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33) [단상] 우물
작성자유정자 쪽지 캡슐 작성일2005-02-28 조회수786 추천수5 반대(0) 신고

 

               <어제의 묵상>

 

우리 고향집엔 부엌 뒷문을 열고 나가면 넓은 뒤란이 있고 한옆에 우물이 있었다.

우물가에서 쌀도 씻고 채소도 씻는걸 보았는데  어느 순간 메워져 버렸다.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 집안에 우물이 있는게 안좋다는 얘기라도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일곱여덟살때쯤 보고 못보았으니 아마 그 얼마전에 동생이 죽은 이유때문인지도 모르고 아니면 수질이 나빠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건 분명 아닐거다. 수질이 나쁘면 허드렛물로 쓰게 놔둘일이지 우물을 없앨것 까지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난 그 우물을 생각하면 왠지 기분이 을시년스럽고 나빠진다. 역시 집안에 우물이 있는게 지금 생각해도 별로 좋은 기분이 아닌것은 물이 주는 미묘한 서늘함때문인것 같다. 무언가 신비롭기도 하지만 물은 또한 귓(鬼)기스런 느낌도 주기때문이다. 그런 물이 집안에 바로 뒤란의 우물속에 퍼렇게 잔뜩 고여있다는것이 영 기분을 꺼림찍하게 했던건 아니었을까? 아무튼 그 우물이 없어지고 판판한 땅이 되었을때 어린 마음에도 좋았던 기억이다.  

 

그 후로 꽤 떨어진 공동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먹었다.

어머니와 할머니가 동이로 부지런히 이어 나르기도 했고 머슴일 하는 아저씨가 물지게로 퍼날라 커다란 항아리를 채웠다. 빨래는 냇가에 가서 했다.

공동우물은 산자락을 깎고 오목하게 자리잡고 있었는데 물맛이 좋기로 인근에 소문이 났었다. 옻올린 사람이 그 물에 목욕을 하면 낫는다고 해서 옻우물이라고도 불렀다.

아치형으로 둥그렇게 산을 깎아내고 앉힌 우물은 밑바닥이 훤히 보일만큼 깊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가물어도 그 우물은 마르지 않았다. 꽤 높은 산에서 내려오는 수맥이 원체 풍부했나 보았다. 대개는 두레박도 별 필요없이 바가지로 물을 펐는데 잔잔한 우물물을 들여다보면 거울처럼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아이들은 즈이들이 무슨 나르시스라고 우물물에 비친 제얼굴을 들여다 보곤 했다.

한번도 약을 치지 않았고 수질검사한 적도 없었지만 동네에 장질부사나 전염병 같은것이 돌지 않은걸 보면 우물물이 퍽이나 깨끗했던 것같다.

 

오늘 미사에서 신부님이 읽어주신 복음에 사마리아 여인과 야곱의 우물에서 만나는 예수님 이야기를 듣고 난 수십년전의 그 우물을 떠올렸다.

우물이 집안에 있을때는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으나 멀찌감치 떨어진 산 밑에 있는 우물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그 우물은 언제나 우물 밑바닥의 모래가 훤히  보여 시퍼런 물로 도무지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처럼 무섭지가 않았다. 물이 얕아서인지 물빛이 밝고 맑아서 친근감을 주었다. 여름에도 물이 어찌나 찬지 목욕을 하면서 추워했던 기억, 냇물에선 물뱀이 나올까봐 밤에는 꼭 우물에서 목욕을 했던 기억, 삼복에 우물가에서 또래들과 히히덕거리며 물을 끼얹던 기억이 떠올랐다.

 

관상(觀想)으로 성서의 귀절에 따라 함께 그 속으로 몰입하여 가는 영성의 기도를 한지가 6개월째다. 처음엔 도무지 몰입도 안되고 잡념이 얽히고 설켜 기도가 되지 않았는데 얼마전부터 예수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느 영화에서 보았는지 어느 그림에서 본 모습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기도에 들어가면 흰색의 긴 옷을 입은 긴머리의 예수님이 늘 그모습으로 떠오른다. 마치 그림처럼 그 모습은 멀게 느껴졌는데 얼마전엔 눈동자가 아주 생생하게 가까이 보이는 거였다. 사랑으로 가득찬 인자하고 따뜻해보이면서도 어쩐지 쓸쓸함이 느껴지는 눈이어서 더 마음이 끌리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도무지 나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최대한으로 잡아도 서른셋 이상으로 보이진 않아야할 텐데 그런 청년의 모습은 아니었다. 관상하는 중에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려보려고 수개월동안 노력해보아도 여러가지 모습들이 뒤얽혀 고정되지 않던 모습이 이제 한가지 모습으로 늘 떠오르는걸 보면 내안에서의 예수님 모습은 그런 모습인가 보다.

약간 야위고 이지적이고 기품이 느껴지는 모습이다.

아직은 예수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는 판토마임 속에서 움직이는 예수님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분이 하는 말씀을 마음의 귀에 들리는 단계로까지 끌어가는 것은 관상의 숙제일 것이다.

 

미사에 다녀와서 난  옛날 우리고향의 그 우물을 야곱의 우물이라 생각하고 그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사마리아 여인을 상상하는 관상속으로 자신을 끌고 가는 기도를 했다.

내가 배우고 있는 기도가 바로 그런 기도이기 때문이다.

예외없이 예수님은 똑같은 모습으로 떠올랐다.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 세상의 고통에 힘겨워하고 그런속에서도 위안을 얻으려 촉각을 세우며 영원함을 갈구하는 그 여인의 모습에 자신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어찌나 슬픈 마음이 들던지 눈물이 날것 같았다. 기도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이성적인 사람보다 감성적인 성격의 사람이 더 쉽게 배울수 있다는 이 영성의 기도가 그동안 나는 이성적인 사람이어서 맞지 않나 싶었는데 이제 기도할때 잡념이 많이 사라지고 예수님의 얼굴이 보이니 앞으로 희망적이란 생각이다.

성서를 읽고 그속으로 자신이 따라가는 관상의 기도를 계속하다보면 아마 내가 쓰는 묵상글도 지금과는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나는 성서를 제대로 모르고 있다.

물론 신약 4대복음은 읽어보았고 다른 복음들도 미사때마다 들어 성서귀절을 들으면 대충 아는 말씀이면서도 막상 어떤 복음의 몇장 몇절이냐고 하면 하나도 모른다.

따라서 지금 내가 쓰는 묵상글은 성서의 해박함에서 나오는 결과물도 아니고 뼈를 깎는 묵상끝에 얻어지는 결과물도 아니다. 그때 그때  가볍게 일상에서 느껴지는 생각들을 글로 써본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글로 쓰면서 나름대로 얻어지는 것들이 있다. 성서도 들여다보게 되고  자신의 신앙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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