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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0) 건망증
작성자유정자 쪽지 캡슐 작성일2005-02-23 조회수871 추천수6 반대(0) 신고

 

오래전부터 자신의 기억에 대해 믿지 못하는 현상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현관문을 잠그고 나왔던가? 가스 중간밸브는 잠궜던가? 보일러는 끄고 나왔나? 불과 몇분전의 일인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겁니다. 버스를 타고가다가 아무래도 불안하여 다시 집에 간적도 있고 택시를 타고가다가 차를 돌려 집에 온적도 있습니다. 대부분은 모든 상태 다 제대로 되어 있었습니다. 택시기사 아저씨에게 나 집에 현관문을 안잠그고 온 것 같다고 다시 차를 돌리자고 하면 아! 문은 잠그고 다녀야지요 하며 선선히 돌려줍니다. 확인하고 올테니 잠깐 기다려달라 하고 가보면 문은 잘 잠겨져 있습니다. 문 열려있던가요? 하고 기사 아저씨가 물으면 속으로 창피한 생각에 글쎄 안잠궜네요 하고 거짓말을 둘러대고 아저씨는 어휴! 큰일날번 했네요 라고 합니다. 이쯤되면 얼마나 자신에게 짜증이 나는지 아세요?

 

그래서 외출할땐 주문처럼 외우는 몇가지의 확인절차가 있습니다.

주방 가스 중간밸브 내리기

보일러 끄기

TV 끄기

현관문 잠그기

그런데 요 근래는 한가지가 더 추가되었습니다.

컴퓨터 끄기

컴에서도 화재가 났다는 뉴스를 듣고나서 부터 이것도 반드시 확인해야할 사항이 되었습니다. 외출복을 입고 가방을 들고 집안을 왔다갔다하며 입으로는 주문(?)을 외우며 점검하는 내 모습이라니 정말 가관이지요.

 

이렇게 자신을 괴롭히는 건망증이 때로는 좋을 적도 있습니다.

대개 부부싸움은 아주 사소한 것으로 인해서 시작된다고 하는데 잊어버리길 잘하니 아침에 화가 났다가도 조금 지나면 잊어버려 도저히 싸움이 되지를 않습니다.

일례로 아침에 옆에 앉아 발톱을 깎던 남편이 잘못하여 내 발을 쳤습니다.

무지 아파 아프다고 비명을 질렀는데 남편은 발톱 깎으며 TV의 뉴스에 빠져있어 신경도 쓰지 않았죠. 어찌나 약이 오르던지 그때부터 입 딱 다물고 출근하는데 내다보지도 않았습니다. 점심때쯤 전화가 걸려옵니다.

뭐하시나? 하는 남편의 말에 그때서야 까맣게 잊고 있었던 아침일이 생각나서 왜 아침에 아프냐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냐고 볼멘 소리를 하면 (그랬어? 난 몰랐지, 그래서 부어있었던거야? 난 왜 갑자기 이 여자가 말을 안하나 했지. ) 합니다.

사실은 남편도 건망증이 있어 다소 트러불이 있었어도 곧 잊어버리고 생각이 나지 않으니 싸움이 안됩니다.

무언가 일이 있어 심사가 틀렸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까맣게 잊어버려 원인이 뭔지가 실종되어버렸으니 싸을일이 없어져 버리는 겁니다.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걸려온 전화에 수다 떨다보면 몇십분전에 있었던 트러불같은건 까맣게 잊고 맙니다.

부부싸움 해서 좋을것  하나도  없으니 이런 건망증은 있어도 괜찮겠지요?

 

그런데요.

또 이런것도 있습니다.

은혜는 바위에 새기고 원수는 모래에 새기라는 말이 있는데 원수를 모래에 새기는 것까지는 좋습니다. 그런데 종종 은혜까지 모래에 새기는게 문제입니다.

하느님의 은총까지도 종종 잊어버리니 더 문제이지요.

살면서 주님의 은총이라 여겨지는 경험을 수도 없이 하면서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자꾸 잊어버리는 겁니다.

영세받던 해의 일입니다.

4월쯤이었던가 부활절에 세례를 받았는데 7월에 우리집 가장이 직원들과 승용차를 타고 가다가 88도로에서 대형 전복 사고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밖으로 튕겨져 나가고 남편은 잠시 기절하고 차는 구겨져 폐차가 될 정도의 대형사고였는데 기적적으로 다섯명 모두 무사했습니다. 보험사 직원이 현장을 보고 기네스 북에 오를 일이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바로 사고 난 그 시간에 우리집에선 팔십이 다 되신 레지오 단원  두 분이 방문하여 기도를 해주고 계셨습니다. 다섯명의 직원들이 모두 무사했던건 그 기도의 은총때문이었다는 생각을 지금도 합니다. 

그 후에 아들이 수능시험 보던 해입니다.

제발 요 점수만 나오게 해주십시요 하고 몇달을 기도했는데 나중에 정말로 소수점 하나 틀리지 않는 그 점수가 나와 무난히 가고 싶은 학과에 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당시의 신앙은 다분히 기복신앙같은 것이었지만 그래서 은총이라 여기기 보다는 우연의 일치쯤으로 돌리는 무례를 범하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분명 은총이었다고 확신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후 나는 입으로는 은총이었나 하면서도 곧 잊어버리고 6년간을 냉담하고 말았으니 은혜를 모래에 새기고 만 셈입니다.

지금도 일상을 살면서 수없이 그런 잘못을 하고 있는 자신을 봅니다.

건망증으로 인해 다른건 다 잊어도 주님의 사랑과 은총에 대한 감사와 기억만은 항상 주문 외우듯  마음속의 바위에 새기면서 사는 삶이 되기를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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