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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3주간 금요일 복음묵상(2005-03-04)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5-03-04 조회수1,042 추천수6 반대(0) 신고

 

사순 제3주간 금요일 (2005-03-04)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첫째가는 계명은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또 둘째가는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 29-31)

 

 

마르코복음 11장부터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활동기에 속합니다. 갈릴래아

 

지방에서 공생활의 대부분(1-9장)을 보내신 예수께서는 그 마지막 시기에

 

베드로의 메시아고백을 받으셨고, 이어서 두 번씩이나 자신의 수난과 죽

 

음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그런 다음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길목에

 

서 세 번째로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셨고(10장),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성전정화 사건(11,15-19)으로 예루살렘 활동기를 시작하십니다. 예루살렘

 

활동기는 사실상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위한 준비

 

단계로서 외적인 업적보다는 적수들과의 논쟁과 대담을 통한 자기계시적

 

가르침, 그리고 종말과 재난의 예언 등으로 일관됩니다. 논쟁과 대담은 주

 

로 적수들의 질문과 예수의 답변으로 이루어지는데 예수의 권한논쟁, 납

 

세에 관한 대담, 부활논쟁 등은 이미 치러졌고, 오늘 복음은 첫째가는 계

 

명에 관한 대담을 들려줍니다.

먼저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부활에 관한 논쟁을 벌였고, 오늘

 

복음에서는 율법학자 한 사람이 와서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는 계명이 무

 

엇인지를 묻는데, 오늘은 율법학자에 대하여 잠시 살펴봅니다. 서기관 또

 

는 랍비(스승)라고 불리던 율법학자들은 바빌론 유배(B.C 587년) 이전에는

 

예언자와 사제들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삼대 지도계급에 속했습니다. 그러

 

나 유배 이후(B.C 538년)에 들어 사제들은 권위를 잃었고, 기원전 500년경

 

에 활동하던 예언자 하깨와 즈가리야와 말라기를 끝으로 더 이상 예언자

 

들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메시아 사상이 강하게 싹트기 시작하면서, 백성

 

들은 모든 희망을 토라(율법)에 두게되고, 이 때부터 율법학자들이 바빠지

 

기 시작합니다. 더욱이 희랍의 통치(B.C 333년)와 로마제국의 통치(B.C

 

63년)가 이어지면서 침략자들에 의해 짓밟힌 예루살렘 성전은 신앙의 구

 

심점을 잃게 되고, 흩어진 유대인들이 디아스포라를 형성하여 그 안에 회

 

당(Synagogue)을 세워 안식일 예배를 드림으로써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

 

치는 율법학자들의 활동이 크게 두드러지게 됩니다. 회당에서의 예배는

 

제사 없이 율법서와 예언서의 봉독과 해설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기 때문

 

입니다.

따라서 율사들이 사제들보다 유리한 지위를 확보하게 됩니다. 물론 신약

 

시대에 들어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각종 제사는 거행되었습니다. 율법학자

 

는 상속되지 않았기 때문에 수년간의 정규적인 연구과정을 거친 사람이면

 

40세의 나이를 채운 자에 한하여 서품을 통하여 누구나 될 수 있었고 따라

 

서 율법학자들 중에는 바리사이들, 사두가이들뿐 아니라 일반직업을 가진

 

평신도 출신도 있었고, 최고의회인 산헤드린에 속한 사람도 있었으며, 특

 

히 바리사이파의 지도자는 모두가 율사들이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의 힘은

 

오직 율법에 대한 지식이었습니다. 백성들은 그들을 존경했고, 술 달린 긴

 

예복을 입고 다녔으며, 향연에서나 회당에서 항상 윗자리에 앉았습니다.

이러한 율법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248개 조항의 행령과

 

365개 조항의 금령을 합한 613개 조항의 계명 가운데 첫째가는 계명에 대

 

하여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그가 예수와 사두가이파 사람들 사이의 토론

 

을 듣고 있다가, 예수께서 호쾌한 답변을 주시는 것을 보고 예수께 이 질

 

문을 하였다는 오늘 복음의 서두와 "그런 일이 있은 뒤에는 감히 예수께

 

질문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미는 순전히 마르코복음사가의 독자적인 편

 

집으로 추정됩니다.

아무튼 오늘도 예수님의 답변은 명쾌합니다. 613개 조항을 축약하면 십계

 

명이 될 것이고, 십계명을 축약하면 첫째가는 계명이 "너 이스라엘아, 들

 

어라.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신명

 

6,4-5)는 계명이고, 둘째가는 계명이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레

 

위 19,18)는 계명임을 이 율법학자가 모를 리 없었을 것입니다. 이는 바로

 

예수께서 모든 율법서와 예언서의 골자로 선포하신 사랑의 이중계명인 것

 

입니다.(마태 22,34-40; 루가 10,25-28 참조)

오늘 복음의 핵심은 사랑의 이중계명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유일신 사

 

상의 재확인과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는 율법학자의 답변도 오늘 복음을 통하여 나타난 큰 성과입니다. 사

 

실 야훼 하느님께서 반기시는 것은 재물이 아니라 사랑이며, 재물을 바치

 

기 전에 하느님이 마음을 알고 먼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호세 6,6)

 

사랑의 이중계명을 다시 환원시키면 십계명이 되고, 십계명을 다시 환원

 

시키면 수백 개의 계명이 될 수도 있지만 사랑은 말이나 지식이 아니라 구

 

체적인 행동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어떠한 구체적인 행동도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의 이중계명의 핵심정신을 비켜갈 수는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누

 

구든지 사랑의 이중계명을 잘 알고 지키는 사람에게 이미 하늘나라를 약

 

속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도 구약의 율법(613개)을 지키도록 요구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율법의 정신인 사랑을 실천한다면 율법을 능

 

가하는 행위를 수행한 셈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 사이에는 하느님은 사

 

랑한다면서 인간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사람이 바로 나라면 왜

 

예수께서 수많은 율법들 가운데 하나인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을 한데 묶

 

어 가르치시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은 순서(first

 

and second)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는 동시(synchronize)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중에 이웃사랑에 대한 의지

 

가 굳건해지며, 내가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하느님께 대한 순명이 확증

 

된다."(루돌프 불트만)


한결같은 사랑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같은 계명의 양면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고,
이웃을 미워하면서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앎이 아니라 실천인데, 막상 사랑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
 
니다.
그런데 사랑의 계명에 감추어진 신비는, 우리가 먼저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받아 누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사랑의 계명은 더이상 의무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분의 사랑이 내 굳어진 마음에 스며들어와 나를 부드럽게
해주시면 내가 사랑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보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깨닫는 것이 먼저입니다.
특별히 내적 침묵과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맛보고,
그분한테서 오는 기쁨을 체험할 수 있도록 우리의 영적 감수성
 
을 열어 줍니다.

주님, 제 안에 당신 사랑의 불을 놓으소서.
오늘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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