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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5주일 복음묵상(2005-03-13)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5-03-13 조회수990 추천수1 반대(0) 신고

사순 제5주일 복음묵상(2005-3-13)

마르타는 예수께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구하시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하느님께서 다 이루어 주실 줄 압니다."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마르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하고 물으셨다.(요한 11, 21-26)

 
우리는 지난 '재의 수요일' 이후 파스카의 신비를 향해 극기와 보속을 통
 
한 사순시기를 지내왔습니다. 되돌아보면, 사순시기의 첫 주일에 예수께
 
서는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을 받으시지만 오로지 하느님의 뜻만을 따르심
 
으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며 인류 구원의 첫걸음을 떼시게됩니다. 그리
 
고 사순 제2주일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사건"을 통해서 수난과 고통의
 
한가운데 영광의 모습이 함께 있음을 가르치며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그리고 사순 제3주일은 예수님께서 한 사마리아 여인의 삶을 뒤바꾸어 놓
 
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이 가지고 있는 더 깊은 갈망을 깨닫게 하
 
시고, 당신 자신을 그 갈망을 채워 주는 샘으로 알아보도록 하십니다. 예
 
수님께서는 생명을 주시는 참된 샘물이시며 인간의 모든 문제는 그분 안
 
에서만 결정적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이어지는 사순
 
제4주일 복음의 '태생소경의 치유사화'는 당신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계
 
시하시며 특히 "하느님의 일들"은 드러나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내용을 보
 
여주십니다.
 
 
오늘 사순 제5주일 복음은 요한 복음서에 보도된 일곱 개의 표징사화들 가
 
운데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죽은 라자로의 소생사화"입니다. 여기에는
 
예수의 자기 계시 말씀(25-26절)이 중심을 이루고 있고 그 내용은 죽은 라
 
자로를 소생시킴으로서 외적으로 입증됩니다. 특히 "태생소경의 치유사
 
화"와 함께 예수는 그리스도로서 "세상의 빛"이요, 또한 "세상의 생명"으로
 
계시됩니다. 즉, 예수의 자기 계시가 표징을 통해서 그리스도론적이요, 구
 
원론적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자신을 이스라엘 민
 
족을 위해 예고된 메시아요, 그들이 믿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하느님과 같
 
은 분이요, 하느님과 함께 생명을 주관하시는 주님이심을 명백히 계시합
 
니다. 이제 더 이상 다른 계시는 없는데, 만약 하나가 더 있다면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 높이 달리시는 것과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시는 일입니다.
 
 
라자로를 소생시킨 표징사화를 끝으로 예수님의 3년간 공생활은 사실상
 
끝났다고 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3년간 공생활은 처
 
음 1~2장에서 아주 완만하게 시작합니다.(다음날/1,29; 다음날/1,35; 그
 
이튿날/1,43; 사흘째 되던 날/2,1) 그러다가 3장부터 11장까지에는 그 속
 
도가 빨라져 단숨에 3년 정도의 공생활이 보도됩니다.(2번의 해방절) 그
 
다음부터는 예수님의 죽음까지 마지막 7일간의 활동을 보도하고 있는데,
 
12장 서두를 보면 예수께서 과월절을 엿새 앞두고 베다니아로 가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마지막 맞으시는 과월절(해방절)입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성대하게 입성하실 것
 
(12,12-19)이고, 과월절 하루 앞두고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드시면서 새
 
계명과 함께 긴 고별사를 주실 것(13-17장)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마르타의 이름은 신약성서에 총 16번 언급됩니다.
 
그것도 대단히 단편적으로 언급되는 바 루가복음 10장에 3번(38, 40, 41
 
절), 그리고 요한복음 11장에 12번, 12장에 1번(12,2)입니다. 복음서에 언
 
급된 마르타의 이름과 함께 등장하는 사람은 그의 오빠 라자로와 그의 동
 
생 마리아인데, 베다니아에 살았던 라자로와 마르타와 마리아, 예수님과
 
각별한 친분을 가지고 있었던 이 가족은 성서상의 문맥을 살펴볼 때 그리
 
대단한 가문도 아니고 당대에 명성을 떨친 위인도 아니고 재산이 많고 세
 
력도 있는 부호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평범한 가족, 이스라엘의 대다수 가
 
족이 그랬듯이 평범하다못해 가난하고 소외된 그런 가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가족이 우리 그리스도교 교회사에 미친 영향은 절대 간과할 수
 
없는 대단한 것인데, 라자로의 죽음 앞에 하느님의 눈물을 보이신 예수께
 
서 마르타의 청을 받아들여 그를 죽음으로부터 소생시킴으로써 자신을 부
 
활이요 생명으로 계시하십니다. 루가복음에 보듯이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의 발치에서 말씀을 청취하는 일을 즐겨하고, 마르타는 마리아의 행동을
 
다소 시기했지만 예수님과 그 일행을 시중드는 일을 즐겨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서가 전해주는 마리아의 태도에서 "관상적 모범"을, 마르타의 태
 
도에서 "활동적 모범"을 예수님을 따르는 방법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나흘째 되었다는 말은 라자로가 확실히 죽었다
 
는 것을 뜻하며,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람이 죽어 사흘이 지나면 무덤
 
에 안장하였습니다. 많은 유다인들이 상가를 찾아와 유족을 위로한다는
 
것은 당시 관례로 이웃사랑의 실천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들은 앞으로
 
벌어질 놀라운 기적의 증인들이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언니 마르타는 마중을 나갔고, 동생 마리아는 집에 그대로 머물러 있
 
었다는 설명은 마르타의 활동적 성격과 마리아의 관상적 성격을 잘 대변
 
하는 대목이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사가는 마르타의 굳센 신앙을 토대
 
로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는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계시하는데, 이는 오늘
 
복음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마르타가 예수께 고
 
백한 신앙은 다소 표면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죽은 라자로
 
를 소생시키심으로써 마르타의 부족한 신앙을 넘치게 채워주셨습니다. 우
 
리의 믿음도 마르타의 그것처럼 표면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의 약점은 인간의 이성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믿음(예수님)을 언급한
 
다는 것을 "어리석은 짓"으로 여기는 것이며, 내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곳에서 믿음(예수님)을 언급한다는 것을 "무능한 짓"으로 여기는 것입니
 
다. 따라서 이렇게만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 믿음이 머무를 수 있는 자리
 
는 거의 없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죽음으로만 받아들이지만 예수님께 대
 
한 믿음은 죽음 다음에도 생명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교회는 이번 주로써 사순시기의 재계를 마감하고 본격적인 수난시기로 돌
 
입합니다. 예수님의 본격적인 수난시기는 곧 성주간(聖週間)이죠. 성주간
 
에도 여전히 재계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성주간에는 실제로 예수님의 수
 
난과 고통의 길을 한 걸음 한 걸음씩 함께 걸어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라자로의 소생사건을 통하여 믿음을 가진 자는 예수님과 함께 그 길을 갈
 
것이지만 백성의 지도부는 그 반대의 길을 갈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가
 
는 사람은 그분과 함께 죽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죽임
 
을 당하거나 마지못해 목숨을 내어놓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좇아
 
인류의 모든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생명을 내어놓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
 
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라자로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불러내신 예수님께
 
서 오늘도 우리를 생명의 길로 끓임없이 불러내고 계십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할 때 우리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영원히 사는 비결
 
죽었던 라자로가 살아났지만 그도 언젠가는 다시 죽어야만 했습니다.
 
죽음은 모든 인간의 공통된 운명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이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도대
 
체 무슨 뜻입니까?
 
영원히 산다는 것은 우리의 육신 그대로 기존의 시간과 공간에서 무한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이란 말은 시간을 단순히 수평적으로 연장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차원을 말합니다. 하느님만이 영원하시기에 영원과 하느
 
님은 동의어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을 믿고 그분과 일치된 삶은
죽음으로도 끝나지 않는 영원한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살아서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기회가 있을 때 내마음을 돌려 그분을 믿고
 
그분과 하나 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이 영원히 사는 비결입니다.
 
하지만 오늘도 나는 하느님과 일치할 수 없도록
 
스스로 높은 장벽을 쌓고 그 안에 갇혀 삽니다.
 
교만, 탐욕, 사음, 탐식, 질투, 분노, 나태라는 일곱 가지 죄의 굵은 뿌리가
 
나를 휘감고 있습니다.
 
주님을 따를 수 없는 생활은 깜깜한 무덤 속 생활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과 일치하여 산다는 것이 요원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라자로의 소생이야기를 통해 주님께서는 나를 죄의 무덤에서 불러내
 
해방시켜 주겠다고 언약하셨기 때문입니다.
 
 
죄의 무덤에서 저를 소생시켜 주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그런 당신의 사랑이 있기에 오늘도 당신과 함께하는
희망을 가지며 영원히 사는 삶의 지혜를 청합니다.
 
                                                           - 출처: 단순한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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