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살면서 무엇을 하였으면 더 좋았나?<2>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5-02-06 조회수949 추천수6 반대(0) 신고

어떤 율사가 예수께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하는가?" 라고 묻자, 율사는 "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몸같이 사랑하라." 고 하였습니다.

 

다시 율사가 "그러면 누가 제 이웃입니까?" 라고 묻자, 예수께서는 그 유명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드십니다.

 

관상한다는 것은 능동적인 행동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사제와 레위와 지나갔던 사람들이 강도를 만나 반쯤 죽게된 사람을 바라본 것은 달랐습니다.

 

그들에게는 강도를 만난 사람이 자기들이 가야 할 길에 방해되는 사람, 장애가 되는 사람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은 여기 쓰러져 있는 사람에게서 고귀한 인간성을 보고 그 사람에게 다가갑니다.

 

이를 더 알려하고 연민에 차서 "무슨 일이 일어났나?" 하고 다가갑니다. 측은한 마음과 연민에 차서 다가갑니다. 이는 뱃속에서 우러나오는,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서 움직여져서 따라가는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루가복음 7장에 나오는 나인의 과부에게 느끼셨던 것과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쓰러져 있는 사람을 참된 인간으로 보았고,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연민의 마음으로 그 사람을 보았고 사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이 사람을 평생 기억해야겠다고 그냥 지나간 것이 아닙니다.

의미 있는 일을 보았다고 일기장에 써 놓아야지 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이야기로 써야겠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것에 대해 어떤 것도 하지 않겠다. 자비와 연민에 찼지만 어떤 봉사도 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사마리아 사람은 가던 길을 멈추었습니다. 상처의 아픔을 낫게 해주는 올리브유를 발라주었습니다. 상처를 싸매주었습니다. 패키지로 된 구급상자를 들고다닌 것도 아니었을 테니까 자기 옷을 튿어서 싸매주었을 것입니다.

 

또한 자기가 떠나면서 돌봄이 지속될 수 있도록 네트워크를 만들어주고 갑니다. 사제가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고, 율사가 법을 논의 하는 사람인 것처럼, 여관 주인은 어떻게 속여서 돈을 더 받아낼것인가? 라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지불하겠다." 고 합니다. 얼마나 속여 먹을까? 탐욕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아주 관대함을 보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들의 비유를 통해서, 바로 95세된 노인들이

 

 "우리가 좀 더 관상적으로 살았어야 하는데... 

 내가 좀 더 모험을 무릅썼어야 하는데...

 내가 좀 더 남겨질 수 있는 그 무엇을 하면서 살았어야 하는데..." 라고 한 것과 일치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너는 누가 쓰러진 사람에게 이웃이 되었다고 생각하는냐?"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그러면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바로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메시지 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좀 더 관상적이 되는 것이 그 길이고 관상적이다라는 것은 기도하는 순간에만 그런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그 순간에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모험을 무릅쓴다는 것이고, 다른 것에 의해 건드려질 수 있게 나의 마음을 연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왕국,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이냐시오 정신에 의하면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창조적으로 살아감으로써 연민에 차서 부드러운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그리스도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보여 주신것과 같이 다른 사람에게 우정을 보여주면서 살아가야겠습니다.

 

관상적인 마음으로 바라보며 살아가면서, 나의 인간성 그 한계내에서 기꺼이 봉사하면서 살아가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나는 할 수 없는데..." 그러한 두려움이 여전히 있을 수 있습니다.

 

인도의 예수회 회원인 안토니 드멜로 신부님이 하신 이야기입니다.

 

한 여인이 현시를 보고 신학자를 찾아갔다.

 

 "예수님이 당신에게 나타나셨습니까?"

 "예."

 "그러면 다음번에 예수님이 당신에게 나타나시면 이것을 물어봐 주십시오.

  '내가 가장 수치스럽게 여겨야 할 죄가 무엇입니까' 라고요."

 "예."

 "예수님이 당신에게 나타나셨습니까?"

 "예."

 "예수님이 당신에게 무어라고 하셨습니까?"

 "예수님이 저에게 말씀하시길, 이미 오래 전에 용서해서 잊어버렸다고 ..."

 

일상생활에서 두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깡그리 잊으시고 유념하시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왕국을 건설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갈라디아서(5, 1)의 말씀과 같이 자유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해방시키셨습니다. 온갖 위대한 이상은 우리에게 짐스러운 것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자유로이 응답해 나가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