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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각 복음사가의 관점으로 본 유혹사화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5-02-13 조회수1,215 추천수6 반대(0) 신고

사순 제1주일(2/13)






    제1독서: 창세 2,7-9; 3,1-7 제2독서: 로마 5,12.17-19 복음: 마태 4,1-11 각 복음사가의 관점으로 본 유혹사화 예수께서 유혹을 물리치신 이야기는 공관복음서에만 나오는데 각 복음서마다의 특징이 있다. 마르꼬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사탄의 유혹에 승리하셨다는 요점만 짧게 나오고, 마태오와 루가에서는 유혹의 내용도 나오지만 둘째와 셋째 유혹이 순서가 다르다. 왜 이런 차이가 있을까? 마태오와 루가의 유혹 내용은 우연히 순서가 뒤바뀌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복음사가의 신학적인 관점과 의도에 따라 나름의 이유가 있는 순서로 볼 수도 있다. 우선, 마르꼬복음은 예수님은 누구신가를 이방인들에게 알려주는 복음서다. 그래서 예수는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소개하며 복음서를 시작한다. 마르꼬 복음에는 구마(驅魔)의 기적이 세 복음서 중에서 가장 많으며, 첫 번째 공적인 활동 역시 마귀를 쫓아내는 구마기적이었다. 예수께서는 세상을 죄와 악에서 구해내러 오신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다. 이런 맥락에서 유혹사화 역시 예수께서는 악마를 간단히 물리치시고 승리하신 분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춰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마태오복음은 유다인들에게 예수가 누구신가를 알려주는 복음서다. 맨처음 소개하는 족보에서 보았듯이, 예수를 아브라함에서부터 내려오는 이스라엘의 전 역사의 과정 안에서 고대하고 고대하던 메시아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유혹의 내용들을 이해하자면, 자신들의 역사 안에서 과거의 백성들이 실패하였던 유혹들을 예수께서는 당당히 물리치고 승리한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겠다. 그래서 첫째 유혹은 이스라엘백성이 광야에서 겪었던 먹을 것에 대한 유혹이다. 그들을 해방시켜준 하느님을 원망하고 다시 노예생활로 돌아가고 싶을 만큼의 큰 유혹. 그들은 하느님이 보내주신 만나와 메추라기로 허기진 배를 채웠지만 나중엔 만나와 메추라기도 질렸다며 끊임없이 불평을 해댔다. 그런데 허기진 예수께서는 빵으로 유혹하는 악마를 단호하게 물리치신다. 둘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을 시험했다. 홍해를 건너던 때의 감격도 잠시,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원망을 쏟아내고 과연 하느님이 자신들을 돌보아주실 능력이 있는지 지속적으로 그분을 시험했다. 주님은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보호해주시고 인도하시어 당신이 선택하신 백성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셨다. 예수께서도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확인받아보라는 악마의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하느님의 능력을 떠보지 말라는 단호한 꾸짖음으로 이를 물리치신다. 셋째로 약속의 땅에 들어서면서부터 이스라엘 백성의 가장 큰 유혹은 우상 숭배였다. 하느님 아닌 것을 하느님처럼 숭배하는 이 범죄야말로 바빌론 유배라는 쓰라린 역사의 비극을 야기시킨 가장 끈질긴 유혹이었다. 예수께서도 사탄에게 엎드려 절하라는 이 유혹을 받으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경배 받으셔야 할 분은 오직 하느님 한분 뿐이시라고 악마의 유혹을 일축하신다. 그러니까 마태오의 유혹사화 안에서의 결론은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위협했던 유혹들을 모두 이기신 참다운 메시아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루가복음은 이방인들에게 예수를 알리면서 아담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족보 안에서도 피력하고 있듯이 그분은 모든 인류의 구세주라는 사실에 초점을 두고 있는 복음서이다. 마땅히 이에 따라서 유혹사화의 구성도 달라지고 있다. 즉 모든 인류가 접하게 되는 보편적인 유혹, 세가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첫째는 제 일차적인 욕구인 물욕(物慾)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인간과 물질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유혹들 말이다.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의, 식, 주, 재물...등에 대한 유혹들. 둘째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유혹이다. 지배욕, 권력욕, 명예욕, 애욕.....과 같은 유혹들이 이에 해당한다. 셋째로는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야기될 수 있는 유혹이다. 물질을 마음대로 소유하고 동료 인간들을 지배하려는 욕구는 마지막에는 하느님까지 마음대로 조정하고 싶은 유혹으로까지 비화된다. 마치, 창세기의 태고 설화에서 보듯이, 원조들이 깨어 버린 '하느님과 인간'의 틈새는 마침내 '동료 인간들끼리의 관계'를 해치게 되고, 마지막엔 '인간과 땅, 자연과의 관계'의 부조화로 이어지고 말았듯이... 루가복음에서는 이 모든 관계의 부조화를 역순으로 다시 회복시키시는 새로운 아담, 예수님의 모습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즉 원조 인간은 세가지로 대표되는 모든 유혹들 앞에서 무력했으나, 예수께서는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심으로써 깨어진 모든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시는 분이시다. 초세기에는 공관복음서의 내용이 겹쳐지는 것을 모두 추려내어 한 권의 책으로 만들려는 시도도 있었다 한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비록 같은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고 해도 이렇게 각 복음서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잘 이해하며 읽을 수 있으면 보다 풍부한 묵상을 나눌 수 있기에 비교점들을 소개해보았다. 그렇다고 각 복음서의 특성에 맞춰 꼭 이런 해석만 가능하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보다 우리에게 매일 닥쳐오는 수많은 유혹들을 어떻게 물리쳐 나갈 것인가가 더욱 중요할 것이다. 나는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유혹들을 자신의 의지와 힘만으로는 언제나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수없이 경험했다 오히려 유혹을 끊어내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커다란 힘으로 덮쳐오고 있음을 느낀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할까? 예수님의 유혹사화에서 공통되게 내게 들려주는 말! 인간의 노력과 의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주님의 말씀에 밀착되어 있는 정도, 하느님의 능력에 의지하는 정도, 그분을 신뢰하는 정도에 따라서 그 승패는 좌우된다는 것! 그것만이 거대한 유혹의 해일을 가라앉힐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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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하나!
        유혹은 잠시만의 승리로 아주 퇴치되는 것이 아니다.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루가)..."악마는 물러간다"는 것이다.
        연약한 우리가 주님께 지속적으로 밀착되어있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 Panis Angelicus -Franck Anthony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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