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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의 씨를 뿌리신 성 토마스 (1/28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사제 학자 기념일)
작성자이현철 쪽지 캡슐 작성일2005-01-27 조회수1,118 추천수3 반대(0) 신고
 

                 복음의 씨를 뿌리신 성 토마스

                         (1/28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사제 학자 기념일)


  십자가를 안테나로!

  저는 편입하여 신학대학을 다닐 때 철학과 신학이 너무 어려워 남몰래 신학교 성당에 가서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사제시여, 저의 돌퓨터를 당신과 같은 명석한 머리로 업그레이드 시켜주소서!”라고 기도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하느님에 대해 설명을 잘 해놓았다는 성 토마스의 신학대전등의 신학서도 저에겐 역시 어려운 책이더군요.^^* 아무튼 ‘신학을 조금 공부했다고 하느님에 대해 다 안다고 떠드는 것은 마치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퍼담으면서 바다에 대해 안다고 떠드는 어린이와 같다’고 한 토마스 성인의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에 관한 깊은 묵상과 관상으로 쓰여진 성 토마스의 신학서들이 마치 겨자씨와 같은 좋은 복음의 씨가 되어 가톨릭 사상과 신학의 발전이라는 많은 열매를 지금도 맺고 있음을 진심으로 기뻐하면서 박상대신부님이 작년에 올리신 토마스 성인에 관한 자료와 복음묵상글을 참고로 퍼드립니다. 가브리엘통신


▣ 성 토마스 데 아퀴노 (1225-1274) 사제 학자


  토마스는 1225년 이탈리아의 아퀴노 가문이 소유한 로카세카 성(城)에서 태어났다. 그는 5살에 이미 ’하느님께 봉헌된 아이’로 삼촌이 원장으로 있던 몬테카씨노의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1239년 14살에 나폴리에서 공부를 계속하였고 이곳에서 도미니코 수도회를 알게 된다. 토마스가 1243년 18살의 나이로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자 이를 반대하던 가족들에게 붙잡혀 로카세카 성에 감금되었다. 토마스의 의지를 꺾으려는 가족들의 온갖 술수도 그를 이겨내지 못하였다. 1244년 감금에서 풀려난 토마스는 1248년까지 볼로냐, 파리를 다니며 공부하였고, 마지막에는 쾰른에 거주하며 대(大) 알베르토(1193-1280) 성인의 문하생으로 수학하였다. 1252년부터 토마스는 스스로 철학과 신학교수로 파리와 로마와 바티칸에서 강의하였다. 이 때 토마스의 대표작 <신학대전>과 <대이교도대전>이 저술된다. 전자(前者)는 오늘날까지도 신학의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으며, 후자(後者)에는 ’예지(叡智)의 탐구’를 권두로 아랍문화권의 철학사상이 깊이 있게 다루어져 있다. 교황 그레고리오 10세(1271-1276)의 부름을 받고 제2차 리용공의회(1274)에 참석하러 가던 도중 포싸누오바의 시토 수도원에서 성인은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어떤 직책도 마다했던 성인에게 교황은 움브리아의 주교직분을 수여했다. 토마스는 1323년 시성되었고, 1369년 1월 28일 성인의 유해는 프랑스의 툴루즈에 안치되었다. 성인은 모든 신학대학의 수호성인이다.


  토마스 성인은 모든 세기를 초월한 최고의 그리스도교 신학자이다. 그는 자신의 모든 노력을 신앙과 이성, 철학과 신학의 일치에 기울였다. 그는 유리같이 맑고 명확한 사고를 가졌고, 첨예한 분석력과 동시에 경건하고 겸손한 신앙의 마음을 가진 자였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토마스 성인을 태양과 별과 보석에 비겨 표현한다. 영의 빛으로 교회를 밝히라는 뜻이다. 바티칸 박물관에는 1423년 무명작가의 작품 ’십자가 앞에 꿇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소장되어 있다. 이 작품에 얽힌 전설에 의하면 토마스가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한다. 하느님께서 토마스에게 "너는 나에 관하여 글을 참으로 잘 썼다. 그 대가로 무엇을 바라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토마스는 "주님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당신뿐이옵니다. 제가 글로 쓴 것이란 그저 책더미에 불과합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토마스는 스콜라철학과 신학의 대부로 통한다. 토마스의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 철학을 떠나서는 논할 수 없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않고, 아우구스티누스와 안셀무스를 거쳐서 형성된 그리스도교 철학과 신학을 독창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하느님에 관한 자신의 모든 지식을 교회를 위해 교육적이고 조직적으로 정립하였다. 그러면서도 세속적인 문제와 많은 종교와 문화의 맥락을 수용하였고, 비신자와 다른 종교의 생각들에도 관용을 보였다. 교회를 지도하는데 권위만이 다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진취적인 논증과 사유를 토대로 한 조직적 사고이다. 토마스는 듣고, 실험하며, 수용하고, 버릴 줄 아는 자주적 사고의 소유자였고, 끊임없는 예지의 탐구자였다.


                                       <뿌려진 복음의 씨앗>


   마르코복음 4장에는 네 가지의 비유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3-9절), ’등불의 비유’(21-25절), ’자라나는 씨의 비유’(26-29절), 그리고 ’겨자씨의 비유’(30-32절)이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우선 예수께서 비유를 말씀하신 장소(1-2절), 비유 자체의 내용(3-9절),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10-12절), 그리고 비유의 설명(13-20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씨부리는 사람의 비유도 그렇지만 다른 세 가지의 비유들도 그 핵심적인 주제는 모두 ’하느님나라의 신비(神秘)’에 관한 것이다. 복음 전체의 내용은 쉽게 알아들을 수 있으나 몇 가지 요점을 짚어보도록 하겠다.


   우선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장소가 가파르나움의 집에서 갈릴래아 호숫가로 옮겨갔다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지금까지 예수께서는 회당이나 집에서 가르치셨다. 그럴 때마다 많은 군중이 모여들었고 더러는 밖에서 말씀을 들어야 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제 예수께 더 큰 장소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모여든 군중은 호숫가에 서있고 예수께서는 배에 올라가 앉으셨다는 설명은 분명히 예수께서 ’가르치는 선생’의 모습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자리에 앉아서 가르침을 내리던 유대교 율법교사, 즉 랍비(rabbi)들처럼 예수께서도 이제는 당대의 군중에게 비유의 모양으로 가르침을 내리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선생’으로 자리를 굳혀 가시는 것이다.


   다음은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알아보자.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비유설교의 주제는 거의 모두가 하느님나라의 신비에 관한 것이라고 했다. 신비(神秘, mysterium)란 인간의 이성적 이론(理論)과 인식(認識)을 초월하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하고 영묘한 비밀을 일컫는 말이다. 쉽게 말해서 신비는 인간의 이성이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에 인간의 어떤 말과 지식으로도 하느님나라를 깨우칠 수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하느님나라의 신비를 밝히는데 비유를 사용하시려는 것이다. 물론 비유(比喩)도 인간의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비유로 표현되는 본래의 뜻을 꿰뚫을 수 있는 지혜가 있다면 비유는 그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오늘 복음에서 그 지혜는 ’알아들을 귀’(9절)를 말한다.


  예수께서는 알아들을 귀를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를 구별하여 귀를 가졌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따로 모아(10절) 비유의 의미를 설명해 주신다. 이는 마치 정규수업을 마치고 12제자들과 특별히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따로 모아 과외수업을 행하는 것과도 같은 느낌이다. 아마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 그렇게 하셨는지도 모른다. 씨는 잘 갈아엎은 밭에 뿌려져야 하는 것이 원칙이나 이스라엘의 척박한 땅을 생각한다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상당히 일리가 있다. 이는 복음이 선포되는 환경을 말한다. 정확히 말하면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조건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느님나라에 관한 복음의 말씀이 항상 좋은 조건에 뿌려진다는 보장은 없다.


   따라서 이 비유는 이미 예수님의 부활 이후 초대교회의 복음선포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다. 사람들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늘 사탄의 간악한 유혹에 노출되어 있고, 온갖 환난과 박해, 세상걱정과 재물의 유혹이나 그 밖의 욕심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곳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은 기대치의 열매를 가져올 수 없다. 그러나 좋은 조건, 즉 알아들을 귀가 있는 마음에 뿌려진 씨앗은 그 씨앗이 담고 있는 모든 능력을 발휘하여 백 배 이상의 열매를 가져오는 것이다. 하나의 낟알이 뿌려져 100개의 낟알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분명히 과장된 표현이다. 그만큼 과장되었기에 하나의 복음의 씨앗이 가져오는 효과는 엄청나다는 것이다. 복음의 씨앗은 다름 아닌 하느님나라에 관한 복음의 씨앗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씨앗의 주체는 이 씨앗이 열매를 맺음으로써 이루어지는 하느님나라의 주인이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능력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아니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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