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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교회가 우리를 낙담에 빠뜨릴 때(1)
작성자장병찬 쪽지 캡슐 작성일2005-03-13 조회수1,034 추천수3 반대(0) 신고
주님은 더욱 커지셔야하고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 (요한복음 3:30)
예수님, 저는 예수님께 의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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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우리를 낙담에 빠뜨릴 때"는 쇄신의 프란치스꼬회의 신부님이신
베네딕트 J. 그로쉘의 저서 "Arise from darkness(어둠을 떨치고 일어나라)"
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쇄신의 프란치스꼬회 그로쉘 신부는 뉴욕 대교구 영성 개발 담당 지도 신부
입니다. 그는 성직자 연구와 기도를 위한 성삼위 피정 센터를 설립하였고
스탭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1984년 존 오코너 추기경께서는 테렌스 쿡
추기경을 하느님의 종으로 시성 청원하는 운동 담당자로 그로쉘 신부를 임명
했습니다. 그 이전에 그는 14년간 뉴욕 돕스 페리에 있는 칠드런스 빌리지
담당 사제로 일했습니다.

그로쉘 신부는 뉴욕대교구 성 요셉신학교에서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는 포담 대학교, 이오나 대학교, 메리놀 신학교에서 가르쳤습니다. 그는
또한 노숙자들과 미혼모들과 가출 청소년들을 위한 '착한 상담의 집'과
'성 프란치스꼬의 집'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1987년 5월, 오코너 추기경의 격려 아래 여덟 명의 수사들과 함께 그로쉘
신부는 쇄신의 프란치스꼬 수도회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이 공동체는
카푸친 프란치스꼬회의 전통을 따라고 있으며 쇄신을 설교하고 사우츠 브롱스
에서 노숙자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우리를 낙담에 빠뜨릴 때]

교회나 교회 어떤 대표자들이 자신을 낙담시켰고 자기에게 심각한 상처를
주었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일 주일이 멀다하고 저를 찾아 옵니다. 이 상처
입은 그리스도인들은 때로는 슬픔에 잠기기도 하지만, 그분들이 겪는 보다
잦은 반응은 분노입니다.  그분들은 저를 포함한 어떤 사제나 주교도 교회
전체를 대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종종 잊곤 합니다. 그것은 그분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고통스럽습니다. 아마도 교회에 더 가까이 있는 사람일수
록 교회로부터 상처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진실일 것입니다. 저는
교회로부터 상처를 가장 자주 받는 사람은 다름아닌 교황일 거라고 생각합니
다. 교황은 언제나 모든 방향으로부터 쏟아져 내리는 비판 아래 있기 때문
입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의 공격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불만을 품은
사람들의 불평도 있는 것입니다. 교황으로부터 본당 신자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에게는 질문이 떠오릅니다. “어떻게 교회가 우리를 그렇게도 자주 낙담
시킬 수 있는 걸까? 그러면서도 여전히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일 수 있는
것일까?” 분명히 사랑에 넘치는 구세주를 역사적인 맥락에서 대변하시는 분
들이 우리를 보다 잘 돌보아 주시리라는 기대는 정당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문제 중 하나는 우리가 “교회”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어느 정도 그와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매우 다른 것을 기술하는데 그 용어
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교회”라는 단어는 다른 무엇을 의미
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건물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회중 교회”
(the Congregational Church) 처럼 어느 특정 종파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본당이나 교구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지역 교회와 문제가
있습니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그에 해당합니다.  그것은 전세계 그리스도인
모두를 의미할 수 있으며 “가톨릭 교회”의 일원인 전세계 가톨릭 신자 모두
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가톨릭”이라는 단어는 “우주 전체로부터 유래
한”이라는 의미의 그리이스어 kata holos 로부터 유래했으며 “공번되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가톨릭 교회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일어나는 혼동의 또다른 요인은 그
구성원을 어떻게 정의하느냐는 문제입니다. 미국의 가톨릭 신자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어떤 신문은 가톨릭 신자의 54%가 이런 저런 문제에 대해 주교
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보도합니다. 그러한 백분율은 어떻게 도출된
수치일까요? 통계 조사원들은 사람들에게 단순히 질문합니다: “당신은
가톨릭 신자입니까?” 제가 칠드런스 빌리지 담당 신부로 있을 때였습니다.
저는 자신이 가톨릭 신자라고 주장하는 한 소년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아이에게 세례와 첫영성체 준비를 시키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
이야기는 자기 사촌이 할렘에 있는 가톨릭 청년 센터 마당에서 농구를 한 적
이 있기 때문에 자신도 가톨릭 신자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전화 통계 조사원이
고용한 대학생들은 “당신은 가톨릭 신자세요?”라고 질문합니다.
만일 당신이 “네.”라고 답한다면 그들은 “피임에 대한 교황의 가르침에
동의하시나요?”라고 묻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니오.”라 답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이탈자들이 교황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의 백분율을 차지
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들이 교회를 지지하는 가톨릭 신자들인지 아니면 한번
도 교회에 가보지 않은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저의 집안에는 가톨릭 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이 있습니다. 그 학교에서는
하느님이 여성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여성이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 학교
교사들은 치료가, 그것도 장기 치료가 필요합니다. 누군가 “나는 가톨릭
교회의 일원이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필 도나휴같은 이야기꾼들이 “나는 가톨릭 신자요.”라고 말한다거나 마돈나
같이 신성을 모욕하는 엔터네이너가 “나는 가톨릭 신자요.” 라 했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들은 자신이 한때 활동적인 구성원이었지만
더이상 그렇지 못한 가톨릭 교회를 이용해 먹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공공
활동으로써 분명히 교회를 공격하고 있고 교회와 교회의 설립자 모두에게
신성 모욕을 가하고 있습니다.


[교회란 무엇인가?]

우선, 교회는 성 바오로 사도께서 매우 강력한 어조로 말씀하셨듯이 그리스도
의 신비체를 의미합니다. “아무도 자기 몸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께서 교회를 위하여 하시는 것처럼 자기 몸을 가꾸고 보살핍니다.  우리가
그분 몸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에페소, 5:29-30).  “그분은 또한 당신의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골로사이, 1:18).  깊이 있는 영적인 방식으로
그 모든 지체들이 일치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가시적(可視的)인 교회
뒤에는 영적인 실재가 있습니다.  이러한 신비체의 활력의 근원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하지만 교회 자신은 교회 구성원을 은총 상태에 있는 사람들로
만 국한시킬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종교개혁 시기에 정의되었습니다.
어떤 개혁가들은 은총 상태에 있는 구성원들만이 교회 구성원이라 주장했습니
다. 가톨릭 교회 주교들은 성인(聖人)들의 교회 개념을 거부했습니다. 죄중에
있는 사람은 교회 구성원이 된다고 해도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하지만, 그들
은 여전히 교회 구성원입니다.  그들은 앓고 있는 지체들입니다.  그들은
문제를 안고 있는 지체들입니다.  단순히 은총 상태를 잃는다고 해서 교회로
부터 파문당하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교회”라고 말할 때, 그것은 주교들과 교황과 책임이
있는 다른 모든 이들, 즉 성직자, 수도자, 활동적인 평신도, 본당 평의회,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등이 이끄는 볼 수 있는 외적인 교회를 의미합니다.
어떤 이들은 “나는 교회에서 일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누구를
위해 일합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그들은 “성모 병원에서요.”라고 대답
합니다.  그것이 그분들에게는“교회”입니다.  “나는 교회를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너무 인색하답니다.”  교회가 상서원이나 교구
사무실이나 본당을 의미합니까?  사람들이 “교회”가 그들을 실망시켰다고
말할 때 당신이 마음에 두려하는 일련의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교회가 자신을 실망시켰다고 말할 때, 그분들이 말씀하시는 교회는
본당이나 교구, 심지어 교구의 주교를 의미합니다.  그분들은 미국에 있는
교회, 또는 가장 용납할 수 없는 표현인 “아메리칸 교회” (the American
Church) 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실는지 잘 모르겠지만,
저는 “아메리칸 교회”에 속하지 않습니다.  저는 어쩌다 보니 미국 땅에
있게 된 가톨릭 교회에 속해 있습니다. 도데체“아메리칸”교회의 수장이
누구란 말입니까?)

진정으로 여러분은 “아메리칸 가톨릭 교회”를 발견하셨을는지도 모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스스로 독립적인 작은 교회들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뉴욕 할렘에는 “성모 마리아의 신비로운 장미 독립 가톨릭 교회” (St.
Mary's Mystical Rose Independent Catholic Church) 라 부르는 교회가 있었
습니다. 이곳은 자신을 가톨릭 신자라 주장하는 한편 자기가 직접 독자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스위스 근위병이 지키는 로마를 개입시키지 않겠다고 결정한
어느 적극적인 성직자가 운영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어떤 이들은 가톨릭 교회
로부터 떨어져 나와 “정통 가톨릭 교회”나 “구(舊) 가톨릭 교회”를 시작
합니다.  어떤 이가 5년 이내에 미국에 있는 가톨릭 교회에 분열이 일어나
그 단체를 ‘아메리칸 가톨릭 교회’라 부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해도 저는
별로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그런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될 것입니다.

그 의미가 무엇이 되었건 이 책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가 나를
실망시켰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본당, 교구, 가톨릭 학교, 교회내 기관,
가톨릭 출판사들, 주교들이 될 수 있습니다.  모든이는 자신의 주장을 할 수
있습니다.  거의 모든 사제나 수도자들도 그와 같이 말할 수 있으며 그분들도
교회에 대한 오랜 봉사 생활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에 대한 적법한 불평이나
짜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때 교회는 그분들이 거부나 무시를 당했거나
면직이나 오해를 받았던 곳을 의미합니다.  저는 수도생활을 한 지 45년이
되었습니다만, 저도 교회 특정 부분에 자주 분노하였다고 여러분께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상처받을 가능성은 엄청나며 더 깊이 교회 일에 개입할수록
그 가능성은 더 커집니다.  예를 들어, 너그러운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교회
를 방문하여 실제적으로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내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찾습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자신의 전 생애를 수도 성소를 사는데
바칠지도 모릅니다.  몇 년간은 모든 일이 순탄하게 지나갑니다.  그분들은
사람들의 감사를 받는다거나 적어도 열심히 일하거나 과업을 성취할 기회를
부여받습니다.  그후 그분들의“후견인”이 교체됩니다.  새로운 지도자들이
부임하며 “옛 후견인”의 사람들은 거추장스러워집니다.  그분들이 해온 일
에 대한 경의나 개인적인 인정이 거의 없습니다.  그분들이 해온 일에 대해
하느님께서 별로 존중하지 않으신다는 느낌이 몰려 옵니다.  이해할 수는
있지만 지혜롭지 못하게도 그분들은 교황 이하 교회 전체나 하느님에 분노
합니다.  그것은 참담한 느낌입니다.  저는 압니다.  범위가 더 적을는지는
모르지만 그와 똑같은 일이 충실한 본당 신자들과 교회 구성원들에게도 일어
날 수 있습니다.  그분들은 자기 희생에 이르기까지 베푸셨습니다.  그분들은
상처를 입는 시점에 이르기까지 베푸셨지만 새로운 사목자나 관장이 부임하면
서 그분들의 존재는 완전히 잊혀집니다.  그분들은 하느님께서 이러한 일을
하시지 않았음을 알고는 있지만, 감정적으로 그분들은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그러한 감정의 메아리를 히브리인들과 맞서는 예언자들의
말씀에서, 바오로 사도와 요한의 글에서 듣습니다.

아마도 이 모든 체험들 중 최악은 교회를 대표한다는 사람들이 오류를 가르침
으로써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엇나가는 경우일 것입니다.  헌신적으로
자신의 자녀를 종교 교육기관에 보내기는 했지만 그 학교가 교회와 복음의
가르침을 크게 결여하였거나 교묘히 그에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부모님들로부터 저는 그러한 쓰라린 불평을 들어 왔습니다.  교회 당국에
호소하는 적법한 불평에 대해 부적절한 답변을 받으면서 상처에 또다시 모욕
이 가해집니다.  드물지 않게 교회 당국은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제한적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교회가 우리를 실망시켰다는 느낌이 일어납니다.


[왜 교회는 우리를 낙담에 빠뜨리는가?]

보다 명료하게 생각해 보자면 교회 지도자들이 우리를 실망시킨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신비체가 우리에게 낙담을 안겨 주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됩니다.
우리 천주 구세주가 우리를 실망시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 마음에
새겨 두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하느님에 분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교회에 더 이상 나가지 않을 거에요.  하느님은 저를 실망시켰어요."
하느님은 당신을 실망시키시지 않았습니다.  괴팍한 OOOOO 몬시뇰 ,
사무적인 OO 수녀, 짓궃은 OOO 수사가 당신에게 실망을 주었을 뿐입니다.
그들이 당신을 낙담시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께도 실망을 드렸습니다.

교회가 우리에게 실망을 주는 이유는 교회가 인간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
니다.  교회는 원죄를 지닌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저는 전례 안에 성사가
원래 모습대로 보존되어 있는 교회 생활의 일면 (
당신이 죄중에 있는 사제로
부터 성사를 영한다 해도, 그것은 여전히 유효한 성사입니다
) 이나 성인들의
천상 교회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어떤 책들이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인지를 확증해주는 교회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리스도께서 주셨고 성령의 인도로 전수되
는 교회의 사도적 가르침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이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부분은 교회의 인간적인 면입니다만 교회의
인간적인 면은 측량할 수 없을 정도의 선(善)도 행합니다.  동시에 인간적인
면은 당신의 마음을 꺽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저는 평생동안 교회를 위해
일해 왔습니다.  몇 년 전 저는 소년 복사를 시작한 지 50년 주년을 기념하였
습니다.  저는 소년 복사였을 때 상처를 입었습니다: 저는 제가 하지도 않은
일로 인해 부당한 꾸지람을 들었던 것입니다.  저는 약 25년간 가톨릭 학교에
다녔고 몇몇 저의 선생님으로부터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에게
상처를 준 분들보다 더 많은 분들로부터 도움을 받았습니다.  제가 알고 지내
온 사제와 주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에게 상처를 준 이들은 단 몇몇 사람
이었지만 제게 도움을 주셨던 분은 그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저는 수도 공동
체들로부터 상처를 받은 적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그들로부터 크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교회를 대표하는 분들이 저에게 상처를 줄 때,
하느님께서 자신을 실망시켰다고 느끼는 사람과 똑같은 분노 반응이 저에게도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납니다.

현대에 교회로부터 지독하게 상처받은 분들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여러분
은 매우 놀라실 것입니다. 경이로운
오상의 사제, 파드레 비오 성인은 교황청
의 명에 의해 수십 년간 가택 연금 상태나 다름없는 조치를 받았습니다.
 
오상을 받으셨을 때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파드레 비오 성인은 산 지오반니
로툰도라는 작은 마을에 살면서 결코 그곳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결코. 여러
해동안 성인은 공적으로 미사를 드리도록 인가받지 못했습니다.

현재 복자 청원 중인 카푸친 프란치스꼬회 사제,
솔라누스 케이시는 전 생애
동안 한 번도 고해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일생을 통털어 실제 설교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겨우 한 두 번뿐이었습니다.  수도회 당국자들이 그분이 충분
히 똑똑하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같은 이유로 그분은 수도회
선거에서 한 번도 투표를 할 수 없었습니다.
미국땅에서 사신 카푸친 프란치스꼬 회원 중 가장 위대한 분이셨을 그분께서
는 설교를 하거나 고해를 들을 수 있는 허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분
께서 이러한 전적으로 부당한 모욕에 대해 결코 분노를 드러내지 않으셨음을
말씀드려야 겠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장차 그분을 성인으로 선언할 이유가
될 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살펴 보면서 우리는 현재 교회 박사로 존경받는
성 알퐁소 리구리오께서 자신이 세운 수도회인 구속주회를 떠나셔야 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알퐁소 리구리오 성인은 자신이 주교였음에도
불구하고 교황령에서는 미사를 드리는 것이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성녀 쟌 다르크는 뷰봐 교구 주교와 11명의
신학자들의 명에 따라 화형을 당하였습니다.
  루엥에 있는 감옥탑 한 켠에는
쟌 다르크 성녀를 죽음으로 이끈 사형 선고 칙령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켠에는 화형이 있은지 20년 후 성녀 쟌 다르크의 혐의를 사면
하여 복권하면서 성녀에게 사형을 판결한 사람들을 단죄하는 교황 칙서가
놓여져 있습니다.  성녀 쟌 다르크는 교황에게 상고했지만 지역 주교는
이러한 상고를 존중하지 않았고 결국 주교 스스로 교계적 문책을 자초하였습
니다.

교황들조차 교회로부터 상처를 받는다는 사실에 놀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황 바오로 6세의 한 친구는 교황께서 죽음을 반기셨다고 제게 말했습니다.
교황 바오로 6세의 재임 기간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온갖 어려움에 가득
찼고 교회가 광대한 혼돈 상태에 빠진 시기였습니다.  교황 바오로 6세께서
돌아가셨을 때 성 베드로 광장에서 그분을 위해 드려진 위령미사 강론에서
어느 주교는 “바오로여, 우리는 당신을 사랑하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하였
습니다.



< 영성에 도움이 되는 책은 http://예수.krhttp://www.catholic.to
  내 말씀 메뉴 중 "신앙의 책/전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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