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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77) 신부놈이 회장님을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5-02-22 조회수1,602 추천수11 반대(0) 신고

2005년2월22일 화요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ㅡ베드로1서5,1-4;마태오16,13-19ㅡ

 

       신부놈이 회장님을

 

 

오늘의 복음은 사도좌를 알리고 있다. 주님께서 친히 베드로를 후계로 삼으신 기록이며 믿어야할 교리이기도 하다. 베드로도 역시 주님처럼 후계자를 삼아 천국의 열쇠를 전했으며, 그 후계자도 똑같은 방법으로 후계자를 뽑아 전해 왔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요한 바오로2세께서 264대 교황으로 자리하고 계신다. 간혹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정통성에 대하여 부정하고자 할 때 교황의 자리를 인정하려하지 않거나 외면하는 분도 계시며 가톨릭이라는 종교의 정당성 자체를 말살하고 싶은 경우도 있다.

 

그러나 교회가 역사를 거처 오면서 인간적으로 내면적으로 오류를 범했다고 하더라도 그 원류마저 상실되는 것은 아니다. 그 책임이 원류인 가톨릭에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가톨릭의 성직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교회의 원류를 부인한다는 것은 갈려나간 가족들 스스로 그 뿌리를 상실하는 일이며 또한 그리스도교회의 또다른 오류를 가중시키는 역활을 자초하는 일이다. 역사적 사실조차 부인 한다는 것은 안타깝게도 말은 그리스도인이나 행실은 그리스도인 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교회의 사도좌가 이어진 명단을 잠깐 살펴보면.

1대- 베드로, 2대-리노, 3대-아나글레토, 4대-글레멘스1세, 5대-에바리스토, 6대-알렉산델1세, 7대-식스토1세, 8대-텔레스포로, 9대-히지노, 10대-비오1세, 11대-아니체토, 12대-소텔, 13대-엘레우테로........ 260대-비오12세, 261대-요한23세, 262대-바오로6세, 263대-요한 바오로 1세, 그리고 현재의 교황성하께서 264대-요황 바오로 2세로 이어져 온 사실을 증거하며 기록하고 있다.

 

가톨릭을 떠나서 새로운 이상의 그리스도교를 꿈꾸기 시작한 종교개혁은 16세기 무렵이었으므로 가톨릭 교회의 교도권을 부정한다는 것은 스스로 그리스도 교회의 뿌리를 잘라버린 종교행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가톨릭 교회는 오늘도 갈라진 형제들과 동행하며 그리스도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지구에는 그리스도를 믿거나 알고 있는 인구가 실로 엄청난 숫자에 이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12월25일 성탄절을 기념하여 쉬는 국가는 지구 전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만큼 오늘의 복음이 시사하는 영향력은 우리네 사람들이 감히 왈가왈부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 자신도 수 없이 많은 오류와 시행착오를 경험하면서 살고 있다. 신의 뜻을 한 걸음 한 걸음 알아가려고 노력하지만 무지에서 오는 교권에 대한 도전은 감히 무어라고 말을 꺼내 놓기조차 민망할 지경일 때가 있다. 사람이 신앙을 갖고 신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의 능력은 우주의 티끌 하나도 기억하고 보실 수 있으며 다스리기 까지 하신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멀리 본다고 해 보아야 자신의 행동 반경이며, 깊어 보아야 자기 마음도 다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이 어리섞을 적에는 한 없이 어리섞고, 그런 인간이 이간에 어두울  때는 한 없이 캄캄하기 때문이다. 내가 공소에 살을적에 공소의 형편은 가톨릭 교회라고 볼 수가 없었다. 완전한 이단이었다. 실제로 국가의 현실이 곧 종교의 현실인 상태에서 소외 된 섬마을의 교우들에게 가톨릭이 무엇이냐고 묻는 자체가 무리였을 것이다.

 

공소예절이 시작되기 전에 또는 신자들의 기도 (지금은 보편지향기도) 시간에 예물 봉투를 놓고 회장님의 장구한 통성기도가 이어지고 있었다. 당연히 나는 본당신부님께 방치해도 되는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 하고 말았다. 미사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살과 피를 얻기 위한 지향이라고 알고 있었다. 개인 예물은 개인 각자의 지향이므로 자신이 기도하고 얻을 봉헌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지향 조차도 사제가 세워줄 의무는 없는 것이었다. 미사가 아닌 예절이라고 하지만 통성기도로 지향자를 한정한다는 것은 군중에게 말씀을 나누고 고루 먹이셨던 주님의 가르침에는 어긋나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신부님께서는 목자였다. 참 목자는 양들의 편에서 생각하신다. 하늘에서 보시는 모든 것은 하늘께 의지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신부님은 한 달에 한 번 방문하는 공소에 어떤 제도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보다 그렇게라도 그리스도 교회를 전하고 생활하는 그 자체를 주님의 마음으로 인정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의 질문에 걸림돌이 되셨는지 오랜 신부님의 갈등은 단호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결단은 내려졌다. 그러나 회장님은 방관하며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신부님의 갑작스런 개입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은 어느날 소리도 없이 떠나버리셨다. 그것이 그분의 신앙하는 모습이었다.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오신 선하디 선한 섬마을 교우들만이 허공에서 그분을 못 잊어하고 있었다. 결국은 욕설로 번지고 말았다.

<신부놈이 우리 회장님을 쫓아냈다.

 신부놈이 우리한테 해준 것이 무엇이냐?

 성당도 우리 손으로 지었는데

 제 놈은 한 달에 한 번 와서 헌 일이 무엇이냐?>

 

성체 한 번을 모시려고, 고해성사 한 번을 보려고, 끼니 먹을 쌀조차 갹출하여 사제를 기다리셨던 신앙의 선조들이 무덤에서 일어날 지경이었다. 교우들은 열심히 일을 해서 세상의 복락을 일구어야 한다. 그것이 첫 아담이 범죄한 결과이므로 당연하며 사람의 숙제인 것이다. 그리고 다음 아담이 오셔서 첫 아담이 묶은 인간의 삶을 영원히 해방시켜 주셨다. 그 해방의 결과가 땅에서 맨 것을 하늘에서도 매며 땅에서 푼 것을 하늘에서도 푸는 일이다. 그것이 반석인 베드로를 통해 이어져 왔으며 오늘날 현대문명의 이기 속에서도 우리가 신앙을 살고 구원을 믿으며 해방을 확신하는 바이다.

 

아직도 섬마을의 현실은 국가의 현실이 곧 종교의 현실이 되어 별다른 변화는 없다. 어쩌면 그런 바람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무리한 발상이었는지도 모른다. 신부님의 말씀처럼 그래도 교회가 열리고 교우가 머물며 그 맥이 이어지는 신비는 모든 것을 하늘에서 이루시는 것 같다. 어떤 제도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보다 그렇게라도 가톨릭이라는 그리스도 교회를 전하고 생활하는 그 자체를 주님의 마음으로 인정 해야 한다는 말씀이 가슴에 새겨져 느껴진다.

 

때로는 주님을 찾아 미사에 오시는 사람들의 마음이 말씀과 성체에 있지 않고 각자의 소망을 채우기 위한 방편에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고 그것이 오류라고 단정지어 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당신께서 친히 세우신 사도로부터 봉헌되는 약속을 이루어 주실 것이다는 믿음의 확신이 더 깊어지고 있다. 미약한 인간들의 간사함조차도 당신께 구하고 얻으면 채워 주시겠다는 약속의 신비가 이루어지는 현장이 사도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토록 무한한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에게 주시고자 세우신 약속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교회의 사도좌를 존중하며 그 역활에 찬미를 드린다.  ㅡ아멘ㅡ

 

ㅡ"시몬 바르요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마태오16,17ㄴ-19ㄱ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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