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278) 인간 관계가 힘들 때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5-02-23 조회수1,072 추천수9 반대(0) 신고

2005년2월23일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성 폴리카르포 주교 순교자 허용 ㅡ예에미야18,18-20;마태오20,17-28ㅡ

 

           인간 관계가 힘들 때

                                 이순의

 

 

묵상글을 쓰면서 측근에 머무는 가족이나 지인들 그리고 벗님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평소에 내 자신이 나를 평가하기를 그렇게 좋은 점수를 허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묵상글은 상당히 예민하게 일상과 생활에서 벌어진 일들을 나열해야 하는 생활 묵상글이기 때문이다. 성서를 공부해서 쓰자니 신학을 밥 먹듯이 공부하시는 분들께 분심을 드릴 것 같았고, 교회사를 써 보려고 생각하니 너무 방대했으며, 교리를 풀어보자니 오류를 범하게 될 책임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맨날 맨날 끄적거리던 습관을 동하여 생활묵상을 쓰기로 했다. 의외로 생활을 묵상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교우들을 보면서 생노병사와 희로애락의 모든 이치가 주님께서 비롯 되며 주님께 봉헌 된다는 사실을 신앙 안에서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나의 화살기도인 <Contenflazione in Azione! = 생활속의 관상!>을 모태로 정하고 시작했다. 그 결심에는 지금도 크게 변화되거나 다른 마음을 먹고 있지 않다. 앞으로도 다른 변화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1년이 훌쩍 넘어버린 지금의 시점에서 상당한 부작용을 실감하고 있다. 내가 내 입으로 어디서 글을 쓴다고 말한 적은 없지만 내가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당한 수의 가족과 지인, 벗들까지도 알음알음으로 나의 묵상글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내 입으로 말하지 않아서 그들도 스스로 발설하지는 않지만 암묵적 느낌을 제공하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묵상글만 쓰는 사람은 아니다. 졸작이지만 소설도 쓰고, 수필도 쓰며, 기타 잡문들을 무수히 작업해 두고 있다.

 

그 중에 묵상글은 매우 단편적 일 수 밖에 없다. 당일의 복음과 소재가 맞아야 하고, 무엇보다도 허구적인 묘사 보다는 사실이나 진실에서 신을 향해 절실한 내 마음이 담겨져야 한다. 그러므로 쓰는 내 자신의 입장에서 신을 향해 있는 매우 개인적이며 체험적인 글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장편소설처럼 어떤 하나의 소재나 주제를 가지고 그 부분에서 파생된 미세한 생활이나 갈등까지도 담아내야 하는 글은 더욱 아니다. 번잡한 묵상을 하다가도 건더기가 너덜거릴 때는 가차없이 잘라내야 한다.

 

또한 생각은 이런데 복음이 맞지 않으면 복음을 바꿀 수는 없다. 내 마음을 써 놓은 묵상글에서도 복음적으로 변환시키는 작업을 다시 해야한다. 묵상글은 나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변론이 아니라 나의 일상과 생활 안에서 주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한 봉헌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상처일 때는 위로가 되기를 바라고, 희망일 때는 소원이 되기를 바라고, 갈등일 때는 일치를 바라며, 분노일 때는 치유를 바라고.... 묵상으로 쓴 내용들 중에 허구로 쓴 묵상글은 단 한 편도 없다. 그렇다고 그것들이 꼭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쓴 적도 없다.

 

묵상글은 그날의 찰라이다. 그 찰라가 내 인생의 전부도 아니고, 그 찰라가 내 계획의 모두도 아니고, 그 찰라가 미래를 장담하거나 가졌던 소망조차 취소하는 단절의 순간은 더욱 아니다. 그 찰라는 여정의 일부일 뿐이다. 비록 묵상글은 내가 썼으나 묵상의 실체는 읽으시는 각자의 몫이다. 공감을 하실적에는 위로가 되실 것이고 반감이 들 때는 다른 생각을 하시며 자신을 돌아 볼 것이다. 그것이 묵상글의 목적이며 또한 의미이다. 그런데 내가 쓴 묵상글로 인하여 내가 불편을 격고 있다. 그것이 나와 친분이 있을 수록 더욱 그러한 것 같다. 

 

묵상이 묵상으로 연결되어서 성찰의 영역을 넘보는 것이 아니었다. 묵상을 통해 각자의 경우나 입장에서 지혜를 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나의 사생활을 탐독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그래서 사석에서 만남이 이루어지면 묵상의 뒷면은 아랑곳하지 않고 확정적인 결론을 들고 나와서 결단을 지어버리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마치 너 보다 너의 속을 더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쉽게 결단지어 주시는 영광(?)을 배풀어 주신다. 혹자는 그 결단을 내 입으로 확인하려는 무례함을 들고 나오기도 한다.

 

인생은 종착역이 딱 한 번 뿐이다. 그 종착의 시점 조차도 인간의 몫이 아니라 주님께서 찍어주셔야 끝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어느 묵상글을 읽고 그 시점에서 종료된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다. 나는 한참을 생각한다. 저분이 왜 저런 말을 지금 내 앞에서 하는 것일까? 묵상글 빼고는 내 입밖으로 발설한 적이 없는 갈등에 대하여 결단을  요구 했을 때는 난감하기 이를 데가 없다. 그렇다면 순식간에 나는 궁지에 몰리게 되고, 변명도 아닌 변명을 하게 되고.....

 

불편한 자리를 물러나와서야 생각한다. 저 사람이 나의 묵상글을 읽고 있다고. 그리고 나는 마음속으로 욕설을 지껄인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친분관계에 놓이게 되면 허물 없이 말을 터 놓게 된다. 그 말들 중에는 그 현장이 아닌 후의 모든 것을 장담하거나 확정지은 자신감으로 허물없이 말을 틀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훗날 그 말 때문에 공격을 당하게 되리라거나 모욕감을 느끼게 될 줄을 알고 허물을 트고 사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자리가 마련되고 세월이 깊어지다 보면 서로의 말들이 허물 없이 오고가고..... 남의 생각도 듣다보면 나의 생각도 얘기하는 것이고 그것이 사람의 관계다. 그런 경우는 대부분 깊이 내면의 갈등구조까지 너스레로 푸는 사람은 흔하지 않을 것이다. 그냥 쏟아지는 말에 어울려서 같이 쏟아버리게 되는 경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이야 말로 극히 개인적이며 한정적인 묵상글을 쓰고 있지만 나는 모임에 다녀와서 몹시 큰 분노를 하고 말았다. 평소에 자식이 잘 컸다는 말을 입에다 달고 하시는 분이 갑자기 내 아이에 대한 질문을 해 왔다. 딱히 정해진 바도 없는데.....

 

더구나 불과 얼마전 까지만 해도 진로에 갈등이 없었던 녀석이 갑자기 진로에 갈등이 생겨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엉겁결에 우리 아들 잘 컸다는 대답으로 땜방을 했다. 그런데 대뜸 하는 말이 자기 자식은 누구나 다 잘 컸다고 생각한다는, 자식 자랑은 누구나 한다는 말로 분위기 자체를 깔아 버리는 것이다. 평소에 자식에 대한 말을 누구보다도 많이 하는 사람의 언행이라서 황당하였지만 순간의 말을 상실하고 말았다. 돌아 오면서 **엄마는 **랑 ++가 잘 컸다는 말을 맨날 하더라는 말로 대꾸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억울 할 지경이었다.

 

참! 사람이 살아가면서 별 것도 아닌 일에 흥분하는 나도 평범한 사람임을 인식해 줄 수는 없는 것일까? 왜 자기들은 해도 되는 말을 나는 하면 안되지? 그리고 사람이 살다 보면 내 속의 마음을 다 털어 놓고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단지 묵상글을 쓰는 나의 입장은 나의 내면의 갈등들이 노출되고 있다는 것을 자타가 인정하고 있다.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단편적일 수 있으나 근접한 근거리의 입장들은 그것이 하나의 조롱거리 쯤으로 보이나 보다.

 

그래도 나는 묵상글은 계속 쓸 것이다.  

나는 어느 것도 인생을 장담한 적이 없다. 나는 묵상글을 필요로 하는 나약하디 나약한 한 인간일 뿐이다. 묵상글의 단편이 내 삶의 전부가 될 수 없듯이 인생은 조금씩 조금씩 찰라가 역어가는 기나긴 여정이지 않겠는가?  

 

가족이나 지인, 그리고 벗님들께서는 묵상글의 뒷면에는 무수함이 함께하고 있다고 보아주시기 바란다. 정지된 내가 아니라 시시때때로 변하고 생동하며 생각하는 내가 있다는 것을 살펴주시기 바란다. 한 편의 묵상글로 생각을 멈추지 말으시고 좀 더 넓게 날개를 달아 보시기 바란다. 인생은 순간의 생각으로 결정되는 나무토막이 아니라 산천을 누비고 흐르는 물과 같은 존재라고 표현하고 싶다.

 

이루는 것은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ㅡ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어가 사형선고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이방인들의 손에 넘어가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며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다. 마태오20,18-19ㅡ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