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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3주간 화요일 복음묵상(05-03-01)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5-03-01 조회수986 추천수0 반대(0) 신고
사순 제3주간 화요일(05-03-01)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마태 18, 21-22)

마태오는 산상설교(5-7장), 파견설교(10장), 비유설교(13장)에 이어 공동체설교(18장)를 엮습니다. 예수께서는 공동체설교를 통하여 제자들 간의 공동체는 물론이고 앞으로 세워질 교회공동체 안에 지켜져야 할 규범들을 제시하시는데,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엮어진 공동체규범에는 '어린이와 같이 되라,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어라, 남을 죄짓게 하지 말라,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말라, 형제가 잘못하면 타일러주어라'는 등 온통 '서로간의 자비로운 사랑의 법칙'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용서에 관한 규범으로서 공동체설교의 마지막 가르침으로서 결론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7곱하기 70해서 490번 용서하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 규범의 진정한 의미는 '용서의 무한정'이죠. 예수께서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23-34절)를 통하여 믿는 이들 사이에 '무한정 용서의 규범'이 얼마나 합리적인가를 밝혀주십니다. 비유를 살펴보면, 마태오 특유의 과장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비유 속에 언급된 채무금액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인공 역을 맡은 종이 왕에게 빚진 금액은 일만 달란트였습니다.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은 1데나리온(마태 20,2)인데, 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1달란트는 노동자 한 사람이 안식일만 빼고 20년을 꼬박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입니다. 따라서 1만 달란트의 빚이란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이죠. 그러나 왕은 종의 이 엄청난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반면 다른 종이 이 종에게 진 빚은 100 데나리온이었지만 이 금액도 적은 돈은 아닙니다. 그러나 왕이 탕감해준 1만 달란트(6천만 데나리온)에 비하면 푼돈에 불과합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이 종이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1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으니 그 종이 다른 종의 100 데나리온을 탕감하는 일이 권리에 속하겠습니까? 아니면 당연한 의무에 속하겠습니까? 바로 여기에 오늘 비유의 합리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탕감 받은 일과 탕감하는 일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이웃에 더러 그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유에서 빚진 돈을 '죄'로, 탕감을 '용서'로 바꾸어 생각한다면 분위기는 달라집니다. 용서함은 용서받기 위해 전제되어야 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비유 속에 등장하는 왕이 빚진 종에게 행한 것처럼 우리에게 하실 것'(35절)이므로 먼저 용서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용서받기 위해 용서해야 하는 것은 용서가 권리이기보다 용서받기 위한 조건, 또는 의무라는 점이 강조됩니다.

용서가 의무라는 점은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에서도 알 수 있는데, 베드로는 스스로 아주 마음이 넓은 사람인양 과시하면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베드로의 말속에는 이미 용서가 남에게 해 줄 수 있는 권리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는 대답 속에는 용서의 무한정과 함께 용서가 해 줄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의무'라는 강력한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용서가 의무로서, 잘못을 저지른 형제를 언제 어느 때나 그 잘못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용서해야 한다는 결론입니다.

이제 용서는 권리가 아니라 의무입니다. 그러나 쉬운 일은 아니죠. 우리들의 일상은 무조건적이고 무한정의 용서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때로는 거의 불가능함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용서를 권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용서를 놓고 가지각색의 태도를 취하는데, 어떤 사람은 "자기 사전에 용서는 없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이번에는 용서하지만 다음에는 국물도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태오는 다른 복음서에서 볼 수 없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들어 무조건적인 용서의 합리성을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용서는 적어도 용서받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조건입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용서는 결코 권리가 아니라 의무임을 명심해야합니다.


한없이 용서하기

주님은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용서하고 결코 단죄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어찌 제가 남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 일곱 번은 고사하고 단 한 번 용서하는 일도 너무 힘듭니다.
상처받은 제 자존심이 어떤 관용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일곱 번도 모자란다고 하시니 너무 비현실적인 말씀처럼 들립니다.
용서하는 횟수가 신앙의 깊이를 말해준다면
제 신앙은 아직도 멀기만 할 뿐입니다.
제가 남에게 잘못한 것과 주님께서 저를 용서해 주신 것은 쉽게 잊으면서도,
남이 내게 잘못한 것은 돌에 새겨두니 말입니다.
무자비한 종의 모습이 따로 없습니다.
주님, 당신처럼 무한히 용서하기가 제 힘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제가 용서해야 할 때마다 부질없는 감정과 자존심을 고집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당신께서 도와주시면 용서할 수 있겠습니다.

당신이 저를 용서하신 그 마음으로
저도 오늘 이웃과 화해하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함께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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