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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61) 자네 방 빼게.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5-02-02 조회수1,054 추천수4 반대(0) 신고

2005년2월2일 수요일 주님 봉헌 축일(봉헌 생활의 날)ㅡ말라기3,1-4;루가2,22-40ㅡ

 

                 자네 방 빼게.

                                    이순의

 

 

어느집이나 겨울 한 철의 방학은 아이들과의 실랑이로 얼룩무늬를 그리느라고 정신이 혼미할 지경일 것이다. 방학이라고 늦잠을 자고 싶은 아이들과 깨우는 엄마! 집에 있으니 한없이 먹으려고만하는 아이들과 힘에 부친 엄마! 게임에 넋을 놓는 아이들과 하루면 열두 번도 더 컴퓨터를 깨부수는 마음의 짐을 달래는 엄마! 시간 맞춰서 학원에 보내려는 엄마와 어떻게든 땡땡이 치고 싶은 아이! 뭐 이루 셀 수도 없는 자자분한 사건들 속에서 하루하루가 밝고 저무를 것이다.

 

내 집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아이 하나로 뭘 그렇게 엄살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워낙에 어려서 부터 자유를 신조로 키워버린 탓에 망나니가 따로 없는게 내 자식이다. 방학이라고 해도 시간을 다투어 공부를 시켜 본적이 없었으니 당연히 방학이라고 마음의 짐을지고 공부를 해 본적이 없는 놈이 내 자식이다. 그런데 예비 고3이 되었다고 일찍도 아닌 일찍이라고 아침에 일어난다는 사실이 불평이다. 그래도 때가 되어서인지 일찍도 아닌 자칭 일찍이라는 아침에 꾸역꾸역 걸어 나가는 것을 보면서 곧 새벽 출근에 목숨을 걸어야할 머지 않은 자식의 인생을 본다. 

 

<이놈아 살아봐라. 지금보다 더 행복한 날이 또 있나 봐라. 이놈아!> 

덜 깬 의식으로 현관을 나서는 자식의 뒤통수에 마음의 위로를 던져본다. 부모가 돈 주지, 부모가 깨워주지, 부모가 다스려주지, 사랑조차도 줄데는 없고 받기만 하면 되는 마지막 시절이 아닌가 하여 눈꼴이 시려도 엉덩이 토닥거리며 <차조심해서 다녀오라.>고 배웅을 한다. 그런데 여러날 전부터 은근한 신경전을 하고 있다. 이런 신경전은 가끔하는 년중 행사이다. 그런것으로 다툰적은 없지만 미묘한 갈등이 장착된 신경전이다.

 

치약이 등 가죽하고 배 가죽이 붙어서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야 할 때쯤이면 어김없이 새 치약 하나가 선반 위에서 내려와 있다. 삐쩍 마른 치약도 꼭꼭 짜서 쓰면 많지도 않은 식구에 한 달은 쓸 수 있는데 그게 귀찮아서 새 치약이 출타를 한 것이다. 그럼 치약통에서 새 치약을 꺼내서 다시 선반 위에 올려 놓는다. 그리고 치약통에는 앞뒤가죽이 착 붙어서 꾸부정한 치약을 억지로 세워 놓는다. 몇 일은 무사히 지나간다. 손가락에 힘을 더 세게 주어야 되면 또 새 치약이 선반위에서 내려와 치약통에 있다. 헌 치약의 행방은 없다. 그렇다고 포기할 엄마가 아니다.

 

쓰레기통을 뒤져서 찾아낸다. 물로 목욕을 시키고 꼬리에서부터 치약을 짜서 머리쪽으로 모아 놓는다. 그리고 새 치약은 다시 선반위에 올려 놓는다. 몰린 치약 탓인지 아주 짧은 몇 일은 조용하게 쓴다. 그리고 다시 새 치약은 선반에서 내려온다. 이쯤 되면 묵비권으로 그냥 바꿔 놓는다고 될일이 아니다. 몰아서 모아질 치약이 없으므로 반드시 비틀고 오므리고 눌러서 짜야 치약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도 엄마는 묵묵히 시도한다. 새 치약의 자리는 아직 선반이로소이다. 최대한으로 밀고 누르고 접어서 치약을 모으는 노력을 해 놓았지만 그 치약은 반드시 손가락에 기운을 쏟아야만 나올 수 있다. 다음날!

 

"엄마. 치약이 안나오는데 왜 자꾸 올려놓아요? 제발 그러지 좀 말아요."

아들의 퉁명스런 불평이 들려온다. 갑자기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말을 해서 남은 치약을 짜게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망각하지는 않았는데 갑자기 쓸 수 없게 된 말 때문에 세상에 언어가 고갈된 상태로 전환하고 있었다. 그럴때 마다 사용했던 말이 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사용했던 말! 아들도 못 이기는 척하고 들어주었던 말! 그 말을 쓸 수 없게 되었으니 오랜 습관 탓인지 대체 언어가 생각이 나지를 않는다. 그 말을 대신해서 무슨 말로 아들의 과소비(?)를 차단할 것인가?

 

"자네 방 빼게! 하신다."

이 말은 아주 어려서부터 신학교에 꿈이 있었던 우리 모자의 필수 언어였다. 아들의 행동이 바르지 않거나 달리 심하게 야단을 치지 않고 해결해야 할 지적이 필요할 때면 수시로 사용되었고, 그래도 가벼운 약발은 작용했던 서로간의 상용언어였다. 이 말의 근원은 어느 신부님께서 신학교에 갔는데 지도신부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서 불려갔더니 "자네 방 빼고 싶나? 자네 방 빼게."라고 꾸중을 들었다는 말씀에서 얻어 온 말이다. 나는 아들의 생활습관이 나쁠 때 이 말을 주로 사용해 왔다.

 

"너 삼일만에 방 빼게 소리 듣고 싶어?"

치약을 끝까지 짜서 쓰지 않는다고 회초리를 들 수 없을 때, 얼굴 닦는 수건을 매번 저만 새것으로 쓸 때, 양말 뒤집어서 던져 놓았을 때, 바지 벗어서 눈깔 둘 달린 안경 만들어 놓고 몸만 빠져 나갔을 때, 책상 위에 책이 쌓여져 더 이상은 무게에 눌려 압사 당하기 일보 직전일 때, 양치질을 하기 싫어서 그냥 자려고 할 때, 물건을 아껴쓰지 않았을 때, 용돈을 주었는데 다음번 용돈타기 훨씬 전에 갑자기 다 써버렸을 때, 집에 먹을 것이 있는데 먹고 싶은 다른 것을 사달라고 조를 때, 무서운 영화나 책을 보고 몇 일동안 엄마곁에서 꼼짝을 하지 않을 때, 목욕은 자주하는데 때는 밀지 않을 때.....

 

수도 없이 자자분한 일상 안에서 적소에 쓰여진 말이었다. 그 말에 대하여 거부하지도 않았고 부정하지도 않았다. 엄마가 <자네 방 빼게!>라고 뱉으면 거의 대부분 그 행동이 일시정지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날은 진짜로 하기 싫은 날이다. <엄마니까 안해. 신학교 가면 쫒겨나기도 싫고, 또 엄마도 없으니까 다 잘 해요.>라고 거절하는 날은 정말로 하기 싫은 날이었다.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날은 손가락에 힘을 주어서 치약을 짲고, 양말은 빨래통에 담았으며, 바지에는 눈깔 두 개를 만들지 않았다.

 

그런데 몇 일전에 새 치약을 선반에 올리지 말라는 아들의 소리를 듣고 습관처럼 뱉어지려는 말을 목구멍 속에 가두어 삼켜야만 했다.

<자네 방 빼게!> 꿀꺽!

오늘은 주님의 봉헌 축일이다. 2월4일은 내 아들의 유아세례축일이다. 그래서 매년 봉헌 축일이면 아들의 세례를 감사드리고 초 봉헌에 마음을 더 심곤 했었다. 그런데 올해는 초봉헌도 망각하다가 어제 오후에 급하게 강추위를 뚫고 가서야 겨우 초봉헌을 마쳤다.

 

변해가는 내 마음을 들여다보며 착잡한 마음으로 돌아서는데 만남의 방에서 자매님 둘이 자판기 청소를 하고 있었다. 빈첸시오에서 운영하는 자판기는 그 수입을 불우이웃을 돕는데 큰 효자노릇을 하고 있다. 올해 최고의 강추위를 뚫고 오신 그분들의 목적은 자판기 청소였다. 아우되시는 자매가 예전처럼 열심한 형님인줄 알고 이것저것 안부를 물었다. 나는 그 자매의 기억에 단 한 가지도 긍정되는 답을 고르지 못했다. 나는 더 이상 열심인 신자가 아니었다. 방은 내가 빼버린 것이었다.

 

아들은 신학교를 가지 않기로 했으니 방을 빼기는 커녕 들어갈 일도 없게 되었다. 그런데 그 방을 빼버린 사람이 왜 나라고 생각되는지 모를 일이었다. 자꾸만 자꾸만 그 방을 뺀 사람은 나였다. 나도 진짜 열심한 신자였는데......!  강추위를 뚫고 성당에 오셔서 찬 걸레를 들고 불우이웃 돕기의 효자 자판기 청소를 하시는 자매님들을 보며 후회가 앞섰다. 돈 몇 푼 들고 봉헌했다고, 제대에 초 밝힌다고 그것이 참다운 봉헌일 것인가? 뜨뜻한 구들에 앉아 집안 일이나 봉헌하고 말았어야 했다. 

 

"차라리 성당에 오지 말걸! '자네 방 빼게'를 대체할 말이나 생각할 걸!" 

 

ㅡ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루가2,35ㄱ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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