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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님을 죽인 국가보안법
작성자손영준 쪽지 캡슐 작성일2005-02-21 조회수880 추천수2 반대(0) 신고
 

예수님을 죽인 국가보안법


 강원도 산골 농부의 딸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자매님의 체험담입니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으로부터 ‘간첩은 이른 아침 바지를 이슬로 적신 채 산에서 내려오거나 밤에 혼자 라디오를 듣는다. 그런 사람을 보면 신고해야한다’는 말을 듣고 보니, 아버지가 꼭 그렇더랍니다. 논밭이 산에 있던 아버지는 아침마다 바지가 젖은 상태로 산에서 내려오고, 밤이면 라디오를 열심히 듣는 걸로 보아 간첩이 틀림없더랍니다. 신고를 해야 하는데 아버지가 잡혀갈 걸 생각하니 너무나 심각하게 갈등이 되어 혼자 고심하며 여러 날을 울기도 했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이 들리지만 분단과 대결의 냉전시대를 살아 온 사람으로서 자기도 그 피해자였다는 생각에 씁쓸하고 억울하다는 얘기였습니다.

 

 우리는 비슷한 경험을 모두 갖고 있습니다. 당시 교실 벽의 표어나 거리의 현수막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게 ‘이웃집에 오신 손님 간첩인가 다시 보자’였습니다. 우리의 의식이 얼마나 국가보안법에 가위 눌려 왔으며 외눈박이로 커 오게 했는지 되돌아보게 하는 경험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 국가보안법의 피해자이지만 가장 큰 피해자는,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역설적이게도 자유민주주의를 가장 크게 제한하고 훼손하는 국가보안법의 사수를 외치는 사람들 아닌가 합니다. 아직도 국가보안법이라는 현대판 우상숭배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국가보안법이 마치 자유민주체제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인양 말하지만 사실 우리 사회가 이나마라도 자유민주체제를 유지하게 된 것은, 국가보안법 때문이 아니라 고문과 투옥을 무릅쓰고 독재정권에 온 몸을 던져 항거한 민주화운동에 힘입은 것 아닌가요? 국가보안법을 없애면 마치 사상적 ‘무장해제’라도 되는 양 야단이지만, 이제는 사상의 자유시장에 맡겨도 될 만큼 우리 국민의 의식이 성숙하지 않았습니까? 오히려 국가보안법을 없애야 민주주의를 완성하여 국가의 경쟁력과 품위와 신뢰도가 높아지고, 남북화해를 통해 한반도에서 전쟁을 막고 국가안보가 튼튼해지며, 남북경제협력을 통해 경제를 살리는 돌파구가 될 것입니다. 그 첫 단추를 끼우는 것이 국가보안법 폐지인 것입니다.

 

 국가보안법은 좌우를 가르는 잣대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지표로 되어온 게 사실입니다. 그간 유엔인권위원회와 국제사면위원회(Amnesty)가 여러 차례 국가보안법 폐지를 촉구한 바 있습니다. 또한 1953년 형법 제정 때 기초책임자였던 김병로 대법원장이 당시 국회에서 국가보안법 없이 형법만으로도 충분히 국가안보를 지킬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진술했으며, 최근 주요 3개 형사법학회에서 국가보안법을 폐지해도 별도 대체입법 없이 현행 형법만으로도 대체가능하다고 전문가 의견을 밝힌 사실 등을 보더라도 폐지해 마땅합니다.

 

 국가보안법은 일제잔재(치안유지법)로서 무자비한 인권탄압을 통해 국가와 국민, 국민과 국민 사이를 이간시켰으며, 정권안보를 위해 민주주의를 본질적으로 훼손시킴으로써 국가의 정체성을 호도하고, 국제사회에서 우리 국가의 품위를 지대하게 손상시켰습니다. 또한 민족의 부활인 통일을 위한 민주역량을 무력화시키고 끊임없이 반북 적대의식을 부추기는 반통일 악법일 뿐 아니라, 형제를 적으로 규정한 반그리스도교적 악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지 이웃을 감시하고 고발하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지 형제를 적으로 삼으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권을 존중하고 평화를 증거하라 하셨지 인권을 유린하고 갈등과 전쟁을 부추기지 않으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 하셨지 사람을 율법이나 국가보안법에 예속시키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끝내 예수님은 당시의 국가보안법인 악한 율법과 로마의 치안유지법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형으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 우리 안에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시대의 요청에 올바로 응답해야 합니다. 물론 불편부당한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무원칙한 화평주의와 기회주의는 또 다른 분열과 편당을 가져옵니다. 진정 하나되기 위해서 단호히 맞서고 확연히 갈라서야 할 때가 있습니다. 모두가 하나되기를 원하셨던 예수님도 하느님을 위해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불을 지르러 왔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며 부자간, 모녀간 서로 맞서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따를 것인가, 세상의 죄에 길든 삶의 방식대로 살 것인가, 확연한 갈라섬과 치열한 대치선을 넘어서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군중은 예수 때문에 서로 갈라졌다.’(요한 7,43)

 

한국가톨릭농민회 회장 정재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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