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31) 들러리는 이제 그만
작성자유정자 쪽지 캡슐 작성일2005-02-24 조회수1,125 추천수7 반대(0) 신고

 

오늘 아침 우리집 식탁을 들여다본다.

총각김치, 나박김치, 달래무침, 양념한 새우젓, 김, 상추겉절이, 쑥갓과 상추 한접시, 고추장, 무생채, 쇠고기 장조림, 세어보니 열가지 반찬이다.

이만하면 가지 수로 보건대 구첩반상이며 쇠고기도 새우꽁댕이도 있으니 구색 맞춘 산해진미에  진수성찬이라 할 만 하지만 중요한건 별 맛이 없는데다 장조림만 빼놓고는 벌써 열흘 가까이 매 끼니때마다 오르는 단골메뉴다. 놓았던거 또 놓고 놓았던거 또 놓고 냉장고에 넣었다 꺼냈다 마르고 닳도록 되풀이되는 일이다. 그리고 가장 종요하다할 국이나 찌개가 없다.

드디어 어제저녁 남편이 한마디 했다.

당신 정말 대단한 여자야! 맨날 그렇게 입맛이 없어 어쩌냐고 하면서도 줄기차게 같은 반찬만 놓고 있으니......

남편은 오늘 아침에도 또 첫숟갈부터 보리물에 밥을 만다.

요 근래 계속되는 풍경이다. 아침엔 영 더 입맛이 없다고 그렇다고 굶을 수는 없는일 물에 만 밥을 남편은 억지로 입에 떠넣는다.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입맛을 잃은 사람에게 뭔가 좀 입맛 돌아올 수 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어야 하는게 내 도리일텐데 말로만 (왜 그럴까? 큰일이네) 하고 입으로만 걱정을 하고 있으니.......

젊었을 적에는 반찬타박을 많이 하던 남편의 말에 즉각적인 반응을 하며 새로운 것을 해보려 노력도 했는데 요즘은 나이먹어 배짱만 늘었는지 기운없고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입에 달고 이렇게라도 내가 살아 버티며 내자리를 지켜주는게 당신과 아이들에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아느냐고 은근히 생색을 내면서 내 할일을 다분히 유기하고 있는 자신을 본다.

아침에 국도 찌개도 없는 밥을 먹자니 나역시 입안이 깔깔하여 가지 수만 많은 밥상이 복잡하기만 하다. 매 끼니때마다 그래도 한가지는 새로운 반찬을 해놓기는 한다. 나머지는 전부 단골손님이다. 오늘아침 밥상의 새손님은 장조림이고 나머지는 붙박이 들러리다.

 

들러리!

문득 지금껏 세상을 살아오면서 늘 들러리같은 인생을 살아왔다는 생각을 한다.

한번도 적극적으로 중심에 서서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아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늘 맨 뒤에 앉아 얼굴을 정면으로 보이지 않게 남이 하는대로 따라가며 한번도 생의 한가운데서 적극적인 자세로 살아본 적이 없다는 것을 느낀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주인공인 두 세가지 반찬옆에 젓가락 한번 가지 않는 그저 가지 수만 채워주는 우리집 밥상의 반찬처럼 들러리 같은 존재로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먹지 않는 반찬, 여러날이 지나 이제 부패가 시작되고 있을지도 모르는 반찬들은 과감히 버리기로 작정한다. 상추겉절이는 너무 간장에 절어 이젠 짜서 먹을수가 없다.

무생채도 만든지 열흘도 훨씬 넘은것 같다. 아무도 젓가락질 한 번 하지 않는 반찬을 왜 줄기차게 올려놓고 있는가? 밥상이 풍성해보이라고, 반찬이 많은것 처럼 보이라는 내 교활한 술수였다.

 

술수도 이젠 버리고  먹지않는 반찬은 과감히 버리기로 했다.

그리고 오늘저녁엔 새로운 손님으로 서너가지 반찬을 만들어보려 한다.

머리속으로 메뉴를 생각해보았다.

노릇노릇하게 튀긴 갈치 한마리

팽이버섯 양송이에 감자석건 양파를 듬뿍 넣어 보글보글 끓인 찌개

들기름 넉넉하게 넣어 볶은 산나물

아! 입맛이 저절로 돋는것 같다.

노력하지 않는 세상이 줄 거라곤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머리를 써서 손을 부지런히 움직여서 해야만이 잃어버린 입맛도 둘아오지 않겠는가.

가만히 우두커니 앉아 있으면 누기 잃은 입맛을 돌려주겠는가.

밥상의 주인공이 되어 식구들의 젓가락이 바쁘게 부딪히는 반찬처럼 자신도 그런 존재가 되기를 바래본다. 늘 변죽에서 우물대는 존재가 되지말고 한가운데로 나아가 적극적으로 사는 존재가 되기를 바래본다.

 

좀 전에 구역장님의 전화가 왔다.

목동성당에서 오늘 반구역장 교육이 있으니 참석하라고....

한달에 한 번 있는 교육에 안 간지가 벌써 반년이 넘었다.

작년 판공성사표를 돌릴때는 수많은 교우들이 이사를 가서 너무 편했다.

재건축으로 인해 다섯개의 아파트 건축현장이 들어와 있는 우리 반은 거의 모든 교우가 이사를 가서 공동화 현상이다. 일부 단독 몇개와 새로 지은 집의 몇몇 교우에게만 성사표를 돌리니 얼마나 편한지 몰랐다.

교우들이 없으니 반장은 편하다?

당분간은 반모임도 못하니 반장은 편하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돼지!

하루 빨리 재건축이 끝나고 이주했던 교우들이 돌아와 반모임도 다시 하고 성사표도 발바닥이 아프게 돌려야 한다.

나는 이제 들러리같이 미지근한 삶은 살지 않기로 했으므로, 적극적인 주인공의 삶을 살기로 다짐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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