얻어 보겠다고 온기 없는 시험관에서 교배가 이루어진다. 모두가 생명이라는 창조의 영역을 인간이 넘볼 수 있게 된 습득임에는 분명하다. 그렇다면 목숨의 생사가 사람의 뜻으로 좌우될 수 없었던 문맹의 시절 보다 인류는 지금 만족한가?

소유가 가능하고 자유가 지배하는 환락은 생명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쉽게 정을 품고 너무나 쉽게 정을 놓는다. 재활용 신문지로도 감싸지지 못한 벌거숭이 상품은 자유다. 그 자유는 적혈구속의 기억장치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자궁조차 존속의 유전을 거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환경은 성역을 위태롭게 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꽃물이 죽었다.                   

 

그 편지를 받으시는 분께서 당혹스러울 것이라는 것도 어머니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수없이 많게 살다간 여인 중에 티끌만도 못한 점 하나의 여정이었을 뿐이지만 수술대 위에 오르는 자궁의 부음을 알리는 우편물이었다. 어쩌면 여인의 마지막 심정을 털어 놓고 싶었을 것이다. 그 편지가 아버지에게 보여 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어머니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버지 차돌이 일언반구의 여지도 어머니 꽃님에게 묻지 않았다. 어머니께서 옮겨 적은 똑같은 편지 한 통이 도착한 곳을 아버지는 알고 있었다. 그분은 어머니의 종교와 같은 분이라고 인정하시는 것 같았다.

꽃물이라는 빛바랜 편지를 읽어드리겠다고 했을 때에도 아버지는 거절하셨다. 어머니께서 그 모습을 보았을 때는 안타까움이 앞서실 거라고 생각했다. 어머니 꽃님에게도 여자라는 소박한 바람이 먼저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본심은 흔적조차 섭섭하지 않았다. 네 아빠마음이 엄마마음이다 라고 아버지 차돌을 변호하고 계셨다.

 

나는 어머니 꽃님의 편지에서 아버지 차돌에게만 허락하신 여인의 순결을 고스란히 부러워했다. 마음으로 그것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아버지 차돌이었다. 흐르는 눈물을 닦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살아가야할 본질이었다.

어머니는 카레라이스를 드시지 않는다.

ㅡ끝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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