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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60) 잘려나간 그림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5-02-01 조회수921 추천수5 반대(0) 신고

2005년2월1일 연중 제4주간 화요일 ㅡ히브리서12,1-4;마르코5,21-43ㅡ

 

               잘려나간 그림

                                 이순의

 

 

나에게는 혼자서도 심심하지 않는 좋은 놀이들이 있다. 어려서부터 병약했으니 혼자서도 심심하지 않고 시간 때우는 법을 잘 터득하고 살아야 했을 것이다. 그중에서 좋은 글을 읽으면 그 글을 꾸며주는 것이다. 내가 쓴 글에도 꾸미지만 남의 글에도 꾸며주고 싶어진다. 그런 습관이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는 대단히 큰 몫을 차지 했다.

 

좁은 단칸이라도 늘 벽에 그림을 꾸며주었고, 아이랑 놀을 때는 그저 심심하지 않았다. 지금은 아이가 다 자라서 그런데 관심도 없지만 나도 무디어져버렸다. 그러나 A4지에 예쁜 시를 써서 꾸미는 것은 아직도 연속선상에 있다. 고운글을 써 놓고 색연필로 글에 맞게 그려둔다. 간혹 꺼내보다가 누군가에게 보내기도 하고 주기도 한다.

 

나이가 40중반을 넘었지만 아직도 그런 습관은 나 홀로 기쁨이다. 가끔은 애들이냐고 핀잔을 듣기도 하지만 고운글을 보고 그 글을 예쁘게 장식해 주고 싶은 마음은 나의 무딘 감성들을 되돌려주는 아름다운 도구가 된다. 잘 그리지 않아도 된다. 멋지지 않아도 된다. 그냥 소품으로 이미지 몇 조각을 삽입시키고 글을 보면 왜 그렇게 멋이 느껴지는지?!

 

명품을 만들자고 그리는 그림이 아니라서 쉽게 타인을 주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나의 정성이 부족한 것은 더욱 아니다. 그림을 그릴 때는 그 글에 내 마음에서 오는 영감을 동원해서 그리므로 아무리 하찮아도 아까운 마음이 있다. 그래서 또 아무나 주기가 싫어진다. 졸작이어도 내 마음을 주고 싶은 사람에게만 준다. 작은 소픔으로 별 하나를 그리더라도, 꽃 한 송이를 그리더라도 내 정성을 내가 아까워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젠가 그렇게 그려드린 그림이 싹둑 잘려 나가고 모든 여백조차 잘려나가고 글씨만 달랑 남은 조각을 발견했었다. 그 그림은 시를 쓰고 귀퉁이에 소품 하나 달랑 그린 그림이 아니었다. A4지 전체에 그림을 그렸었다. 분위기를 맞추려고 글씨 사이 사이에도 색을 칠하여 마음을 담았었다. 그 시를 보는 순간 한 눈에 반했기 때문이다.

 

한 눈에 반했던 시를 배껴서 집에왔다. 그리고 인터넷이 되지 않았던 헌 컴퓨터에서 예쁜 글씨체를 골라 프린터를 하고, 정성을 쏟아 스케치를 했다. 지웠다가 그렸다가를 반복하였다. A4지 가득 이미지를 스케치 하고 글씨를 가리지 않을 만큼의 톤을 낮추어 색연필로 색칠을 했다. 읽고 또 읽고, 보고 또 보고, 내 마음으로 크나큰 만족이었다. 그리고 그 시를 드리고 싶은 분에게 정성과 마음을 함께 드렸다. 고운 시를 예쁜그림에 담아서 드린 것이다.

 

그리고 겨우 몇 일이 흘렀다. 한 주일도 아닌 겨우 몇 일! 

 

그분의 부탁이 있었다. 그분의 가방 속에 있는 수첩을 보고 전화번호를 좀 불러주시라는...... 본의 아니게 수첩을 들춰 보아야했다. 정말로 본의 아니게 수첩을 들춰 보아야했다. 그런데 수첩 속에는 가위질 당한 시만 있었다. 그것도 사각으로 반듯하게 오려서 수첩에 넣은 것이 아니었다. 인쇄된 글자의 머리와 꼬리를 따라서 지그재그로 잘려서 연약하디 연약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글줄 사이사이에 겨우 남은 색연필 자국들이 미운 더부살이처럼 붙어있었다. 너무 슬펐다. 슬픔보다 더 비통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아름다운 시에 반해서 마음이라는 그릇에 담아 드리고 싶었는데.....! 그렇게 너덜너덜 해져버린 시는 그분의 친구 시인이 토해놓은 가슴이었다. 스케치를 했던 내 자신이 가위 끝에서 도막도막 잘려나간 느낌이었다. 아! 사람의 마음은 이런 것이구나! 내가 좋다고 남도 좋아하는게 아니구나!

 

더구나 아이의 심성에서 멀어져간 어른들에게는 그렇게 알록달록한 그릇에 담긴 시가 싸구려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 것이구나! 그날 밤에 나는 많이 많이 섭섭한 마음을 울었다. 철부지 어린시절에 내 손으로 바느질을 해서 만든 오모자를 잃었을 때처럼 울었다.(나 어렸을 적에 어머니는 인형을 오모자라고 했습니다.) 색색의 고운 천은 없었지만 헌 이불호청을 잘라서 손바느질을 했다. 어린 마음에 인형을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귀한 목화솜을 넣으면 꾸지람을 들을까 봐서 돼지가 먹는 보드란 누까(=쌀겨) 를 넣어서 만들었다. 몸통에도 팔에도 다리에도 그리고 머리에도 빵빵히 넣어서 연결지어 꼬맸다. 연필로 눈도 그리고 코도 그리고 입도 그렸다. 그런데 어머니는 간밤에 꿈자리가 사나웠다고, 아이를 업고 다니는 꿈을 꾸었다고, 뒷집의 탱자나무 울타리 넘어로 던져 버린 것이다. 사흘도 놀아보지 못하고 내 오모자는 탱자나무 울타리 속에 누워있었다.

 

그 오모자를 보러 탱자나무 울타리 밑에 자주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빗자루 귀신 몽달 귀신이 밤마다 싸운다는 탱자나무 밑을 무서워했는데 그 오모자 때문에 가서 앉아 있을 수 있었다. 간밤에 빗자루 귀신이랑 몽달 귀신이 싸울 때 오모자 혼자서 얼마나 무서웠는지 들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에 내 오모자는 자취도 없었다.빗자루 귀신하고 몽달 귀신이 탱자나무 가시를 비집고 버려진 내 오모자를 가져갔나 보다.

 

그날 처럼 울었다. 마흔 살도 훨씬 더 먹은 아지매가 그날 처럼 울었다. 그렇게 예쁜 시를 담은 내 보잘 것 없는 마음이라는 그릇을 그분은 받은 즉시 싹둑싹둑 잘라버린 것이다. 그후로 예쁜글을 보아도 그릇을 만들지 않았다. 만들기 싫었다. 누군가에게 주기는 더욱 싫었다. 그런데 주님의 기척이 나를 끌어들이고 있다. 하혈하는 여인이 주님의 기척만 느껴도 나을 것 같은 믿음으로 살아 났듯이 나에게 주님의 기척이 새롭고 다르게 느껴진 것이다.

 

나의 칩거를 칩거이지 않게 해 주는 공간을 만났다. 믿음은 나의 몫이며, 옷자락을 잡아야 하는 노력의 몫이도 나의 것이다. 이곳에도 주님이 계시며 나의 묵은 하혈병을 극복하게 해 주시리라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다시 예쁜 글에 마음이라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컴퓨터로는 그림을 그릴 줄을 모르지만 역시 프린터를 하고 손으로 색칠을 한다. 색연필로도 칠하고, 물감으로도 칠하고, 파스텔로도 칠하며, 예쁜 그릇을 만든다. 모든 것은 내 자신에게 달려있다.

 

행방을 알 수 없는 오모자의 아픔을 되풀이 하지 않을 것이다. 탱자나무 가시에 찔리더라도 꺼내 올 것이고, 엄마를 졸라서 마당이라도 뒹굴며 꺼내달라고 떼장을 놓을 것이다. 찢을 사람은 찢으라하고, 자를 사람은 자르라 하고, 그래도 나는 좋은 시를 보면 한 눈에 반할 것이고, 예쁜 그릇을 만들고 싶을 것이다. 내가 근심하지 않고 즐겁기 위해서라도 예쁜그림에 좋은 글을 담을 것이다. 보내드린 선물을 한 달이라도, 한 주간만이라도, 아니면 단 하루 해라도 간직해 주신다면 매우 몹시 엄청 감사 드리고!

 

그것이 이곳에서 주님의 치마자락을 다시 잡은 나의 기적이다.

내 자신을 위해서 하혈병을 치료할 것이다.

 

ㅡ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고 "탈리다 쿰." 하고 말씀 하셨다. 이 말은 '소녀야, 어서 일어나거라.' 라는 뜻이다.마르코5,41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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