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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79) 어머니의 부수입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5-02-24 조회수991 추천수13 반대(0) 신고

2005년2월24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ㅡ예레미야서17,5-10;루가16,19-31ㅡ

 

             어머니의 부수입

                               이순의

 

 

내 자신이 가톨릭을 정말로 사랑하는 종교인임을 실감하는 때는 사순시기와 대림시기인 것 같다. 좀 밝고 즐겁게 지내야지 하면서도 벌써부터 대 참회로 들어가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보는 것 마다 성찰과 연결되고, 만나는 것 마다 돌아보며, 생각은 한없이 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성당에도 일요일 한 번 겨우 미사 시작시간을 지나서 시작 성가가 끝날 때쯤에 들어 갔다가 도망나오다 시피 뛰쳐 나온지가 꽤 오래 되었는데도 대림과 사순의 마음은 역시 그다지 평화로운 생각들로 채워지지 못 하고 있다. 

 

내집의 아침은 화장실에서 시작된다. 정동향에 위치한 화장실의 작은 유리창에는 어두컴컴한 방에 비하여 대낮처럼 밝다. 변기에 앉아 있으면 그 빛이 졸리운 사람의 마음을 참으로 기분좋게 해 준다. 몽롱한 상태로 숙인 고개를 들지 않고 볼일을 볼 수 있다면 비추인 햇살에 감겨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이 꿈을 꿀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변기에 앉아 고개를 들면 사연 깊은 두루마리 휴지가 무거운 체중을 이기며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자동차 타이어만한 공공 장소용 휴지가 가는 나이론 끈에 달려서 복잡한 심성을 드러 내고 있다.

 

어머니께서 일을 다니실적에 어머니께도 부수입이라는 것이 있었다. 항간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나라에서는 부수입이 없는 일은 아무도 하지 않는다. 라는 말이 있다. 하다 못해 거렁뱅이 자리도 부수입이 있어야 동티가 난다라는 말이 있다. 청소일을 하시는 어머니라고 맑은 국물만 마시지는 않으셨다. 휴지 한 개라도 비누 하나라도 숨겨 오셨다. 그것들을 모아서 나누어 주시기도 하고 쓰시기도 하셨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몹시 못마땅해 하였다.

 

어렸을적에 어린마음으로 바라본 부엌데기들의 모습이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철부지라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볶은 깨소금을 덜어 내거나 참기름을 덜어내는 모습들이 싫었고, 아버지께서 수돗가에 금반지를 벗어 놓고 세수를 했는데 금방 가 보니 금반지의 흔적이 사라져 버린 일도 싫었고, 남의 사람을 두고 살았던 친가에서의 그런 기억들은 매우 싫었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그런 모습들이 적응이 되지 않을만큼 싫은 모습이었다. 그래서 어머니께 그런 물건들을 가져 오시지 말으시라고 단호히 거절을 하고 말았다.

 

그런데 시동생이 사고를 쳐서 지질이도 가난한 나의 모든 것을 팔아버린 후로는 정말이지 그렇게 얻은 휴지 하나라도 주셨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다. 그래서 몇 년간 휴지나 비누 샴푸 이런 화장실 용품을 어머니의 부정한 수집의 덕으로 걱정없이 쓸 수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집에 출입하는 것을 단절해버린 후로 그런 생활용품도 거절해 버렸다. 어머니께서 은퇴를 하시고 내가 어머니의 보호자가 되어 생활을 책임지으면서 어머니는 오실 때마다 모아 두신 그런 생활용품을 한 개씩 가져 오신다.

 

그런데 전에는 작은 두루마리 가정용 휴지였는데 지금은 업소용 자동차 바퀴만한 휴지를 가져 오신 것이다. 그것도 이제는 직장에 다니지 않아서 생길데가 없으니 줄 것이 없다.고 하시며 놓고 가신다. 그렇게 무거운 휴지를 가정에서 쓴다는 것은 몹시 불편하다. 마땅히 달아놓을 설치 물도 없지만 들었다 놓았다 하기는 보통으로 무거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아들아이는 그 휴지 쓰기를 매우 싫어한다. 휴지를 놓고 가셨으니 쓰기는 써야 하는데 아까운 것을 갖다 버릴 수도 없는 일이고. 고안해 낸 생각이 화장실 벽에 못을 박고 가운데 구멍에 끈을 달아서 매 놓았다.

 

변기통에 앉으면 자동차 바퀴만한 육중한 휴지가 가는 나일론 끈에 무겁게 달려 나를 내려다 보고 있다. 그것이 매일 아침의 첫 묵상이 된다. 별별 생각이 다 난다. 어렸을 적의 부엌데기들이 어린 나를 흘겨보며 자기들 끼리 눈을 끔적거리던 생각부터 물품 관리를 하느라고 어머니의 일터에서 가방을 수색하신다는 소리까지! 부엌데기들이 내가 보는 앞에서 필요충족을 누렸듯이 수색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께서 저런 잡동사니들을 물어다 놓은 것을 보면 참으로 매일의 아침이 복잡해지고 만다.

 

나는 명절의 후유증을 좀 길게 하고있다. 어머니께 드리려고 고아 놓은 뼈 국물을 계속 끓여 놓기만 할 뿐이다. 모아진 폐지들도 상자에서 넘쳐 현관을 어지럽히고 있다. 그렇게 복잡한 나를 내가 발견하면서 훗날에 후회의 몫도 내가 짊어지게 될 몫이 가장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가 악인이셔서 그렇게 하신것은 아니었다. 몰라서! 너무나 몰라서! 몰라도 너무 몰라서! 살아 오신 여정이 본 것도 없었고, 배운 것도 없었고, 들은 것도 없었으니 본 것도 많고, 배운 것도 많고, 들은 것도 많았던 나에게 미치지 못한 탓이었다. 

 

나의 분석과 계산으로는 그렇게 맞아 떨어진다. 그런데도 현실이 너무나 각복한 짝궁을 따라 살면서 격어야 했던 내 자신에게 더 큰 동정심이 동하여 그 분석과 계산은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아무리 보고, 배우고, 들은 것이 없다고 해도 엄마인데 엄마인데 엄마인데..... 나의 생각은 보름이라서 나물도 무치고 찰밥도 찌고 조기도 구워서 오시고 싶어하시는 어머니를 오시라고 해야한다고 명령을 했다. 그런데 마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나물도 마련하지 않았고, 찰밥도 찌지 않았고, 부럼조차 장만하지 않았다. 그냥 정월 대보름이 갔다.

 

나는 변기에 앉아서 그렇게 짧은 용무를 보면서도 어머니의 부수입을 수십 수백 번동안 패데기를 친다. 정말로 열심히 살았는데, 정말로 잘해 드렸는데, 동생들에게도 최선을 다했는데, 맏이라는 의무감을 상실하지 않으려고 정말로 정말로 피눈물 나게 살았는데..... 그러다가 무거운 두루말이 자동차 바퀴를 돌려 휴지를 뜯는다. 아무래도 저 자동차 바퀴를 몽땅 폐기처분 해야 할 것 같다. 도무지 매일의 아침을 평정으로 열 수가 없을 것 같다. 단편적인 삼자의 입장은 내가 무엇인가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바란 적도 없지만 내것을 고집해서 욕심을 부린 적도 없다. 그것이 가족으로서 지녀야 할 기본을 그들에게 갖추라고 요구하지 않은 원인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받고 마는! 그리고 무엇이 잘 못 되어가고 있는지 아무런 생각도 없었던! 나는 자식 때문에 짝궁과 살기도 하지만 짝궁이 너무 불쌍해서 살기도 한다. 내가 가장 못 견디는 일은 형에게 붙어서 사는 동생들이 형을 무시하는 것이다. 수천 수만 번을 일러도 고처지지 않는다. 그 세월을 격으면서도 나는 단 한 번도 짝궁이 보는데서 시댁과 부디친 적이 없다.

 

내가 서러워도 내가 짝궁과 살고 있는 한은 짝궁이 나의 자존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짝궁은 나의 맺힌 마음을 실감하지 못한다. 그것이 나의 원칙이다. 지금도 동생들은 형이 개입되지 않은 일이라고 해도, 형이 너희들의 하수인이 아니니까 형을 다루지 말라고 일러도, 이제 나이 40줄이 넘었으면 형님에게 연세 50줄이 넘은 대우를 할 줄 알아야 사람이라고 해도, 영문도 모르는 형에게 전화를 해서 형을 고문한다. 정말로 가난한 집의 맏아들 자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동생들에게 당하고 만다.

 

나는 그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존재하는 모든 욕설을 동원하여 지껄인다. 그런 것은 어머니가 단호해 져야 하는데 나는 내가 단호져서 짝궁을 지켜야 했으니! 맏이의 의무만 존재하고 배려는 없었던 시간들에 대하여 나는 진저리를 흔들고 있다. 정말로 왜 그러셨을까? 왜 그러셨을까? 지질이도 없는 내 살림을 몽땅 쓸어먹은 시동생이 사고를 쳐서 두 번씩이나 감옥을 갔을 때는 그렇게도 당당히 쫓아 오셔서 앞장서라고 하시더니, 내 눈으로 보아야 안심을 하신다고 시어머니 티를 내시느라고 억압을 하시더니 큰자식이 국가가 벌인 사정에 걸려 집단적으로 감옥에 가야만 했을 때는 면회를 가시라고 가시라고 마련해 드린 날자에도 가시지 않아버린......

 

사실 시댁의 구조상으로 누구도 시동생의 법적인 일에 나설만한 인물이 없었다. 그렇게 엄청난 송사는 모두가 나의 몫이었으므로 돈도 없고 대책도 없는 어머니는 피해자들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싸우고 다니느라고 제정신이 아니었던 나의 힘든 노고를 가중시킬 뿐이었다. 그래도 어머니시니까! 어머니시라서! 자식을 보시겠다는데..... 그런데 왜 큰자식은 보고 오시라고 해도, 보고 오시라고 해도, 보러 가시지 않았는지?  

 

왜 그러셨을까? 정말 번번히 매번 왜 그러셨을까? 화장실 벽에 걸려있는 어머니의 부수입은 물음표 처럼 늘어져 있다. 풀어진 휴지의 모양이 그대로 물음표다. 어쩌면 두고 가신 자동차 타이어만한 휴지가 다 떨어지고도 그 의문은 짐작조차 어려울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풀리지 않을 노여움만이 나의 짐이 되어 후회로 탄식으로 나머지를 남길 것이다. 그것이 여인으로 살아가는 내 복이고 운명이었다고 해도 나는 그 억울한 분노들을 쉽게 삭히지 못할 것이다. 신이 정해 준 어쩔 수 없는 행보였다고 해도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가 자식을 생각해 보았다. 나에게도 아들이 있으므로 아들의 배우자감을 생각해 보았다. 내 자식의 배우자는 이런 환경에서 자라지 않은 규수를 고를 것인가? 단손대의 조용하고 명절이라 해도 딱히 걸리적거리지 않은 그런 집의 규수를 탐하는지를 내 양심에게 물어 보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나는 그런 규수를 거부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고생도 하면서 눈물 흐르는 것도 보고, 인고에 시달리는 것도 보고, 그러면서도 굳게 마음을 다스리시는 모습도 지켜보며 자란 규수를 얻고 싶었다. 그래야 깊이도 있고, 바탕에 깔린 기본적인 심성도 있고....

 

참으로 묘한 심경의 반란이었다. 내 자식에게 조용하고 단순한 가정의 규수를 구해주고 싶지 않다는 사실이 참으로 기이한 인간의 면모가 아니던가?! 간혹 벗들 중에서 명절마다 지손이라는 이유로 시가에 가지 않아버리는 모습들을 보게 된다. 더구나 귀찮다는 이유로 지짐이 한 장도 지지지 않고 대충 넘어가는 모습들을 보며 어쩐지 저 모습은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시가에 가지 않으면 집에서 동태전이라도 지질 때 아이들은 그 모습을 배울 것인데! 저 아이가 내 며눌아이가 된다면 하는 생각을 해 볼 때 결코 아니라고 고개가 저어지는 나를 발견한다.

 

명절이면 허리가 부서지게 아프지만 그걸 참고 일하는 뒷모습을 자식들은 배우고 있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가 그 모습을 참을 줄 알 것이고...... 명절날 새벽이 분주했던 나의 추억은 어른이 되어서도 참으로 좋았다. 그런데 명절날 아침에 늦잠을 자고 일어나 있는 음식을 대충 먹고 자랄 아이의 기억을 생각해 보면 그래도 나의 이런 모습들이 내 아이의 기억 어디에는 강인한 정신력으로 자리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게 된다. 고통스런 과거보다 자식을 생각하는 미래가 또 나에게 희망으로 연결 되지 않겠는가?

 

이 세상에 며느리가 나 혼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서 사순시기에 이런저런 며느리들의 참회가 이어지리라고 본다. 그들과 함께 동참하며 많은 시어머니들께 용서를 구하고 싶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처도 어머니는 나의 뿌리이다. 누구도 어느 동생도 나만큼 어머니를 가까이 하지 않는다. 그 책임감 만으로도 나의 도리는 이행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마음 깊이에서 늙는다는 것이 억울하다는 생각을 한다. 몇 해 전만해도 당신이 누구에게도 신세지지 않고 혼자 산다고 큰소리를 뻥 치셨었다. 그런데 벌써 <너가 오지말고 나를 오라고 해라.>하신다. 나라고 해서 어머니의 그 모습을 피해 갈 수 있겠는가?!

 

내일이라도 찰밥을 해 놓고 어머니를 오시라고 해야겠다. 뼈국을 그만 달여야겠다. 그래도 어머니의 부수입은 내일 아침이면 화장실에서 내 마음을 수백 번씩 갈라 놓을 것이다. 이제는 기억 속의 부엌데기들에게도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 보아야겠다. 세상을 산다는 것이 다 그렇지 않겠는가?! 부엌데기들에 대한 기억이라도 완화 되어야 그 자동차 타이어 같은 어머니의 부수입도 좋아 보이지 않겠는가?! 지금 묵상을 끝낸 이 마음이 내일 아침의 변기에 앉아서도 변하지 말아야 할텐데.... 화장실에 비추는 아침햇살이 더욱 고운 내일이기를 바란다.

 

사순시기에는 이렇듯이 내면의 갈등들이 나를 괴롭히고 있다.

나는 확실한 가톨릭 신앙인이다.

주님! 수 없이 많은 시어머니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수 없이 많은 며느리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주님! 저희를 구원하소서.

ㅡ아멘ㅡ

 

ㅡ부자는 다시 '아브라함 할아버지, 그것만으로는 안됩니다. 그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찾아가야만 회개할 것입니다.' 하고 호소 하였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루가16,30-31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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