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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사랑학 강의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5-02-22 조회수1,126 추천수8 반대(0) 신고




새학기가 일주 후로 가까이 다가왔네요.
설이 지나고 대보름 명절이 오고 시간이 넘 빨리 가는 것 같아요. 
이제야 큰일났다 싶어 마음이 바빠져요.

이번 봄부터 저희 본당에서 강의할 '요한계 문헌'의 강의록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이제야 쫓기고 있어요.

몇주 전부터 부랴부랴 몇개의 해설서들을 골라서, 이것 저것 눈도장을 찍고 있는데
예전에 강의했던 그 방식을 벗어나,
새로운 구상을 하고 있어서 마음에 부담이 가는가봐요. 

언제나 새로운 것을 좋아하기에 제 팔자 제가 들볶고 있는 거지요.

지난 학기, 공관복음도 한꺼번에 3복음서를 대조하며 해설했는데,  
저도 무척 재미있었고, 또 사람들도 그런 새로운 형식에 참 좋아했었거든요.

이번엔, 요한복음 특유의 감성과 사랑의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역사비평학적인 방법을 조금만 곁들이며, 문학 비평학적인 방법으로 강의하고 싶어요.

꿈은 간절한데 육신의 능력이 따라줄지 어쩔지... ㅎㅎ
그래서, 그런 계통 쪽의 책들을 읽으며 또 제 나름대로의 묵상들을 정리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아직 머리 속이 뒤죽박죽입니다...(넘 많이 읽었나?...ㅎㅎ)
그중 몇가지 내용만 제 머리 속에서 꺼내 보여드릴께요.(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고요)


요한복음에서 늘 언급되는 '사랑받던 제자'가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예수님의 가슴에 기대어 그분의 마음을 읽는 장면...
그것이 그저 그렇겠거니 하는 상징적 행동이나 추상적 표현이 아니라는걸 깊이 느꼈어요.

사랑하는 사람의 가슴에 기대고 있으면, 말이 들리고 마음이 읽혀진다는 것.
정말 오랜만에 다시 느끼게 되었네요 ^^*

ㅎㅎ 그래서 우리 같은 중년들도 때론 옛적 연애시절로 돌아가봐야해요.

지긋이 손<만>잡고, 가슴에<만> 기대고 있어봐봐요...ㅎㅎㅎ

무슨 말이 들리나...(얼음장 밑에도 귀를 대고 있으면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잖아요?ㅋㅋ)

굳이 그게 뭐다! 라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미미한 여운들.

그러나 심장의 박동소리와 함께 확실한 무언가를 전달해주죠 . 

예수님의 품에 기대었던 요한은 그걸로 한생애를 그분을 위해 바칠 수 있었죠.

그리고 그 긴 사랑의 이야기로 누구보다 깊은 복음서 한권을 쓸 수 있었죠.

세상을 덮고도 남을 그 긴 사랑의 이야기를 간신히 줄이고 줄여서 말예요.

 

베다니아의 여자 마리아도 그 미미한 여운, 그러나 확실한 무언가에
자신의 전 재산, 자신의 명예, 자존심을 쏟아부었다는 것 아닌가요?

사마리아 여자도 물동이 다 팽개쳐두고 달음박질 하지 않았나요?

니고데모도 동료들 눈치코치보지 않고 그분의 장례를 돕지 않았나요?

베드로도 옷도 벗어버리고 호수로 텀벙텀벙 뛰어들어가지 않았나요?

그분을 만난 모두는 그랬었죠.

그게 어떤 느낌이었는지, 그게 뭐였는지 말해보라하면

똑떨어지는 정수로 이야기해볼 수 없다하더라도

(요한복음의 특징이죠?..무슨 소린지 원...^^)

소숫점만 찍어서는 여엉 정수로 올라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끊임없는 소숫점 찍기로도 한생을 걸을 수 있더란 말이죠.

어쩌면 애끓는 사랑이란 평생 소숫점 찍기일지도 몰라요.
정수는 너무나 허무하고, 너무나 짧은 순간이기에 말이죠. 

어쩌면 하느님 사랑도 그런 것인지도 몰라요.

정수로 똑떨어지게 이야기할 수 없는 분.

이런가 하면 저렇고 저런가 하면 또 아닌 분. 

 

그래서 그런 분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쩌면 고통이기도 하고

그래서 그런 분을 탐한다는 것이 어쩌면 허망하게 느껴지기도 하는거죠. 

베다니아에서의 예수와 마리아의 상봉을 묘사한 라자로의 죽음 장면에서
마르타와 마리아가 예수를 보며 했던 대사가 겉으로 보기엔 같은 내용인 것 같지만

그리고 공동번역엔 똑같은 말로 번역되어 있지만
희랍어 원문에는 약간의 어순의 차이로 그 뜻까지 미세한 차이를 나타낸다는 주장도 있었어요,

예수가 늦게 와서 자기 오빠가 죽었다는 그 대사.


마르타는 예수께서 늦게 와서 자기 오빠가 죽었다며 슬퍼하지만

즉 오빠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지만 
마리아는 오빠의 죽음 보다는 자기 자신을 슬퍼하고 있다는 이야기였지요.

즉 사랑하는 오빠가 죽었고 아무도 기댈 곳 없는 자신의 외로움을 몹시 슬퍼했다는..

( 평소에도 마리아가 원하는 것보다 예수님은 늘 더 멀리 계셨지만,

오빠마저 없는 그런 상황에선 더욱 느껴지는 외로움이었다고 전 이해되었어요)

예수는 마리아의 그 말을 듣고 비탄의 눈물을 흘리는데...
이 희랍어적 의미가 마리아라는 여자에게 향하는 인간적 애정이 담겨 있다는
해설을 보면서, 참 묘하게도 예전에 베다니아 여자에 대한 묵상글을 올렸던

그 내용과 일맥 상통하고 있음을 보며 그 묵상이 참 우연하고 심심한 추정은 아니었다 싶어졌어요.

 

라자로의 소생 사건으로 인해 당신의 죽음은 더욱 앞당겨지고

마리아의 그 마음이 더욱 애처롭게 느껴지셨던 예수님, 

사랑하는 친구들(마리아, 마르타, 라자로는 그런 사람의 대표적 인물이었으니..)의 상실감을

미리 감지하시고 심령이 강하게 요동치는 슬픔을 느끼셨겠지요. 

그러나 그런 사랑과 슬픔을 꼭 [주님과 인간의] 사랑에만 국한시키지는 마세요.

다빈치 코드와 같은 그런 왜곡된 공상은 아니라할지라도 
인간적인 사랑, 인간적인 연정들이 예수님도 분명 있었을거라 싶어요.

그래서 그분이 가치 절하되기는 커녕 저는 더욱 멋지기만 하답니다. 

지난 주, 수원교구 주보에 실린 배영호 신부님의 글(예수님의 유혹?) 안에도 있었듯이,
'하느님다움을 증명해보라는 유혹을 거절하고 인간다움을 증명해보이셨던 예수'를

요한복음의 곳곳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어요.

(흔히 요한복음을 예수님의 신성에 비중을 두는 복음으로 이야기하지만

이렇게 잘 들여다보면 예수님의 인성에도 많은 역점을 두고 있죠.)

부활하시고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사랑에 대해 세번씩 확인하며 양치기 임무를 맡기는 장면에서도.
세번의 사랑의 단계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구체적이고 육감적인 사랑에서부터 초월적인 사랑으로 점점 올라가지 아니하고

(에로스에서 필로, 아가페로...)

 

요한복음의 예수께서는 아가페로 두번 물으시다

마지막엔 필로로 물으신다는 것에 저의 묵상은 머물고 있어요.
형이상학적 사랑보다는 인격적인, 인간적인 친근함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는 뜻은 아닐까요?


 

만일 저의 묵상이 그럴 듯하다면

결국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사랑이란...

저 멀리 있는 어떤 아스라한 사랑을 말함이 아니라...
곁에 가까이 있으며, 때때로 기대고 심장의 박동을 느끼며 손잡고 떨어지지 않는(포도나무)...
함께 묵고, 함께 생활하고...(요한 1장의 첫번째 제자들과 예수님) 

서로 발을 닦아주고(13장),

서로 우정을 나누고(하느님이 인간을 친구라 말하는 유일한 복음),

서로의 목소리를 알고,(10장의 착한 목자와 양)
그 목소리로 서로의 근심과 기쁨을 알며 함께 울고 웃으며

서로의 생명의 문이 되어주는

그런 사랑일 거라 여겨집니다.

라뽀니... 그런 친근한 애칭으로 부를 수 있는 그런 사랑.
그 사랑은 또한 서로를 붙잡아두고 위로 향하지 못하게 하는 그런 사랑은 아니겠지요. 물론.(20장) 

요한복음 강의는 그래서 '사랑학' 강의(사랑학 수다?)가 될 것 같아요. 

어때요? 괜찮을 것 같아요?

ㅎㅎ 문학비평적인 방법은 이렇게 좀더 자유롭고 주관적인 해석이 많아요.

다만 그 주관이 넘 비약 발전하여 요한의 메시지와는 전혀 무관한 엉뚱한 소리가 되면 안되겠지요.


이번 봄학기에 풀어놓을  제 어설픈 사랑타령.

벌써 그 생각만으로도 몸이 달아오릅니다. ^^
잘 되게 기도해주세요.


 

ps. 이젠 이곳 묵상방에 자주 오지 못할 거예요.

그동안 제 글을 사랑해주신 분들과 사랑의 마음으로 비판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열심히 공부하다 또 방학 때 자주올께요.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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