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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90) 효부라는데 왜?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5-03-08 조회수1,092 추천수15 반대(0) 신고

2005년3월8일 사순 제4주간 화요일 천주의 성 요한 수도자 기념 허용 ㅡ에제키엘서 47,1-9.12;요한 5,1-3ㄱ.5-16ㅡ 

 

               효부라는데 왜?

                                 이순의

 

 

어제는 아침부터 방을 보러 다녔다. 두 칸 살이 내가 넓혀서 가는 이사가 아니다. 반지하 단 칸의 어머님이 오셔서 주인이 집을 비워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오래도 살으셨다. 단 칸이라도 방이 두 칸 만큼 커서 그 방에서 동생들을 혼인시키는데도 그렇게 어려움은 없었다. 영등포 쪽방에서 보증금도 없이 새색시였던 나의 마음고생을 시키면서 강행한 이사를 하시고 내 아들의 나이만큼 그 방에 살으셨으니 정말로 오래오래 살으셨다. 그동안에 집 주인만 네 번을 바뀐 집이니 오히려 주인보다 어머니가 더 주인인 셈이다.

 

쉬엄쉬엄 취미 삼아서 폐지를 주으시라고 했거늘 아마도 그렇게 하시지 않은 것 같다. 당신이 오래 살던 집이고, 두루두루 당신이 장악한(?) 공간들이다 보니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노인들도 욕심이 있어야  발걸음이라도 떼신다고 들었다. 그 욕심이 있었으니 아직 혼자여도 저렇게 버티고 계시리라. 그런데 나는 여유가 없었다. 어머니의 작은 방값에 돈을 보태어 이사를 해 드릴 형편이 아닌 것이다. 나도 그렇지만 어머니도 오래오래 그 집에 살으시다 보니 방 값이 시세보다 조금 뿐이다.

 

나는 성격이 말을 뱅뱅 돌리지를 못 한다. 그래서 돈을 도와서 이사를 해 드릴 수가 없으니 어머니께서 가지신 돈을 다 털어내 보시라고 했다. 노인들도 처음에는 돈이 없다고 시작하신다. 그런데 어머니가 나 보다 부자(?)신 것이다. 나는 어떤 놈이 떼 먹고 도망간 빚을 아직도 지고 사느라고 허리가 휘청휘청한데 어머니는 빚도 없이 못돈이 있으신 것이다. 후후후후후!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얼마나 안심이 되었는지 모른다.

 

어머니는 목돈을 둘로 나누어 통장에 따로 보관하고 계셨다. 하나는 막내 아들을 주고 싶으시고, 하나는 큰아들한테 너무나 짐만지우고 살아서 첫손주놈이 대학교에 가면 입학금으로 주시려고 따로 보관하셨다고 말씀하셨다. 얼마 되지 않은 퇴직금을 받아서 몫을 정해 두신 것이다. 나는 그러실 필요없이 이사를 하자고 말씀 드렸다. 그런데 어머니는 이 돈 만큼은 우리 손자 학비 줘야 허는디 내가 써버려서 어쩐다냐고 아까워하신다. 그래도 내 입장에서는 보증금이 너무 조금뿐인 어머니 방을 옮겨드리려면 어린 신혼시절에 없는 돈을 보태서 영등포 쪽방을 옮겨오던 악몽이 되살아 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어머니!

 이 돈을 다른 아들에게 안 뺏기고 버티시느라고 고생허셨네요.

 어머니 일생동안 일하고 마지막 남은 돈인데 어머니께서 고생허셨네요." 

그 돈을 보며 어머니께서 백화점에서 남의 가래침 닦고 변기통 닦은 돈이라서 가슴이 애달파왔다. 그것이 일용직 고용인으로 일생을 살으신 어머니의 마지막 결실인 것이다. 서울의 단칸 방 하나 값이었다. 가르친 자식도 없고, 딱히 잘 키워준 자식도 없고, 오로지 평생을 단 칸 방에서 먹고만 입고만 살다가 남은 것이 단 칸 방 하나값이다. 그것이 모든 일용직들의 현실이며 최후의 모습일 것이다. 그래도 어머니께서 그 통장 두 개를 검정비니루에 담아 잘 보관하신 것을 보며 장하시다고 칭찬해 드렸다. 고생했다고 칭찬해 드렸다. 어느 갑부의 돈과도 견줄 수 없는 돈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방을 보려면 그 동네를 떠나지 않아야한다. 어머니께서 고령이신데다, 기억이 좋아지시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새로 이사갈 어머니의 방 한 칸 값과 내가 살고있는 방값을 합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이사를 간다고 해도 세 칸 방은 어림이 없다. 더구나 우리 시댁에는 술보에 불상인 작은 아버지가 오시면 술에 대소변에 토악질에 세상의 독성과 오기풀이를 다 하시기 때문에 어머니를 합하더라도 그 은신처를 따로 두어야 한다. 어머니는 그런 시동생의 꼴을 보는데 나는 그런 시작은 아버지의 꼴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어머니를 모시고 살게 되더라도 나는 시작은 아버지의 꼴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그 동네에 방을 구하기로 했다.

 

어머니께서 다니던 골목에 익숙하셔야 한다는 장점을 가장 크게 비중을 두었다. 그런데..... 전세는 없고 모두 월세만 나와있다. 크건 작건 상관없이 월세는 홍수처럼 쏟아지는데 전세는 정말로 드문드문 하였다. 그것은 곧 돈이 그만큼 흔하다는 이야기이다. 돈이 흔해서 가둘 곳이 없기 때문에 전세 보다는 월세가 넘처나는 것이다. 반면에 갖지 못한 사람들의 부담은 가중에 가중되고, 어머니처럼 일생을 일용직 근로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등 붙이고 밥만 먹는 것으로 일생을 마쳐야 하는 연결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원인이 되는지도 모른다. 그럴때는 그냥 주님께 의탁하는 수 밖에 없다.

 

<지금 이 순간이 주님의 뜻이오니 어머니께 맞는 방을 구해주십시요.> 그래서 편안한 마음으로 부동산을 돌아 보았다. 이제는 반지하방 보다는 신축 1층으로 구해드리고 싶었다. 어떤방은 방에서 신발을 벗어야하고, 어떤 방은 주방에 창이 없고, 어떤방은 세탁기 놓을 자리가 없고...... 그런데 딱 한 집이 내 마음에 들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가서 보여드리고 싶은데 어머니가 오시지를 않는다. 전세가 너무 귀해서 빨리 계약을 해야하는데 어머니가 오시지를 않는 것이다. 그래도 주님을 믿은 결과로 방의 크기가 작기는 해도 어머니의 마음에도 들어하시고 계약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부동산을 운영하시는 분들이 나더러 효부라는 것이다. 어머니를 모시지도 못하는데, 그렇다고 내가 돈을 보태서 방을 얻어드리지도 못하는데, 생활비에 월세까지 부담할 수 없어서 꼭 그렇게 밖에 해드리지 못하는데.... 나더러 효부라고 하는 것이다. 그럴때 마다 나는 왜 코웃음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그럴때 마다 나는 왜 슬픈지 모르겠다. 그럴때 마다 나는 왜 싫었는지 모르겠다. 그럴때 마다 나는 왜 다가올 후회가 훤히 보이는지 모르겠다. 그럴때 마다 나는 왜 숨길 수 없는 맏자식의 죄업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그럴때 마다 나는 왜....? 늙으신 어머니와 가난한 나를 팔아서 복비도 싹둑 잘라서 깎았다. 어머니를 모셔다 드리면서 폐지는 당일당일 조금씩 운동삼아서 주우시라고 일러드렸다. 다시 주인이 폐지 때문에 나가라고 하면 전세가 없어서 월세집으로 이사를 해야한다고 알려드렸다.

 

돌아오는 길에 한편으로는 어머니가 부러웠다. 큰아가 있어서 안심하신다고 하시는 어머니는 나를 보고 살으신다. 내가 힘이고, 내가 의지고, 내가 희망이며, 내가 있어서 죽음조차 안심을 하신다. 내가 어머니께 잘 해 드리지 않아도 어머니는 내가 있어서 살으시는 연세가 되신 것이다. 그런데 내가 어머니처럼 되었을 때 내 곁에 그런 의지가 되어줄 자식이 있을지 나는 장담하지 못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더욱 어머니의 초라함에 내 자신이 온정으로 변하는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저 모습이 나라면?!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결코 효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부동산 사람들은 나더러 자꾸 효부라고 한다. 세상에 효부가 그렇게 귀하더란 말인가? 슬픈 현실이다.

 

어머니께서는 아프시더라도 죽으시더라도 올해는 아프시지도 말고, 돌아가시지도 말으시라고 했던 내 부탁을 지키실란다고 하셨다. 아들의 길도 못 열어 줬는데 손자놈 앞길도 막는 할머니가 되지 않으려면 올해는 당신 발로 걸어다녀야 한다고 말씀 하시는 것이다. 올해는 고3인 손자가 공부를 해야하는데 당신마저 아프거나 죽어서 손자에게 쏟아야할 며느리의 정신을 갈라버리는 할머니는 되지 않을 것이다고 하셨다. 그래서 더욱 힘을 내신다고 하셨다. 아마도 폐지를 줍고 계신다는 것은 어머니께서 건강하시다는 증명일지도 모른다. 손자를 대학에 보내기 위해서라도 어머니께서 건강하셔야 한다는 말이 나의 이기심이 아니라 어머니의 희망이 되어 있을 줄은 나도 몰랐다.

 

어머니인들 여생을 잘 살아보고 싶지 않았겠는가?!

세상사람들이여! 나는 효부가 아니당께요. 나는 죄인이당께요.

 

ㅡ얼마 뒤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자 지금은 네 병이 말끔히 나았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더욱 흉한 일이 너에게 생길지도 모른다."하고 일러 주셨다. 그 사람은 유다인들에게 가서 자기 병을 고쳐주신 분이 예수라고 말하였다. 요한5,14-15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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