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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야곱의 우물(3월 13 일)매일성서묵상-♣ 영혼의 보배로운 기능, 슬픔 ♣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5-03-13 조회수886 추천수1 반대(0) 신고




      ♣ 영혼의 보배로운 기능, 슬픔 ♣ (요한 11,3­-7. 17. 20­-27. 33ㄴ-45)
      마리아와 마르타는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앓고 있습니다” 하고 전했다. 예수께서는 그 전갈을 받으시고 “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 그것으로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느님의 아들도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고 계셨다. 그러나 라자로가 앓는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서 더 머무르시다가 이틀이 지난 뒤에야 제자들에게 “유다로 돌아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러 보니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이미 나흘이나 지난 뒤였다. 예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마르타는 마중을 나갔다. 그동안 마리아는 집 안에 있었다. 마르타는 예수께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구하시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하느님께서 다 이루어 주실 줄 압니다.”,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마르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르타는 “예, 주님.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믿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마리아뿐만 아니라 같이 따라온 유다인들까지 우는 것을 보시고 비통한 마음이 북받쳐 올랐다.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하고 예수께서 물으시자 그들이 “주님, 오셔서 보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저것 보시오. 라자로를 무척 사랑 했던가 봅니다” 하고 말하였다. 또 그들 가운데에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사람이 라자로를 죽지 않게 할 수가 없었단 말인가?” 하는 사람도 있었다.

      예수께서는 다시 비통한 심정에 잠겨 무덤으로 가셨다. 그 무덤은 동굴로 되어 있었고 입구는 돌로 막혀 있었다. 예수께서 “돌을 치워라” 하시자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타가 “주님, 그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예수께서 마르타에게 “네가 믿기만 하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하시자 사람들이 돌을 치웠다.

      예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 제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제 청을 들어주시는 것을 저는 잘 압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여기 둘러선 사람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주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고 이 말을 합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라자로야, 나오너라” 하고 큰소리로 외치시자 죽었던 사람이 밖으로 나왔는데 손발은 베로 묶여 있었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겨 있었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주어 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마리아를 찾아왔다가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다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야곱의 우물』《매일성서묵상》에 나오는 3월 13일자 이재욱 신부(예수회) 님의 글입니다. *^^*
      ◆나는 어른이 된 이후로 지금까지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이 별로 없다. 그것이 어찌 나만의 이야기랴! 오랜 세월 유교적 풍토와 군사문화의 영향을 받아오고 그 어느 나라보다도 더 남성 중심적인 풍토가 강하게 지배해 온 한국 사회에서 자라난 남성이라면 대부분 그러하리라.

      남자는 무릇 강해야 하기에 눈물을 보이면 안 되고, 더구나 남들 앞에서 흘리는 눈물은 나약함의 상징이라는 관념이 어릴 때부터 주입되어 형성되어 온 것 같다. 그러기에 어느 때부터인지 나는 고통스러운 순간에는 감정이 메마른 사람처럼 차라리 슬픈 감정을 무의식적으로 스스로 마비시켜 온 것 같다. 그것이 정말 잘못된 것이라는 것은 수도생활을 하며, 또 나중에 상담심리를 배우면서 차츰 깨닫기 시작했다.

      죽었던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는 복음 이야기에서 우리는 감정이 온전히 살아 있는 예수님을 보게 된다.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연민에서 솟아나오는 비통한 주님의 눈물이 마침내 힘찬 음성으로 울려 퍼진다. “라자로야, 나오너라!”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은 매우 인간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참 인간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시는 것 같다.

      흔히 신학적으로 고통은 죄 때문에 생긴다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을 보면 사랑 때문에도 고통이 생기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당신의 십자가의 고통을 바라보면 사랑 때문에 생기는 무죄한 이들의 눈물과 고통에는 세상의 죄를 씻는 구속의 힘이 깃들어 있는 것 같다. 자식을 사랑하는 모든 어머니의 눈물이 그렇듯이 말이다.

      감정은 주님이 주신 영혼의 보배로운 기능 중의 하나다. 이성이 감정에 압도당하는 것은 미성숙함의 문제겠지만, 한편 감정이 제 기능을 하지 않는 것은 마치 한 바퀴가 빠진 채 굴러가는 자동차와 같다. 나의 감정은 살아서 온전히 기능하고 있는가? 주님을 제대로 따르고자 한다면 마땅히 기쁠 때 기뻐하고, 슬플 때 슬퍼하고, 아플 때 아파하고, 정의롭게 화가 나야 할 때 화를 내는지 자신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영성체후묵상]
      우리는 부활이며 생명이신 주님을 믿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현재 살고 있는 삶은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살고 계시기에 우리는 부활에 미리 참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죽은 라자로를 살려 내신 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며 아버지에게서 오셨음을 드러내 보이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권요셉 올림>
        (소스입니다) <br><UL> <IMG height=347 src="http://edu.kcm.co.kr/bible_illust/rs/rs176.jpg" width=280 border=0></<br> <br></UL> <BR><BR></UL><PRE><UL><FONT style="FONT-SIZE: 12pt" face=돋음체 color=#005e77> <B>♣ 영혼의 보배로운 기능, 슬픔 ♣</B> <FONT style="FONT-SIZE: 11pt" color=green> <B> (요한 11,3­-7. 17. 20­-27. 33ㄴ-45) </B><FONT style="FONT-SIZE: 10pt" color=red> <BR>마리아와 마르타는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앓고 있습니다” 하고 전했다. 예수께서는 그 전갈을 받으시고 “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 그것으로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느님의 아들도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고 계셨다. 그러나 라자로가 앓는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서 더 머무르시다가 이틀이 지난 뒤에야 제자들에게 “유다로 돌아가자” 하고 말씀하셨다.</BR> <BR>예수께서 그곳에 이르러 보니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이미 나흘이나 지난 뒤였다. 예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마르타는 마중을 나갔다. 그동안 마리아는 집 안에 있었다. 마르타는 예수께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구하시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하느님께서 다 이루어 주실 줄 압니다.”,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BR> <BR>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마르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르타는 “예, 주님.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믿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BR> <BR>예수께서 마리아뿐만 아니라 같이 따라온 유다인들까지 우는 것을 보시고 비통한 마음이 북받쳐 올랐다.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하고 예수께서 물으시자 그들이 “주님, 오셔서 보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U>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U> 그래서 유다인들은 “저것 보시오. 라자로를 무척 사랑 했던가 봅니다” 하고 말하였다. 또 그들 가운데에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사람이 라자로를 죽지 않게 할 수가 없었단 말인가?” 하는 사람도 있었다. </BR> <BR>예수께서는 다시 비통한 심정에 잠겨 무덤으로 가셨다. 그 무덤은 동굴로 되어 있었고 입구는 돌로 막혀 있었다. 예수께서 “돌을 치워라” 하시자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타가 “주님, 그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예수께서 마르타에게 “네가 믿기만 하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하시자 사람들이 돌을 치웠다.</BR> <BR>예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 제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제 청을 들어주시는 것을 저는 잘 압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여기 둘러선 사람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주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고 이 말을 합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라자로야, 나오너라” 하고 큰소리로 외치시자 죽었던 사람이 밖으로 나왔는데 손발은 베로 묶여 있었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겨 있었다. </BR> <BR>예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주어 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마리아를 찾아왔다가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다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BR> <img src=http://www.hicomnet.co.kr/flower/image/k035.jpg width=350 height=350> <FONT style="FONT-SIZE: 11pt" color=green ace="돋음체"> 『야곱의 우물』《매일성서묵상》에 나오는 3월 13일자 이재욱 신부(예수회) 님의 글입니다. *^^* </B> <FONT style="FONT-SIZE: 11pt" color=darkviolet ace="돋음체"> <BR>◆나는 어른이 된 이후로 지금까지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이 별로 없다. 그것이 어찌 나만의 이야기랴! 오랜 세월 유교적 풍토와 군사문화의 영향을 받아오고 그 어느 나라보다도 더 남성 중심적인 풍토가 강하게 지배해 온 한국 사회에서 자라난 남성이라면 대부분 그러하리라.</BR> <BR>남자는 무릇 강해야 하기에 눈물을 보이면 안 되고, 더구나 남들 앞에서 흘리는 눈물은 나약함의 상징이라는 관념이 어릴 때부터 주입되어 형성되어 온 것 같다. 그러기에 어느 때부터인지 나는 고통스러운 순간에는 감정이 메마른 사람처럼 차라리 슬픈 감정을 무의식적으로 스스로 마비시켜 온 것 같다. 그것이 정말 잘못된 것이라는 것은 수도생활을 하며, 또 나중에 상담심리를 배우면서 차츰 깨닫기 시작했다. </BR> <BR>죽었던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는 복음 이야기에서 우리는 감정이 온전히 살아 있는 예수님을 보게 된다.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연민에서 솟아나오는 비통한 주님의 눈물이 마침내 힘찬 음성으로 울려 퍼진다. “라자로야, 나오너라!”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은 매우 인간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참 인간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시는 것 같다.</BR> <BR>흔히 신학적으로 고통은 죄 때문에 생긴다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을 보면 사랑 때문에도 고통이 생기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당신의 십자가의 고통을 바라보면 사랑 때문에 생기는 무죄한 이들의 눈물과 고통에는 세상의 죄를 씻는 구속의 힘이 깃들어 있는 것 같다. 자식을 사랑하는 모든 어머니의 눈물이 그렇듯이 말이다.</BR> <BR>감정은 주님이 주신 영혼의 보배로운 기능 중의 하나다. 이성이 감정에 압도당하는 것은 미성숙함의 문제겠지만, 한편 감정이 제 기능을 하지 않는 것은 마치 한 바퀴가 빠진 채 굴러가는 자동차와 같다. 나의 감정은 살아서 온전히 기능하고 있는가? 주님을 제대로 따르고자 한다면 마땅히 기쁠 때 기뻐하고, 슬플 때 슬퍼하고, 아플 때 아파하고, 정의롭게 화가 나야 할 때 화를 내는지 자신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BR> <FONT style="FONT-SIZE: 11pt" face=돋음체 color=red> <IMG src="http://nami2.com.ne.kr/bg5/048.gif" border=0> <FONT style="FONT-SIZE: 11pt" color=red> <B>[영성체후묵상]</B> <FONT style="FONT-SIZE: 11pt" color=green> <BR>우리는 부활이며 생명이신 주님을 믿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현재 살고 있는 삶은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BR> <BR>성령께서 우리 안에 살고 계시기에 우리는 부활에 미리 참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BR> <BR>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죽은 라자로를 살려 내신 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며 아버지에게서 오셨음을 드러내 보이시려는 것이었습니다.</BR> <FONT style="FONT-SIZE: 11pt" color=green> <FONT style="FONT-SIZE: 11pt" color=red> <br> <FONT style="FONT-SIZE: 10pt" color=green> <IMG src="http://www.pennyparker2.com/image20.gif"> <BR>&lt권요셉 올림&gt;<BR> <bgsound src=http://www.jobsa.com.ne.kr/gangsj/8-13.asf hidden=true loop="-1"> <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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