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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70) 그때 엄마의 가슴에 못을 박았더라면!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5-02-16 조회수1,228 추천수12 반대(0) 신고

2005년2월16일 사순 제1주간 수요일 ㅡ요나서3,1-10;루가11,29-32ㅡ

 

             그때 엄마의 가슴에 못을 박았더라면!

                                                              이순의

 

 

늘 도움만 받는 큰언니에게 나도 도움을 줄 때가 있다. 간큰 남자 큰형부를 보필하기가 고단할 때도 그렇고, 봉사활동을 하다가 신앙적인 갈등이 발생했을 때도 그렇고, 아이들 때문에 힘들 때도 푸념삼아서 털어 놓으신다. 그런데 이번 정초에도 언니는 뭐하러 내가 아이를 셋씩이나 낳아서 이렇게 힘이 드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을 했다. 자식이 하나뿐인 나는 언니가 부러워 죽을 지경인데 언니는 또 하나인 내가 부럽다고 하신다.

 

큰언니네 둘째 아이가 소리소문도 없이 편입시험을 보아서 합격을 했다. 우리 나라에서 두 번째 가는 학교에 척 붙은 것이다. 다니던 학교도 좋은 학교였는데 더 좋은 학교로 편입을 하게 된 것이다. 남들은 편입시험 대비 과외를 해도 안된다는데 소리소문도 없이 합격해 놓고 학비요청을 한 것이다. 큰언니네는 세 아이가 모두 대학원과 대학에 재학중이다. 각기 다른 학교에 뿔뿔히 흩어져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데다가 학자인 형부를 닮아서 아이들이 모두 공부만 하려고 한다.

 

큰아이가 생활하는 자취방에 둘째를 합류시키고 싶은게 큰언니의 심산이다. 그런데 서울이라는데는 가까워야 한 시간거리다. 큰아이 자취방에서 차를 여러번 갈아타면서 시간을 빼앗기느니 학교 앞의 골방이라도 좋으니 공부에 전념하고 싶다는게 둘째 아이의 주장이다. 매일 왕복 2~3시간이면 그 시간에 공부를 하면 훨씬 이익인 것이다. 언니는 결정을 짖지 못하고 막내인 나에게 하소연을 하셨다. 나는 당연히 부모는 해 줘야 한다고 했다.

 

내가 지킬 복이 없었는지 팔자가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학창시절의 전부를 병치레를 하다가 여고를 겨우 졸업했다. 졸업하던 그 해에 아버지께서 병이 나셨고 나의 미래 계획에는 정신이 없고 아버지의 병 간호에 온 가족의 관심이 쏠렸다. 재수를 하고 싶다는 말은 입에 뻥긋도 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기저귀를 빨다가 그해 가을에 하늘로 보내드렸다. 겨울이 되어 어머니께서 충격이 크셨는지 중풍에 쓰러지셨다. 가족들의 관심은 어머니께 쏠렸고 나는 그 황망한 집의 여식으로 남았다.

 

다행히 어머니의 중풍은 몇달간의 고생 끝에 회복이 되었고 작은 오빠가 작은올케를 들여서 아버지의 유업을 본격적으로 이어 받았다. 사람들은 아버지께서 나의 질병을 다 가져갔을거라고 중얼거렸고 진짜로 나는 완치 판정을 받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데 난데 없이 작은 오빠는 무리를 해서 도시에 사업체를 늘렸고 가족들의 반대는 엄청났었다. 엄마만이 작은 오빠의 편을 들어준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작은 올케가 집을 벗어나서 살고 싶어서 작은 오빠를 꼬드긴 결과물이었다. 불행하게도 엄마는 아이딸린 작은 올케를 내보내지 않고 나를 보냈다. 그리고 작은오빠의 타락해 가는 결과로 10개월만에 어마어마한 돈을 상실하고 망했다. 아버지께서 절대로 팔지말라고 하셨던! 두 개의 사업이 서로 엊갈려 불경기를 피해준다고 후손대대로 먹고 살라던 공장 하나를 팔아야했다. 그리고 엄마의 젊어서 했다던 봇짐 장사가 다시 시작 되었다. 남은 사업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 엄마는 돈을 벌어야했다.

 

작은 오빠가 정신을 차리는 일이면 엄마가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 작은 오빠의 하루밤 술 값도 안되는 돈을 버시겠다고 봇짐을 싸서 버스를 타고 양동시장에를 다녔다. 딱히 할 일이 없었던 나는 종종 엄마와 동행을 했다. 그리고 500원짜리 점심 한 끼를 사 주시며 먹으라고 했다. 나는 그 밥을 먹지 못했다. 엄마는 달게 드셨다. 작은 오빠는 여자들에 빠져서 살았고 논이며 밭들이 팔려나갔다. 엄마는 작은오빠가 계속 지워가는 빚을 갚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누구도 엄마의 의지를 꺽지는 못했다.

 

몰락해 가는 그 집이 싫었다. 남은 자식인 나의 진로에 대하여 누구도 생각해 주지 않았다. 나는 너무도 처량한 엄마의 가슴에 못을 박지 않는 삶을 살았다. 공동체를 선택했지만 오랜 병고를 치른 나에게는 무리였다. 그리고 실패했다. 또 다시 그토록 지겨운 집으로 돌아가야했다. 여전히 작은 오빠는 탕자였고 작은 올케마저 제 모습은 아니었다. 얼마나 내 처지가 안되어 보였는지 시골 본당의 원장수녀님께서 영명축일에 받으신 축의금의 일부를 떼서 쥐어주셨다.

"제노베파야 여기에 머물지 말고 네 길을 찾아서 가라."

 

그 돈으로 양재를 배우기 시작했고 다시 큰올케의 신세를 져야할 구실이 생긴 것이다. 새언니 한테는 뻔뻔한 시누이였지만 지겨운 시골집을 나가서 살 수는 있었다. 그런데 마춤 양장옷의 시대가 몰락하고 기성복의 시대가 오고있었다. 양잠점들이 도산에 도산을 거듭하고, 취직은 하는 대로 월급도 없이 끝을 맺었다. 그래도 몰락한 집을 구하겠다는 일념에 불타신 엄마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봉사활동을 시작했고 그 빌미로 새언니의 신세를 지며 살았다.

 

차비정도는 엄마가 주셨지만 공동체의 봉사는 수입이 전혀없는 일이었다. 물오른 처녀의 몰골은 머슴 같았다. 기세가 등등했던 엄마의 기는 완전히 쪼그라 들었고, 남은 막내를 혼인시키고 나면 자살을 하리라고 다짐을 하신다. 그리고 중신을 주선하는데 그 혼사자리는 이발사 미싱사 운전기사 농사꾼에 다섯번째가 지금의 짝궁이다. 솔직한 나의 심정도 아무나 도피처가 필요했었다. 그런데 짝궁을 만나기 전에 공동체의 신부님께서 상주 봉사자를 하면 월급을 주시겠다고 상담을 해 주셨다.

 

내 길이 열린 것이다. 그런데 내 길이 열리면 엄마의 자살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다. 나를 장애자들에게 두고 죽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엄마의 이기적 횡포는 시작 되었다. 당신이 눈을 감고 죽기 위해서 더 크게는 당신의 책임을 다 하기 위해서 짝궁에게 시집을 가라는 것이었다. 짝궁의 영등포 쪽방을 보고 돌아가서 나는 엄마에게 그 결혼은 할 수 없다고 했다. 평생을 눈물을 흐르고 살아야 한다고 그 집으로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말씀 드렸다. 엄마는 장애자 한테도 봉사하는데 육신 멀쩡한 사람에게 왜 봉사를 못 하느냐고 윽박질렀다.

 

죽고 싶은 엄마의 짐을 덜어드린다는 효심으로 그냥 결혼을 했다. 그런데 엄마는 죽지 않았고, 나머지 토지들을 다 팔았고, 사업의 본체가 넘어가고, 작은 오빠는 폐인이된 지금도 살아 계신다. 다행히 큰오빠는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지켜왔다. 작은오빠와 함께 넘어지지 않고 그 엄마도 그런 작은 오빠도 지키며 살고 있다. 나는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평생 고생하게 될거라고, 엄마께 알렸을 때처럼 19년 결혼생활 동안 눈물로 살아버렸다. 잘 나가는 형부가 두 분에 번듯한 오빠가 두 분인데 어느 형제도 나의 혼사를 위해 중신 한 번을 세우지 않았다.

 

살면서 그것이 그렇게도 원망이 되었다. 몰락해 가는 집에서 사치를 할 만큼 엄마에게 요구하지 못 했다. 사치가 아니라 가꾸는 것 자체를 포기해야만 했다. 신혼 시절에 끼니도 때우기 어려웠는데 친정에서는 반갑지 않은 소식들이 전해왔다. 언니가 누구를 형부회사 직원과 중신했다느니, 오빠가 누구를 회사 직원과 중신을 했다느니! 한 집에 살았지만 이방인이었던 동생! 친 동생이었으나 체면이 서지 않았던 동생! 그런 무관심의 쓰라림은 최근까지도 내 가슴의 짐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몇 해 전에....

 

그렇게 소개시켜서 결혼했다는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웃음이 나왔다. 혼자 웃고 또 웃었다. 그러는 나를 보면서 내가 나를 불쌍히 여기며 울었다. 그분이 젊은 나이에 남편과 자식을 두고 죽었는데 고소해서 웃는 나를 보며 얼마나 내 자신이 불쌍해서 울었다. 죽은 사람 때문에 웃다가 내 자신 때문에 울었다. 그분의 죽음이 내 마음의 앙금을 거두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내 자식이 아직 다 자라지 않았는데 죽기는 싫었다. 이렇게라도 살아서 내 자식이 홀로 서게는 해 주고 싶었다. 자식을 두고 눈을 감아야 했을 그분의 저승길을 그런 생각이 들고서야 불쌍히 여길 수 있었다. 

 

그렇게 먼지처럼 사라질 아버지의 유업일 줄 알았다면 그때 엄마의 절망적인 모습을 가슴아파하지 말았어야했다. 재수를 하겠다고 고집을 부려서라도 대학을 가야했고, 보짐을 팔은 돈이라도 긁어서 형제들이 내어 놓을 만큼의 상품으로 내 자신을 치장할 줄 알았어야 했고, 땅을 팔아서라도 형제들의 신세를 지며 혼인하지 않겠다고 당당하고 싶다고 우겼어야했다. 아니면 엄마의 저승길이 편하든지 말든지 장애자 공동체에서 뼈를 묻어서 살겠다고 내 갈길을 갔어야했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마지막 남은 끄트머지 애물단지가 되어 엄마에게도 형제들에게도 짐이 되어 나의 모든 생각을 접어 살았다.

 

큰언니는 자식들로인해서 언니도 상처 받는다고 하소연을 하셨다. 그러나 나는 큰언니를 나무라고 말았다. 부모가 자식 때문에 상처 받아야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부모가 자식 때문에 곤궁에 처해야 하는 것은 당연히 이겨야 할 의무이다. 남들은 해주고 싶어도 안해서 탈인데 한다고 몸부림 하는 자식 때문에 상처를 운운해서는 안되는 말이다. 지금 언니네 둘째가 언니의 형편을 고려해서 의지를 접었을 경우에 잘 되면 다행이지만 본인의 뜻을 펴는데 걸림돌이 된다면 그 자식을 바라보는 언니의 상처가 지금의 상처보다 가벼울 것 같느냐고 여쭈었다.

 

물론 내 팔자소관도 있겠지만 평생을 고생하며 살게 될 것이다는 딸의 말을 귀담아 들으셔서 좀 더 깊은 생각을 해 주셨다면 19년 세월이 어려울 때마다 엄마를 원망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엄마도 엄마 인생의 짐을 벗으려고 나를 희생시켰다고 가슴으로 악다구니를 쓰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작은 오빠를 살리려고 막내라는 자식의 인생을 돌보지 않았다고 한을 품지 않았을 것이다. 먼지도 없어질 살림을 쪼개어 나에게 투자해 주셨다면 내머리 속에라도 남아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살아계신 엄마는 그리워하지 않았다. 죽은 아버지만 그리워하며 살아야 했다. 지키지 못할 자식에 대한 애증을 조금만이라도 나에게 돌려서 길을 열어 주었어야했다고 치를 떨었다. 후에 알은 사실이지만 엄마는 보짐장사를 해서 형제들에게 나의 결혼비용을 갚았다고 하신다. 그러니 네가 형제들에게 짐이 되어 결혼했다는 생각을 버리라고 하셨다. 그런다고, 엄마가 보짐장사를 해서 그 푼돈을 갚았다고 이미 형제들에게 진 무거운 나의 마음이 가벼워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나를 안심시키시는 것 또한 싫었다.

 

내가 볼적에 형제들은 마라톤을 하며 가는데 나는 길이 없는 밑바닥 인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배우지 못하고 갖지 못한 사람을 따라 세상을 산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것이었다. 나는 큰언니에게 그런 말을 했다. 내가 그때 지금 언니 딸들의 반 만큼이라도 내 목적이 있었다면, 차라리 그때 엄마의 가슴에 못을 박았더라면, 나도 불효막심한 딸이 되지 않았을 것이고, 엄마도 막내딸의 신세를 형제들에게 갚아내야하는 무게가 조금은 가벼웠을 것이라고!

 

하려고 하는 자식에게는 무엇이라도 해줘야 한다. 나는 그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그러셨다. 내가 억지로라도 해 달라고 했다면 해 주었을 것이라고! 전혀 고집없이 살아서 관심을 쏟지 못했다고! 결국 엄마를 불쌍히 여긴 효심의 결과는 나에게 돌아와 떨어졌다.

"지가 안해서 못 한 것이지 엄마가 하지 말라고 했느냐?"

나는 소리를 질렀다.

"그 500원짜리 밥을 먹는 엄마 앞에서 나는 그 밥을 먹지 못한 죄책감이 컸었어요." 

 

큰언니는 나의 한스런 절규 앞에서 결론을 내렸다. 

 

ㅡ그때에 군중이 계속 모여들자 예수께서는 "이 세대가 왜 이렇게도 악할가?" 하고 탄식하며 말씀 하셨다. "이 세대가 기적을 구하지만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 줄 것이 없다. 니느웨 사람들에게 요나의 사건이 기적이 된 것처럼 이 세대 사람들에게 사람의 아들도 기적의 표가 될 것이다."루가11,29-30ㅡ  

 

<조카녀석은 아르바이트 해서 모은 돈으로 집 보증금의 반을 부담하고 나머지만 도움을 받았습니다. 월세는 언니가 부담하고 생활비는 아르바이트 해서 쓰는 조건으로 협의를 했다고 합니다. 공부하랴 아르바이트 하랴 당연히 통학 시간이 아깝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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