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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74) 귀천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5-02-19 조회수1,187 추천수6 반대(0) 신고

 

  

 

 

        귀천

                이순의

 

 

홀연히 나타나 인사동을 가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추운 겨울 날에 바람을 맞으며

아침의 인사동 거리에 섰습니다.

상점들이 개점하지 않은 이른 시간에

찻집도 문이 잠긴 이른 시간에

기지개 켜는 인사동에서 골목을 누비며

따뜻한 차 한 잔의 집을 구하느라고 종종 거렸습니다.

 

<귀천>

간판은 귀천이라고 써져있습니다.

재건축으로 귀천이 없어졌다고

천 시인께서 귀천한 후라서 다시 찻집이 열릴지는 모른다고

신문기사를 읽었는데

근사할 것 까지야 없어보이는 인사동 골목 어느 곳에

귀천이 있었습니다.

 

빵긋이 문을 열고

아침의 얼은 몸을 녹히러 들어 섰습니다.

시인의 담배 자욱한 초상이 벽에 걸리고

책에서 본 마나님은 아닌듯 싶은데

영업 준비를 하느라고 여인이 분주합니다.

대추차를 두 잔 놓고

진짜로 찻잔이 크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양손바닥으로 찾잔을 품었더니

되려 찻잔이 나를 빨아 뜨거운 열기를 뿜었습니다.

아~! 따뜻해.

 

김 오른 차 맛이 걸죽하니

참 맛있습니다.

왜 다른데서 마시는 대추차는 이 맛이 아닐까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귀천하신 시인을 벗으로 삼아 정담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요.

느닷없이 선물을 사달라고 합니다.

물감과 붓과 종이를!

가난한 살림에 재주를 썪힐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하필이면 함께 가난한 나에게

선물을 사달라고 했습니다.

 

차를 마시고 나설적에

책에서 본 미망인이 계산대에 앉아 계십니다.

한 눈에 알아뵙고

귀천이 없어지지 않고 있어서 좋다고 인사 했습니다.

그리고 궁금했던 중광의 소식을 여쭈었드랬습니다.

내내 중광께서 왜 귀천하셨는지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중광의 소식을 전해줄 만한 지인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걸레스님 중광도 지병이 있으셨다고

지병 때문에 귀천하셨다고

가슴 한 켠의 오래 묵은 흔적을 덜은

허허한 마음으로 귀천을 나섰습니다.

 

물감과 종이와 붓을 조심스럽게

너무나 조심스럽게 고르고 계십니다.

기왕에 사 드리는거라면 사고 싶은대로 사시라고 했건만

너무나 조심스럽게 조심스럽게

보기에 별로 넉넉해 뵈지도 않는데

다 사셨다고.....

그런데?!

헤어지기 직전에

달리는 전철 안에서

철커덕 거리는 소음을 뚫고

귓가에 스치는

낮은 음성이 너무나 너무나 고마워서!

<책을 출간하게 되면 표지 그림과 삽화는 제가 그려 드리고 싶어요.>

 

그렇게 깊은 마음을 읽었더라면

더 많이

더 편하게

더 고마워하며

팍팍 집어 드렸을텐데....

수 년만의 만남은

잠깐 새끼 손가락 걸어보고

전동차의 창문 밖으로 멀어졌습니다.

다음 만남이 언제일지도 모르는 기약을 믿으며

머리에 두르신 회색 수건의 잔상만 내 곁에 남았습니다.

 

새끼 손가락 걸은 약속이 지켜질지?

오신 목적이 선물을 받는 게 아니었던

그분을 위해서라도 꼭 한 번은!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고요한 중에 기다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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