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피정(避靜)의 결실
작성자양승국 쪽지 캡슐 작성일2005-02-19 조회수1,123 추천수19 반대(0) 신고
 

2월 20일 사순 제2주일-마태오 17장 1-9절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피정(避靜)의 결실>


저희 같은 수도자들에게 1년에 한번 주어지는 1주일간의 연례피정을 다녀왔습니다. 이때만큼은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사목 현장에서 완전히 떠나지요. 그리고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침묵과 기도 안에 지난 1년간의 삶을 진지하게 되돌아봅니다.


그러다보니 천국이 따로 없습니다. 스트레스도 없지요. 골치 아픈 일도 전혀 없습니다. 침묵 속에 지내니 다툴 일도 없습니다. 매일 좋은 강의말씀을 들으니 마음이 저절로 부자가 되는 느낌입니다. 매 순간 기도 안에 지내니 모습이 다들 성인(聖人)처럼 변합니다. 피정이 끝나는 즈음해서는 다들 눈빛에도 총기가 생기고, 얼굴도 살이 올라 포동포동해 질뿐만 아니라 반짝반짝 빛까지 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입니다.


경치가 절경인 곳, 분위기가 딱 그만인 곳, 마음의 고향 같은 곳에서 얼마간 지내다보면 그곳 공기에, 그곳 음식에, 그곳 사람들에 몸과 마음이 익숙해져 그곳을 뒤로 하고 떠나오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저 역시 마음 같아서는 그 천국 같은 바닷가에서 딱 한달만 더 지내다 왔으면 하는 마음이 절실했습니다. 그 적막하고도 여유로운 바닷가 피정 집에서 조금만 더 머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피정의 최종적인 목적은 고요한 산정(山頂)에 오래도록 머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제 기도와 묵상으로 재충전시킨 한 영혼을 다시금 세상으로 힘차게 파견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세상으로 떠나보내는 것입니다.


인간이 지닌 여러 습성 중에 모질게도 질긴 것이 안주 본능입니다. 저희 같은 수도자들도 늘 떠나야 됨을 잘 알면서도 떠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산정(山頂)의 고요와 평화를 포기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번잡하고 시끄러운 세상으로 다시 복귀한다는 것은 때론 죽기보다 싫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끝까지 산꼭대기의 신비스럽고 황홀함만을 고집하며 그곳에 머물고자 할 때, 우리의 피정은 뭔가 잘 못된 것입니다.

 

베드로 역시 산정(山頂)의 분위기가 얼마나 좋았던지, 분위기 파악도 제대로 되지 않는 상태에서 엉겁결에 이렇게 외치는 것입니다. “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산 밑으로 내려 가봐야 골치 아픈 일들만 많고, 그 싸가지 없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사람들이 또 아귀처럼 달려 들텐데...여기서 좀 지내다 내려가면 안 될까요? 초막은 저희가 지을 테니 걱정마시고...”


피정을 끝낸 우리, 주일미사를 마친 우리, 묵주기도를 끝낸 우리가 이제 가야 할 곳은 저 깊은 곳, 저 험난한 세상 한가운데입니다. 시끄럽고 냄새나고 지저분한 저잣거리 그 한가운데입니다. 우리가 또 다시 땀과 눈물을 흘려야 할 일상입니다. 지긋지긋하지만 또 다시 걸어가야 할 멀고도 먼 신앙 여정입니다.


피정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저를 보자마자 한 아이가 달려오더니 이렇게 말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신부님, 지난번 약속하신 것(같이 놀러가기로) 아직 안 잊으셨죠?”


피정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니 갖은 종류의 숙제와 회의, 일정 등등이 많이 잡혀있어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피정을 통해 과충전한 에너지를 잘 사용할 기회가 생겼으니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산에 오르신 예수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눈부시게 변했습니다. 또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예수님은 나자렛에서 숨은 생활, 그리고 공생활을 거치면서 끊임없는 변모를 추구하십니다. 육적 삶에서 영적 삶으로, 인간 예수에서 메시아인 그리스도로 점차 건너가십니다.


우리가 하느님 자녀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한평생 추구해야 할 가장 큰 과제는 변화를 위한 노력입니다. 육적 인간에서 영적 인간으로 변화, 암흑과 죄의 상태에서 광명과 부활의 상태로 변화, 이기적이고 자기폐쇄적 인간에서 이타적이고 모든 이와 세상을 위해 개방된 인간으로 변화.


이런 변화 노력이 지속될 때, 우리는 언젠가 이 세상 허물을 말끔히 벗고 하느님 자비와 평화의 나라로 건너갈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매일 꾸준한 내적 성장과 쇄신의 노력을 통해 나날이 변화해 그 결과 주님께 온전히 합일되길 바랍니다.


성인(聖人)이 우리와 다른 한 가지 특징은 부단히 어제의 나 자신을 떠나 끝없이 변화를 시도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나비가 될 수 있나요?” 하고 노랑 애벌레가 생각에 잠겨 물었습니다. “한 마리 애벌레의 상태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을 만큼 절실히 날기를 원할 때 그것은 가능한 것이란다.” 나비가 되고자 나뭇가지에 매달린 늙은 애벌레가 말했습니다(트리나 폴러스 저, 「꽃들에게 희망을」 참조).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