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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63) 해피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5-02-04 조회수1,109 추천수4 반대(0) 신고

2005년2월4일 연중 제4주간 금요일 ㅡ히브리서13,1-8;마르코6,14-29ㅡ

 

          해피

                   이순의

 

 

오늘의 말씀은 목이 잘려서 비명행사하신 요한의 죽음을 알리는 비통함을 전하고 있다. 그 죽음의 결과가 주는 성서적 메세지는 잉태부터 그리스도 예수의 길을 닦으러 오신 종복의 모습을 마지막까지 장식하고 있다. 요한은 모친 엘리사벳의 태중에서 마리아의 태중아기를 알아보고 기뻐 뛰놀았으며, 광야에서 외치는 자가 광야에서 기적을 베푸실 분의 길을 닦았고, 물로 세례를 베푸는 자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을 예비 하였으며, 목이 잘려 죽은 자가 십자가에서 갈기갈기 찢어져 죽을 자의 길을 앞서 가신 것이다. 곧 주님의 고통이 시작되는 사순절을 맞는다. 복음은 먼저 가야할 요한의 행적을 결론짓고 있다.

 

복음을 읽고 묵상을 하며 생각을 해 보았다. 누군가 내 목을 자르려고 했던 사람은 없었는가? 그런데 누군가 내 목을 자르려고 했다면 지금 나는 요한의 곁에서 하늘나라의 맛을 즐기고 있을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 목을 노린자는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내가 누군가의 목을 노린적은 없었는지 생각을 해 보았다. 실로 심오한 묵상에 접어들었다. 그런데? 헉? 으헉!  복음의 내용과는 좀 상이할지라도 나는 목 뿐만 아니라 몸통도 잘라서 삼킨적이 있었다.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씩이나 사랑하는, 너무나 사랑했던..... 목만 자른 것이 아니라...... 얼마나 얼마나 울어야 했었던!

 

내가 살던 친가에서는 늘 항상 언제나 개를 키웠다. 작게는 한두 마리에서 많게는 너댓 마리까지 항상 개를 키웠다. 물론 개만 키운 것은 아니다. 고양이도 키우고 닭이며 오리 돼지들, 시골집의 평범함은 늘 동물들과 일상을 같이 하는 풍경이었다. 나는 건강상의 이유로 중학교를 4년을 다녀야 했다. 학교를 휴학하고 마을 뒤 동산에 산책을 가곤 했었다. 그럴때 마다 털이 보송한 작은 땅개종인 <해피>랑 동행을 했다. 동행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데 내가 뒷동산에 오르면 언제 따라온지도 모르게 앞서고 있었다. 그래서 해피는 나의 산동무였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도시로 고등학교에 갔다. 해피는 당연히 따라갈 수 없었다. 토요일이면 엄마를 보러 집에 가곤 했는데 늘 바쁘셔서 엄마랑 같이 지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해피랑 또 다른 잡견종 개들하고 놀다가 마는 게 나의 일과였다. 해피에게도 세월은 이길 수가 없었을까? 언제부터인지 시골집에 가면 해피는 나를 반겨주지 않았다. 마루 밑에서 꼬리만 몇 번 흔들어 주고는 다시 누워있었고, 부엌의 어두운 시렁 밑에서 눈빛만 껌벅거리고 있었다. 그러는 해피를 만저보고 싶어서 생선뼈나 멸치 같은 것을 손에들고 얼러보지만 해피는 그것만 먹고 다시 들어가 버렸다.

 

그래도 다른 개들은 힘없는 해피에게 설설 기었었다. 내 손의 맛있는 음식을 얻어먹으려고 온갖 아양을 떨던 젊고 힘센 개들도 해피가 '으르렁' 하고 소리 한 번만 내면 그 소리가 크지 않아도 꼬리를 내리고 뒤로 물러섰기 때문이다. 그만큼 해피는 우리집 개들 뿐만 아니라 마을의 개들 중에서도 지존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해피를 보지 못하고 돌아가야했다. 엄마한테 해피가 어디에 있느냐고 여쭈면 '암내 맡아서 안들어온다'고 말씀 하셨다. 실제로 개들은 암내를 맡아서 그 암캐를 차지하려면 여러 날을 집에 들어오지 않고 마을의 숫캐들과 지존자리를 놓고 싸운다. 그리고 이긴자는 그 암캐를 지키느라고 귀가하지 않았다. 정말로 그런 줄 알았다.

 

당시에 나는 독한 약을 많이 복용 했으므로 위에 부담을 느껴야만 했다. 그래서 목으로 넘머가는 음식과 토하는 음식이 반반이었다. 의사선생님께서는 늘 고단백의 음식을 처방해 주셨지만 함께 자취를 하던 작은언니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주말에  작은언니가 혼자서만 집에 다녀왔다. 그리고 구수한 불미나리 된장국을 걸죽하게 많이도 끓여왔었다. 마을의 개울에서 자라는 야생 미나리를 엄마가 직접 베어왔다는 것은 작은언니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그 된장국이 진짜로 맛이 있었다. 너무너무 맛있게 잘 먹었다. 그런데....

 

작은언니의 장난기가 발동을 했을까? 작은언니는 간도 보지 않던 된장국을 마지막으로 데워서 상에 놓아주었다. 그리고 실실 웃는 것이다. 안먹고 버리게 될까봐 긴장을 하고 눈치를 보던 마음이 느슨해졌는지 실실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

"맛있냐?"

"응? 맛 있어."

"그 된장국이 무슨 국이었는 줄 아냐?"

"무슨 국인데? 불미나리 된장국 아니야?"

"해피!"

 

마저 남은 한 그릇의 해피국을 먹었는지 못 먹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엄청 울어야했었던 기억은 있다. 나는 매번 그런 속임수로 내 집의 늙은 개들의 죽음을 소화시킨 식견종(食犬種) 인간이어야 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내가 살려고 내가 사랑했던 충견들을 독식한데는 복음서의 의미와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찌되었든지 나는 건강해졌고, 매일 이렇게 많은 분량의 생활묵상을 쓰고 있다. 작게는 세 시간에서 좀더 비중이 실리는 심오를 원할 때는 다섯 시간 이상씩 묵상하고 쓰고 수정하며 일상을 봉헌하고 있다. 내가 생각해도 누가 시켜서는 할 수 없는 에너지다. 그 에너지가 해피를 비롯하여 나의 육신이 되어버린 이름도 알고 정도 알고 모습도 생생히 기억되는 나의 애견들 덕택일 것이다.

 

요한의 목을 잘라버린 살로메의 엄청난 음모와 욕심은 소름이 한땀한땀 바늘이 되어 꽂히지만 요한의 죽음은 2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신앙의 등불이 되어 그리스도의 길을 비추고 있다. 현대 사회는 모두가 예수의 자리는 넘보는데 요한의 자리는 넘보려하지 않는다. 죽더라도 높은자리에서 죽어야하고, 죽더라도 배터지게 가져야하고, 죽더라도 짹은 해야하는 심성의 시대를 살고있다. 내가 누군가의 밑에서 누군가의 길을 닦아주는 훈련을 하려하지 않는다. 분명히 삶이라는 그릇은 하늘이 주신 명운에 달려있는데 요한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의 길만 닦다가 사라져야 하는 겸손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을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가?

 

올해 사순시기는 인류에게 새로운 생명을 살려주신 주님의 고통을 묵상하기도 해야하겠지만 주님의 길을 닦으러 오신 요한의 인생도 깊이 묵상하고 싶다. 나는 과연 누구를 위해 어떤 일을 얼마나 하고 있는가? 잘못 하다가는 내 인생이 해피만큼도 못한 욕심으로 마감지어지지나 않을지 걱정이 된다. 나에게 살로메와 헤로디아 같은 욕심으로 누군가의 목숨을 담보한 마음은 없었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거룩한 복음 묵상중에 살아서는 정을 주고 죽어서는 양분을 준 해피가 생각이 나서 생뚱 맞았지만 그래도 나를 위해 목숨을 송두리째 헌신한 종복에게 감사를 느낀다. 하물며 영육 간의 내 모두를 주관하시는 주님의 사랑과 은총에는 무어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갑자기 멍멍이 개에게 은혜를 비유하려드니 하늘 아버지의 사랑이 어느 만큼인지 가늠이 되지를 않는다. 얼마나 크신지? 얼마나 높으신지? 얼마나 깊으신지?

 

아무리 생활묵상이라지만 별별 영감을 다 동원하시는 주님은 찬미를 받으소서. 아멘! Contenflazione in Azione!

 

ㅡ그 뒤 소식을 들은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그 시체를 거두어다가 장사를 지냈다. 마르코6,29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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