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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83) 무엇이 달랐을까?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5-02-28 조회수840 추천수8 반대(0) 신고

2005년2월28일 사순 제3주간 월요일 ㅡ열왕기하5,1-15ㄱ-루가4,24-30ㅡ

 

          무엇이 달랐을까?

                                   이순의

 

 

50년 세월동안 고장 같은 걱정없이 건강체질로 잘 살아오신 작은 언니가 이번에 격은 수술로 인해 상당한 심적 고통을 격은 것 같다. 사람이 수술이라는 결단을 취해야 할 때 즐겁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경우에 따라서 출산을 위한 수술은 그래도 여느 수술 보다는 기쁨과 희망이 있을 것이나 그 외의 어떤 수술도 겁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임할 수 있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수술의 결과에 따라서 상태변화가 극과 극을 오락가락하는 상황은 환자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상당한 충격과 안심 사이를 헤매게 하기도 한다. 다행히 작은언니의 상태는 회복을 기다리면 된다. 악성의 고약함으로 목숨을 담보해야 하는 위기는 피해주셔서 큰 걱정 같은 것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오히려 기쁨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질병에 시달리며 일생을 살고 있는가?!

 

작은 언니가 퇴원을 하고 회복기에 들면서 수술 날자를 잡아놓고 벌어진 심경의 변화들을 이야기 해주었다. 수술하다가 잘 못 되면 형부랑 조카가 세상을 헤쳐나갈 일이 아득하였다고 한다. 바깥세상만 살아오신 형부가 안살림에 밝지 못해서 걱정이고, 엄마없이 살아 보지 않은 남매가 폭폭한 세상을 도움없이 살아갈 일이 가슴이 미어지더란다. 그래서 유언을 했다고 한다.

 

재산은 어떻게 되고, 남은 돈은 얼마이며, 아이들 문제는 이렇게 저렇게 하시고, 아이들에게도 엄마가 잘 못 되면 이렇게 저렇게 해서 살으라고...... 죽을 사람이 세상 걱정을 어지간히도 많이 했던가 보다. 큰아이는 국가가 인정하는 사법시험에 합격을 했고, 작은 아이는 대학을 마치고 군복무중인데 어미의 심정은 물가에 세워 놓은 아기쯤으로 여겨 졌었나보다. 놓고 죽을 염려가 그리도 많았던지 마음을 울먹이며 지난 시간들을 돌이키고 있었다.

 

반면에 병치레만 하다가 일생을 살아온 나는 가끔하게 되는 수술이라서 가족들에게 미안한 심정이 참으로 깊었었다. 그러므로 겹쳐서 새언니의 신세를 진다는 것도 죄송하고, 어려운 살림에 부담감도 큰데 목돈 써야하니 죄스럽고, 자식은 코흘리게 동자인데 모아놓은 대책은 1원 한장 없고, 남길 것도 유언할 것도 없는 초라한 살림에 밥이나 먹고 살을랑가 싶은 짝궁! 그래서 나는 그다지 살고 싶은 애착도, 세상에 대한 연정도, 목숨에 대한 아까움도 없이 수술장에 드는 시간까지 밝게 지냈었던 것 같다.

 

그런 나도 나만의 의식은 꼭 치루었던 기억이 있다. 배를 타고 나가 본당에 가서 꼭 종부성사를 보고 보속을 하였다. 성사내용은 생각이 안나지만 죽으러 가는 사람의 구차한 언변을 주저리 주러리 고해한 기억은 없는 것으로 보아 그냥 간단히 살아온 제 죄를 모두 통회하오니 제 영혼을 주님께 맡기나이다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싶으다. 오히려 고해한 나 보다 신부님께서 섭섭하셨는지 화가 나셨는지 "너가 지금 죽으러 가냐?"고 역정을 내시며 고해소 칸막이 문을 쾅 닫은 기억만 생생하다.

 

고해를 무엇이라고 했는지? 보속이 무엇이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간단명료 했다는 기억과 작은 쪽문을 크게 닫으시며 전해주신 신부님의 상한 마음을 받아 눈물 흐르며 성당 마당을 걸어 나왔던 기억만이 생생하다. 나는 죽기위한 성사를 보았는데 따뜻하게 성사집행을 해 주시지 않고 오히려 역정이 깊으셨던 신부님을 기억한다. 그러나 당시에도 신부님의 마음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런 성사를 감당해야 하는 당신의 마음이 얼마나 더 아프셨는지를....

 

상당한 마음의 외로움을 품고 살았던 섬 생활이었으므로 그 고해가 수술 전의 내 마음의 전부였을 것이다.(이런대목은 쓸때마다 워째 이렇게 눈물이 비가 오시나요?)  출가한 동생이 큰오빠의 신세를 연속으로 져야 했으므로 마음까지 의탁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사치였을 것이다. 그저 밝고 즐겁고 근심 없게 보여 가족들에게 부담을 줄이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 내 처지의 완전한 위로는 주님 뿐이셨을 것이다. 그래서 수술을 받으러 갈 때마다 고해성사를 했다. 지금 생각하니 신부님도 나 때문에 어지간히 마음고생을 꽤나 하셨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별스런 여정을 격고 살아가지만 그 여정을 넘는 방법은 각자에게 주어진 여건에 따라 현격한 차이와 그 세계를 일구는 것 같다. 다 자란 자식들도 걱정이고, 남겨놓은 유산도 걱정이었다는 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죽었어도 참으로 남긴 것도 없고 걱정스러운 것도 없었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든다. 코흘리게 어린 자식더러 이렇게 저렇게 살으라고 길을 열어 줄 형편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자식이 셋이나 되는 큰이모에게 가서 살으라고 어린 아들에게 신신 당부를 했었던 것 같다.

 

아빠랑 친가쪽에서 살게되면 교육을 못 받게 되니까 아빠가 돈 주시면 큰이모 다 주고 교육은 큰이모한테 가서 받아야 한다고 이르고 또 일렀었다. 후후! 오늘도 전국의 병원 수술실에서는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사선을 넘으며 고통과 견주고 있을 것이다. 무심코 살아온 세상을 돌아보며 그 생명들 각자각자가 희망을 잃지 않는 투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살고 싶은 근원의 쟁점은 나로부터 비롯 되지만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나 죽는 것은 괜찮은데 누구 때문에, 또는 무엇 때문에 내가 살아야 하는.....

 

과연 그럴까?

그래도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살아야 할 은총은 주님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또한 주님을 믿는 사람들의 최후도 주님의 뜻이지 않겠는가! 믿는사람들은 그점이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죽을 때는 세상 걱정과 짐을 주님께 의탁하며 죽고싶다. 영혼의 평화를 주님께 구하며 죽게 해 주시라고 기도할 거다. 그렇게만 선택받는다면 최상의 복락이 아니겠는가. 세상살이도 쉽지 않았는데 마지막 가는 길에서 까지 세상 걱정을 하고 싶지 않을 것 같다.   

<주님! 제 영혼을 책임져 주소서. 아멘!>

 

ㅡ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자기의 갈 길을 가셨다. 루가4,30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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