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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시작하고 넘어지는 사순시기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5-02-08 조회수1,138 추천수1 반대(0) 신고



시작하고 넘어지는 사순시기

지극한 근심에 짓눌리는 예수….” 가슴을 파고드는 성가가 성당마다 그윽이 울려 퍼지는 사순시기가 계속되고 있다. 재를 머리에 얹는 예절을 거행하면서 ‘세상 모든 것은 한 줌의 재로 돌아가고 마는 것, 이 몸 역시 재로 돌아갈 터이니 덧없는 세상사에 연연하지 말고, 천국이나 그리며 살아가자.’는 철부지 소신학교 시절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았던 다짐들이 그리워지고, ‘사순시기가 되었으니, 술을 끊을까 담배를 끊을까?’ 하는 고민이 계속된다.

“이제 악마와 육체와 세속과의 영적인 투쟁의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용맹정진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의 기쁨을 나눕시다.” 이렇게 강론을 마치면 목소리를 높인 나나 듣는 교우들이나 모두 비장한 결심을 한 병사들처럼 결연한 표정들이다. ‘이 사순시기 동안 이러저러한 악습을 끊으리라. 이러저러한 절제를 하리라. 사순시기를 잘 보내야만 주님의 부활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다.’ 추석 대목을 놓치면 일년 농사를 망치고 마는 과수원 농부의 심정처럼 들떠있는 듯도 하다.

그러나 내 마음 한구석에서 애써 듣고 싶어하지 않는 나지막한 소리가 들리는 것을 나는 안다. ‘올해 사순시기도 그렇게 지나고, 내년 사순시기에도 똑같은 결심을 하고, 똑같이 좌절하고, 똑같이 죄송스런 마음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맞이하고, 그 다음해에도 다시 또 그렇게 사순시기를 시작하게 될 거야….’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있다

이렇게 우리가 “나에게로 돌아오라.”(즈가 1,13)고 애타게 부르시는 하느님의 품안으로 선뜻 달아들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근본적으로 회심하여 새사람이 되지 못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부활 신앙이 우리의 중심이 되지 못하고 사순시기를 중심으로 삼기 때문이다.

사순시기는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준비요 과정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부활 성야에 “예수 부활하셨네. 기쁘도다 알렐루야!” 하고 한 번 노래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가 사순시기가 되면 또 고신극기다 뭐다 하면서 거창하게 시작하게 된다.

어느 신부님이 남미에서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하던 중, 주일학교 어린이들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는지 한번 써보라고 했더니, 모두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분이십니다.”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우리 교우들에게 물어봐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그 대답은 단 10점도 줄 수 없다. 우리는 죽으신 분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죽었지만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얘들아, 얼굴 좀 펴라

예수님 하면 떠오르는 모습은 어떤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모습, 가시관 쓰시고 피를 흘리시는 예수님, 게세마니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번민하시는 예수님이 아닌가?

유쾌하게 웃으시는 예수님, 농담을 건네시어 제자들을 웃기시는 예수님, 기쁨과 희열에 넘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상상할 수도 없고,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얼굴에서도 비장함과 엄숙함만을 연상하게 된다.

그러니 평소에도 성당 정문까지는 깔깔대고 웃다가도 성당 마당에 들어설 때면 그 환한 얼굴이 굳어지고, 성수를 찍을 때쯤이면 근심으로 가득한 표정이며, 성체 앞에 무릎을 꿇을 때면 세상 온갖 걱정은 혼자 다 지닌 얼굴이 된다. 그래야 하느님 앞에 합당한 자세라고들 믿는다.

그러나 세상에 어느 부모가 그런 자녀들을 좋아하랴! 하느님께서도 “얘들아, 얼굴 좀 펴라.” 하시지 않겠는가? 그래도 굳어진 얼굴이 펴지지 않으면 “그 상판때기 보기 싫다. 얼굴 환하게 펴지 않으려면 아예 오지 마라.” 하실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니체도 이렇게 비웃은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제발 좀 웃어봐라.”

태형을 받은 제자들이 “예수 때문에 고난을 받게 된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기뻐하며 돌아왔다.”(사도 5,41)고 했듯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기쁨을 우리 삶의 중심에 놓고, 십자가를 은총으로, 기쁨으로 받아들일 때에 비로소 우리는 고신극기할 힘도, 새사람이 될 능력도 얻게 되는 것이다. 

임문철 시몬/제주 서문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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