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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92) <동승>과 <중독>에 대하여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5-03-10 조회수989 추천수12 반대(0) 신고

2005년3월10일 사순 제4주간 목요일 ㅡ출애굽기32,7-14;요한5,31-47ㅡ

 

 

        

 

<동승>과 <중독>에 대하여

                                           이순의

 

 

오래 전에 영화 <동승>과 <중독>을 보고 두 영화에서 느껴지는 공통된 화두를 언젠가는 묵상으로 옮겨보고 싶었다. 두 영화가 모두 출연한 배우의 숫자가 매우 단촐하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화면 구성이 소설보다는 수필처럼 느껴졌고, 관객으로 하여금 내면의 질의와 응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단순한 생각으로는 두 영화가 갖는 관계가 전혀 다른 이미지의 노출이라고 보게될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두 영화를 통일 된 영상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영화 <동승>은 어린 동자승이 산사에서 자라면서 쉬지 않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인간의 본성을 표출시키며 성장하게 된다. 종교라는 금기적 공간에서 어린 아이라는 절대적 수용성이 대립되어 살아가지만 금기가 어린 심성을 차단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만물에 속해서 공존하는 동자와 종교의 관계는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팽팽한 평행선을 이루며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다. 세상의 온갖 번뇌로 부터 단절되고 보호받는 정서의 종교와 성장이라는 인륜적 이치에서 해방 될 수 없는 소년의 관계 안에서 영화의 결말은 공통된 합일 점을 찾게 된다.

 

영화 <중독>에서는 형제가 동시에 사랑하는 한 여자를 화두로 놓고 있다. 사랑이라는 행위적 인물인 형의 실체와 그 사랑을 직시하는 암시적 인물인 동생의 실존은 잔인하리 만치 서늘하게 역어진다. 가장 사랑하는 형과 그 보다 더 사랑하는 형수! 그리고 시동생인 나와 여인을 소유할 수 있는 나 사이에서 빚어지는 갈등 구조는 끝까지 긴장을 놓지 않는다. 산소호흡기에 의존하고 있는 식물인간인 형의 존재가 죽음으로 소멸 되기를 바라는, 온전한 자기 정신을 형의 혼령에게 라도 의존하여 사랑을 점령하고 싶은 절박한 자작극의 동생과 여인의 관계는 그 심리적 갈등만으로도 보는 이의 실핏줄을 비틀고 있었다.

 

<동승>에서의 화두는 어머니이며, <중독>에서의 화두는 사랑이다. 어머니와 사랑은 생명이 존재하는 모든 관계 안의 화두이면서 화답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승>에서는 어머니인 여자를 그리워하고 동경하며 찾아서 떠나는 화두를 동행시킴으로 단절된 산사에 음흉한 생기를 불어 넣는다. 그리고 생명의 본향이 어디인지를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무에서 왔다가 무에로 돌아 가야하는 종교적 해탈은 결국 노스님의 질문을 통해 여인의 자궁을 연상하게 한다. 자궁의 정체를 추한 색정의 근원적 산실로 몰아온 성스러움의 한계는 청명한 동자를 통해 인간의 본성이 돌아가야할 모태로 승화시키는 영화였다.

 

그리고 <중독>에서는 혈육을 초월해버린 이성(異性)적 사랑의 갈망은 사람의 심성의 어두운 그림자를 얼마나 검게 인도할 수 있는지를 알게 하는 영화였다. 인간의 동물적 본성을 자제 시켜온 이성(理性)은 강자적 근성을 소멸시키고, 윤리적 인간성을 강요해 왔다. 그러므로 심성의 혼돈을 가장한 추구적 목적 달성을 초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동생은 혼령에 신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온전한 통념적 사고로는 형수를 범할 수 없는 인성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돌아버리지 않고는 소유할 수 없는 관계적 여인을 그는 포기 할 수 없었다. 사랑이란 제 정신을 놓고라도 목적이 되는 면죄부가 되는 것이다.  

 

결국 <동승>과 <중독>에서는 사람이 지니는 심성의 고향을 여인에게 두고 있었다. 노스님과 동자승이 남성으로 이루어지며, 형제의 등장도 남성으로 이루어 진다. 그러므로 남성적 본성이 끊임없이 추구해 가는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여인을 화두로 등장시킨다. 그 결과 어머니와 사랑으로 함축되고 있다. 종교적 윤리와 사회적 위계질서라고 해도 어머니에 대한 동경을 속화 할 수 없으며, 사랑의 결과를 놓고 부정할 수 없도록 끝을 맺는다. 두 영화는 인간의 집착과 소유에 손을 들어 주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동승>에서는 집착의 편을 들어 주었고, <중독>에서는 소유의 편을 들어주고 말은 것이다.

 

이 사순시기에 난데 없는 영화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다. 나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자부 하면서 과연 하느님의 편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영역은 존재하는 것인가에서 비롯 된다. 종교의 교리와 사회의 질서 안에서 공존하는 나로서 최후에는 그 테두리를 나의 울타리로 삼아 근본의 원점을 집착과 소유라는 이기적 중심축에 매달아 놓는 것은 아닌지? 사람이 사람을 위하여 사람을 정제 시키려고 한다. 그 정제된 사람이 사람을 위하여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사람은 과연 정제 될 수 있는가? 이 사순시기에 내가 어느만큼 정제 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심적 추구를 해 보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어린 소년을 지켜보시는 노스님처럼, 그 동생의 실체를 바라보는 여인처럼 나도 나를 바라보며 한 점 일획도 달라질 수 없는 한계를 인정하고 마는 것이다.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사람이 알면 얼마나 안다고.....

사람이 가졌으면 얼마나 가졌다고.....

사람이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다고.....

사람이 깨끗하면 얼마나 깨끗하다고.....

사람이 깨달았으면 얼마나 깨달았다고......

 

<동승>에서 어린 소년과 노스님은 동일 인물이며. <중독>에서 동생의 마음과 여인의 마음은 일치했다. 인간이 인간에게 너와 나는 다르다고 말 할 수 있겠는가?! 인간은 신이 아니질 않는가?!

 

ㅡ나는 사람에게 찬양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요한5,41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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