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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야곱의 우물(3월 6 일)-♣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5-03-06 조회수1,296 추천수4 반대(0) 신고



      ♣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요한 9,1-­41)
      그때에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소경을 만나셨는데 제자 들이 예수께 “선생님,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자기 죄입니까? 그 부모의 죄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해가 있는 동안에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는 아무도 일을 할 수가 없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내가 세상의 빛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께서는 땅에 침을 뱉어 흙을 개어서 소경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연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실로암은 ‘파견된 자’라는 뜻이다.

      소경은 가서 얼굴을 씻고 눈이 밝아져서 돌아왔다. 그의 이웃 사람들과 그가 전에 거지 노릇을 하고 있던 것을 보아온 사람들은 “저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던 사람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어떤 이들은 바로 그 사람이라고 하였고, 또 어떤 이들은 그 사람을 닮기는 했지만 그 사람은 아니라고도 하였다. 그때 눈을 뜨게 된 사람이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 하고 말하였다.

      사람들이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 하고 묻자 그는 “예수라는 분이 진흙을 개어 내 눈에 바르시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시기에 가서 씻었더니 눈이 띄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들이 “그 사람이 어디 있소?” 하고 물었으나 그는 모른다고 대답 하였다. 사람들은 소경이었던 그 사람을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데리고 갔다. 그런데 예수께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을 뜨게 하신 날은 바로 안식일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또 그에게 눈을 뜨게 된 경위를 물었다.

      그는 “그분이 내 눈에 진흙을 발라주신 뒤에 얼굴을 씻었더니 이렇게 보게 되었 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중에는 “그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보면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하는 사람도 있었고 “죄인이 어떻게 이와 같은 기적을 보일 수 있겠소?” 하고 맞서는 사람도 있어서 서로 의견이 엇갈렸다. 그들이 눈멀었던 사람에게 “그가 당신의 눈을 뜨게 해주었다니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 하고 다시 묻자 그는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유다인들은 그 사람이 본래 소경이었는데 지금은 눈을 뜨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고 마침내 그 사람의 부모를 불러 “이 사람이 틀림없이 나면서부터 눈이 멀었다는 당신네 아들이오? 그런데 지금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 하고 물었다. 그의 부모는 “예, 틀림없이 날 때부터 눈이 멀었던 저희 아들입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지금 보게 되었는지, 또 누가 눈을 뜨게 하여 주었는지는 모릅니다. 다 자란 사람이니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제 일은 제가 대답하겠지요” 하였다.

      그의 부모는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유다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회당에서 쫓아내기로 작정하였던 것이다. 그의 부모가 “다 자란 사람이니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하고 말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유다인들은 소경이었던 사람을 다시 불러놓고 “사실대로 말하시오. 우리가 알기로는 그 사람은 죄인이오” 하고 말하였다.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앞못보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잘 보게 되었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당신 에게 무슨 일을 했소?

      어떻게 해서 당신의 눈을 뜨게 했단 말이오?” 하고 그들이 다시 묻자 그는 “그 이야기를 벌써 해드렸는데 그때에는 듣지도 않더니 왜 다시 묻습니까? 당신들도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이 말을 듣고 그들은 마구 욕설을 퍼부으며 “너는 그자의 제자이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모세는 직접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이지만 그자는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른다” 하고 말하였다. 그는 이렇게 대꾸하였다. “분명히 내 눈을 뜨게 하여 주셨는데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도 모른다니 이상한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의 청은 안 들어주시지만 하느님을 공경하고 그 뜻을 실행하는 사람의 청은 들어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여준 이가 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분이 만일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도저히 하실 수가 없을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이 말을 듣고 “너는 죄를 뒤집어쓰고 태어난 주제에 우리를 훈계하려 드느냐?” 하며 그를 회당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눈멀었던 사람이 유다인들의 회당에서 쫓겨났다는 말을 들으시고 예수께서 그를 만났을 때에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선생님, 믿겠습니다. 어느 분이십니까?”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지금 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주님, 믿습니다” 하며 그는 예수 앞에 꿇어 엎드렸다. 예수께서는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보는 사람과 못 보는 사람을 가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하려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와 함께 있던 바리사이파 사람 몇이 이 말씀을 듣고 “그러면 우리들도 눈이 멀었단 말이오?” 하고 대들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가 차라리 눈먼 사람이라면 오히려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지금 눈이 잘 보인다고 하니 너희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야곱의 우물』《매일성서묵상》에 나오는 3월 6일자 이 안나마리 수녀(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님의 글입니다. *^^*
      요한복음 9,1-­12의 이야기는 소경의 치유와 치유받은 그 사람이 진짜 맹인 이었는지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바로 그 소경이라고 증언하는 장면이다. 9,13-­23은 눈뜬 자에 대한 첫번째 심문으로, 바리사이들이 눈뜬 자를 불러 낫게 된 과정을 묻는다. 바리사이들은 치유가 안식일에 이루어진 점을 문제삼고 그들 안에 의견 충돌이 일어난다. 이어서 눈을 뜬 자의 부모를 불러 심문하고 있다. 9,24-­34에서는 눈뜬 자에게 두번째 심문을 하고, 9,35-­41은 바리사이들과의 대화로서, 그들의 소경됨을 말하고 있다.이야기의 앞 장면인 8,12에서 예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 나를 따라오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입니다”라고 당신 자신을 빛으로 오신 분으로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안식일법을 어겼다는 9,13­-34의 내용은 소경과 눈뜬 자 사이에서 반전을 이루고 있다. 소경의 눈뜸(9,1-­12)과 바리사이들의 눈멈(9,35-­41) 사이에 배치되어 있어서 눈을 뜬 소경과 바로 보지 못하는 바리사이의 눈멈이 대조를 이룬다. 이 반전은 안식일법을 어긴 예수가 죄인이고, 하느님께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라는 논리에서 비롯된다. 그들 스스로 발설한 “우리도 맹인이란 말이오?”라는 말은 41절 “차라리 맹인이라면 죄가 없겠지요”라고 한 예수님의 말과 함께 그를 죄인으로 보고 또한 안식일에 치유하신 예수님도 죄인으로 보는 그들 자신의 눈멈을 밝힌다. 빛으로 오신 예수 앞에서 잘 볼 수 있다고 자처하는 그들이 오히려 암흑 중에 헤매는 맹인임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

      우리의 눈에는 난시·근시 그리고 원시가 있다. 이해타산으로 굴절된 시각은 사물과 사건을 왜곡한다. 그처럼 가려지거나 뒤틀린 눈으로 보는 세상은 단절이요, 구속일 뿐이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 세상까지도 묶어 어둠 속을 헤매게 만드는 것이다.

      저들은 저들이 하는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들도 이들이 하는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 눈먼 싸움에서 우리를 건져주소서. 두 이레 강아지만큼이라도 마음의 눈을 뜨게 하소서. (구상 「두 이레 강아지만큼이라도…」 중 ‘기도’)

      강아지가 어미 뱃속에서 나왔을 때는 보지 못하다가 두 주간이 지나 겨우 눈을 떠서 볼 수 있게 되어야 비틀걸음으로 집에서 기어나온다고 한다. 두 이레 지난 강아지, 우리 역시 이제 겨우 뜬 눈으로 보는 희부연 세상을 더듬으며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예수께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는 이야기는 복음서 여러 곳에 나온다. 베싸이다의 소경, 예리고의 소경 바르티메오…. 우리를 어둠에서 건져내 빛으로 이끌어 주실 뿐 아니라 빛 자체이신 그분이 우리에게 오신다.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 나를 따라오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예수께서는 그가 쫓겨났다는 말을 듣고 그를 만나서 당신께 믿음을 고백할 수 있도록 이번에는 믿음의 눈을 밝혀주고 계시다.

      12절을 보면 눈을 뜬 사람은 예수라는 분에게 치유를 받았다고 자세히 설명은 하지만 예수를 뵙지는 못했다. 예수께서 그 사람에게 다가오시어 만나신다. 완전한 치유가 되게 해주시는 만남이다. 이제 그는 눈으로 보는 세상 이치를 너머 속내를 바라보는 눈 (신앙의 눈)을 지니게 되었다. ‘너는 그자의 제자이지만’이라는 말로 그가 예수의 제자 임을 확인해 준 바리사이들에게 그는 아주 확실한 논거로 예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한다. 그는 예수가 죄인인지 아닌지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다. 단지 그분이 자신을 어둠으로 부터 빛으로 이끌어 내준 구원자임을 고백하고 있다.

      당신들도 그분 제자가 되고 싶습니까? 이 고백은 상당한 용기와 확신에서 나온 고백 이었다. 그것은 22절,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기만 하면 회당에서 추방하기로 합의한 배경에서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용기와 믿음으로 진리를 증언한 자유인이다. 그는 다른 누구 보다도 더 확실하고 정확하게 보고 있다. 누가 볼 수 있는 사람이고, 누가 볼 수 없는 사람인가! 안식일은 하느님의 날이요, 거룩한 날이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날, 생명을 활기차게 하는 기쁨의 날, 하늘 잔치가 벌어지는 날이다.

      그날은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하느님의 법칙인 생명을 살리는 날로 성화 시키는 것. 예수께서는 이날의 진정한 뜻, 어둠에 묶여 있던 당신의 사람을 풀어 자유 롭게 하시고 활기차고 당당하게 탄탄한 걸음으로 생을 찬미하며 걷게 하신다. 빛이신 주 예수님, 오시어 우리를 보아주시고 만나주십시오. 당신을 따라 사는 제자로서 빛 안에서 거닐게 하여 주십시오. 당신은 세상의 빛이시니 어둠을 환히 밝혀주시고, 따스한 온기로 세상을 감싸주며 생명을 키워주고 활기를 주십시오. 비틀걸음을 걷는 저희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당신을 따라 자유로이 걷게 하소서.
      * 이 본문에 나오는 성서 구절은 200주년 기념 성서를 인용했음.
      [영성체후묵상]

      우리는 모두 하찮은 존재이며 보잘것없지만 하느님의 자녀들이며 빛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사람과 사물의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주로 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속마음과 숨은 생각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겉치레에 힘쓰기 보다는, 주님의 말씀을 거울삼아 내면을 갈고 닦는 사람이 되어 세상을 똑바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권요셉 올림>
      (소스입니다) <br><UL> <CENTER><IMG height=369 src="http://edu.kcm.co.kr/bible_illust/rs/rs180.jpg" width=304 border=0></UL></CENTER> <BR><BR></UL><PRE><UL><FONT style="FONT-SIZE: 12pt" face=돋음체 color=#005e77> <B>♣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B> <FONT style="FONT-SIZE: 11pt" color=green> <B> (요한 9,1-­41) </B><FONT style="FONT-SIZE: 10pt" color=red> <BR>그때에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소경을 만나셨는데 제자 들이 예수께 “선생님,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자기 죄입니까? 그 부모의 죄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BR> <BR>우리는 해가 있는 동안에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는 아무도 일을 할 수가 없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내가 세상의 빛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께서는 땅에 침을 뱉어 흙을 개어서 소경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연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실로암은 ‘파견된 자’라는 뜻이다. </BR> <BR>소경은 가서 얼굴을 씻고 눈이 밝아져서 돌아왔다. 그의 이웃 사람들과 그가 전에 거지 노릇을 하고 있던 것을 보아온 사람들은 “저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던 사람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어떤 이들은 바로 그 사람이라고 하였고, 또 어떤 이들은 그 사람을 닮기는 했지만 그 사람은 아니라고도 하였다. 그때 눈을 뜨게 된 사람이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 하고 말하였다.</BR> <BR>사람들이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 하고 묻자 그는 “예수라는 분이 진흙을 개어 내 눈에 바르시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시기에 가서 씻었더니 눈이 띄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들이 “그 사람이 어디 있소?” 하고 물었으나 그는 모른다고 대답 하였다. 사람들은 소경이었던 그 사람을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데리고 갔다. 그런데 예수께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을 뜨게 하신 날은 바로 안식일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또 그에게 눈을 뜨게 된 경위를 물었다.</BR> <BR>그는 “그분이 내 눈에 진흙을 발라주신 뒤에 얼굴을 씻었더니 이렇게 보게 되었 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중에는 “그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보면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하는 사람도 있었고 “죄인이 어떻게 이와 같은 기적을 보일 수 있겠소?” 하고 맞서는 사람도 있어서 서로 의견이 엇갈렸다. 그들이 눈멀었던 사람에게 “그가 당신의 눈을 뜨게 해주었다니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 하고 다시 묻자 그는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BR> <BR>유다인들은 그 사람이 본래 소경이었는데 지금은 눈을 뜨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고 마침내 그 사람의 부모를 불러 “이 사람이 틀림없이 나면서부터 눈이 멀었다는 당신네 아들이오? 그런데 지금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 하고 물었다. 그의 부모는 “예, 틀림없이 날 때부터 눈이 멀었던 저희 아들입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지금 보게 되었는지, 또 누가 눈을 뜨게 하여 주었는지는 모릅니다. 다 자란 사람이니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제 일은 제가 대답하겠지요” 하였다.</BR> <BR>그의 부모는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유다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회당에서 쫓아내기로 작정하였던 것이다. 그의 부모가 “다 자란 사람이니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하고 말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유다인들은 소경이었던 사람을 다시 불러놓고 “사실대로 말하시오. 우리가 알기로는 그 사람은 죄인이오” 하고 말하였다.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앞못보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잘 보게 되었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당신 에게 무슨 일을 했소? </BR> <BR>어떻게 해서 당신의 눈을 뜨게 했단 말이오?” 하고 그들이 다시 묻자 그는 “그 이야기를 벌써 해드렸는데 그때에는 듣지도 않더니 왜 다시 묻습니까? 당신들도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이 말을 듣고 그들은 마구 욕설을 퍼부으며 “너는 그자의 제자이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모세는 직접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이지만 그자는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른다” 하고 말하였다. 그는 이렇게 대꾸하였다. “분명히 내 눈을 뜨게 하여 주셨는데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도 모른다니 이상한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의 청은 안 들어주시지만 하느님을 공경하고 그 뜻을 실행하는 사람의 청은 들어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BR> <BR>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여준 이가 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분이 만일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도저히 하실 수가 없을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이 말을 듣고 “너는 죄를 뒤집어쓰고 태어난 주제에 우리를 훈계하려 드느냐?” 하며 그를 회당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눈멀었던 사람이 유다인들의 회당에서 쫓겨났다는 말을 들으시고 예수께서 그를 만났을 때에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선생님, 믿겠습니다. 어느 분이십니까?”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지금 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셨다.</BR> <BR>“주님, 믿습니다” 하며 그는 예수 앞에 꿇어 엎드렸다. 예수께서는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보는 사람과 못 보는 사람을 가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하려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와 함께 있던 바리사이파 사람 몇이 이 말씀을 듣고 “그러면 우리들도 눈이 멀었단 말이오?” 하고 대들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가 차라리 눈먼 사람이라면 오히려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지금 눈이 잘 보인다고 하니 너희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BR> <CENTER><IMG src="http://www.chosun.com/special/gallery/200001/flower/image/bphoto/6.jpg"><P></CENTER> <FONT style="FONT-SIZE: 11pt" color=green ace="돋음체"> 『야곱의 우물』《매일성서묵상》에 나오는 3월 6일자 이 안나마리 수녀(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님의 글입니다. *^^* </B> <FONT style="FONT-SIZE: 11pt" color=darkviolet ace="돋음체"> <BR>요한복음 9,1-­12의 이야기는 소경의 치유와 치유받은 그 사람이 진짜 맹인 이었는지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바로 그 소경이라고 증언하는 장면이다. 9,13-­23은 눈뜬 자에 대한 첫번째 심문으로, 바리사이들이 눈뜬 자를 불러 낫게 된 과정을 묻는다. 바리사이들은 치유가 안식일에 이루어진 점을 문제삼고 그들 안에 의견 충돌이 일어난다. 이어서 눈을 뜬 자의 부모를 불러 심문하고 있다. 9,24-­34에서는 눈뜬 자에게 두번째 심문을 하고, 9,35-­41은 바리사이들과의 대화로서, 그들의 소경됨을 말하고 있다.이야기의 앞 장면인 8,12에서 예수께서는 <B>“나는 세상의 빛입니다. 나를 따라오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입니다</B>”라고 당신 자신을 빛으로 오신 분으로 말씀하셨다. </BR> <BR>예수께서 안식일법을 어겼다는 9,13­-34의 내용은 소경과 눈뜬 자 사이에서 반전을 이루고 있다. 소경의 눈뜸(9,1-­12)과 바리사이들의 눈멈(9,35-­41) 사이에 배치되어 있어서 눈을 뜬 소경과 바로 보지 못하는 바리사이의 눈멈이 대조를 이룬다. 이 반전은 안식일법을 어긴 예수가 죄인이고, 하느님께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라는 논리에서 비롯된다. 그들 스스로 발설한 <B>“우리도 맹인이란 말이오?”라는 말은 41절 “차라리 맹인이라면 죄가 없겠지요</B>”라고 한 예수님의 말과 함께 그를 죄인으로 보고 또한 안식일에 치유하신 예수님도 죄인으로 보는 그들 자신의 눈멈을 밝힌다. 빛으로 오신 예수 앞에서 잘 볼 수 있다고 자처하는 그들이 오히려 암흑 중에 헤매는 맹인임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 </BR> <BR>우리의 눈에는 난시·근시 그리고 원시가 있다. 이해타산으로 굴절된 시각은 사물과 사건을 왜곡한다. 그처럼 가려지거나 뒤틀린 눈으로 보는 세상은 단절이요, 구속일 뿐이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 세상까지도 묶어 어둠 속을 헤매게 만드는 것이다.</BR> <BR>저들은 저들이 하는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들도 이들이 하는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 눈먼 싸움에서 우리를 건져주소서. 두 이레 강아지만큼이라도 마음의 눈을 뜨게 하소서. (구상 「두 이레 강아지만큼이라도…」 중 ‘기도’)</BR> <BR>강아지가 어미 뱃속에서 나왔을 때는 보지 못하다가 두 주간이 지나 겨우 눈을 떠서 볼 수 있게 되어야 비틀걸음으로 집에서 기어나온다고 한다. 두 이레 지난 강아지, 우리 역시 이제 겨우 뜬 눈으로 보는 희부연 세상을 더듬으며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예수께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는 이야기는 복음서 여러 곳에 나온다. 베싸이다의 소경, 예리고의 소경 바르티메오…. 우리를 어둠에서 건져내 빛으로 이끌어 주실 뿐 아니라 빛 자체이신 그분이 우리에게 오신다. “나는<B> 세상의 빛입니다. 나를 따라오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B>….” 예수께서는 <B>그가 쫓겨났다는 말을 듣고 그를 만나서</B> 당신께 믿음을 고백할 수 있도록 이번에는 믿음의 눈을 밝혀주고 계시다.</BR> <BR>12절을 보면 눈을 뜬 사람은 예수라는 분에게 치유를 받았다고 자세히 설명은 하지만 예수를 뵙지는 못했다. 예수께서 그 사람에게 다가오시어 만나신다. 완전한 치유가 되게 해주시는 만남이다. 이제 그는 눈으로 보는 세상 이치를 너머 속내를 바라보는 눈 (신앙의 눈)을 지니게 되었다. <B>‘너는 그자의 제자이지만’</B>이라는 말로 그가 예수의 제자 임을 확인해 준 바리사이들에게 그는 아주 확실한 논거로 예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한다. 그는 예수가 죄인인지 아닌지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다. 단지 그분이 자신을 어둠으로 부터 빛으로 이끌어 내준 구원자임을 고백하고 있다.</BR> <BR><B>당신들도 그분 제자가 되고 싶습니까?</B> 이 고백은 상당한 용기와 확신에서 나온 고백 이었다. 그것은 22절, <B>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기만 하면 회당에서 추방하기로 합의한</B> 배경에서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용기와 믿음으로 진리를 증언한 자유인이다. 그는 다른 누구 보다도 더 확실하고 정확하게 보고 있다. 누가 볼 수 있는 사람이고, 누가 볼 수 없는 사람인가! 안식일은 하느님의 날이요, 거룩한 날이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날, 생명을 활기차게 하는 기쁨의 날, 하늘 잔치가 벌어지는 날이다. </BR> <BR>그날은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하느님의 법칙인 생명을 살리는 날로 성화 시키는 것. 예수께서는 이날의 진정한 뜻, 어둠에 묶여 있던 당신의 사람을 풀어 자유 롭게 하시고 활기차고 당당하게 탄탄한 걸음으로 생을 찬미하며 걷게 하신다. 빛이신 주 예수님, 오시어 우리를 보아주시고 만나주십시오. 당신을 따라 사는 제자로서 빛 안에서 거닐게 하여 주십시오. 당신은 세상의 빛이시니 어둠을 환히 밝혀주시고, 따스한 온기로 세상을 감싸주며 생명을 키워주고 활기를 주십시오. 비틀걸음을 걷는 저희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당신을 따라 자유로이 걷게 하소서. </BR> * 이 본문에 나오는 성서 구절은 200주년 기념 성서를 인용했음. <FONT style="FONT-SIZE: 11pt" face=돋음체 color=red> <CENTER><IMG src="http://nami2.com.ne.kr/bg5/048.gif" border=0> <FONT style="FONT-SIZE: 11pt" color=red> <B>[영성체후묵상]</B></CENTER> <FONT style="FONT-SIZE: 11pt" color=green> <CENTER><br>우리는 모두 하찮은 존재이며 보잘것없지만 하느님의 자녀들이며 빛의 자녀들입니다. </br> <br>우리는 사람과 사물의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주로 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속마음과 숨은 생각을 보시는 분이십니다.</br> <br>우리는 겉치레에 힘쓰기 보다는, 주님의 말씀을 거울삼아 내면을 갈고 닦는 사람이 되어 세상을 똑바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br></CENTER> <FONT style="FONT-SIZE: 11pt" color=green> <FONT style="FONT-SIZE: 11pt" color=red> <br> <FONT style="FONT-SIZE: 10pt" color=green> <IMG src="http://www.pennyparker2.com/image20.gif"> <BR>&lt권요셉 올림&gt;<BR> <EMBED src=http://www.najumary.or.kr/Blissout/song/a13.asf hidden="true" type=video/x-ms-asf 예수님 오늘 나의 길에서 autostart="true" loop="-1" volume="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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