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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어느 예비신자의 고백 (上)
작성자박희선 쪽지 캡슐 작성일2005-03-14 조회수903 추천수2 반대(0) 신고

어릴 적 늘상 머물던 외가 집에서 처음으로 십자가를 보았습니다.

 

4살 터울의 동생이 태어나면서부터 여러 가지 병치레를 했고,

거기에 힘든 시집살이까지 보태어져서 힘들어 하던 엄마는

저를 외가에 맡겨놓기 일쑤였답니다.

 

외가 식구들은 증조할머니 때부터 신앙생활을 하신 터라

일요일에 두어번, 할머니 손잡고 성당을 간 기억이 가물가물 나기도 합니다.

 

엄마도 당연히 영세 받은 신자였지만,

아버지 집안의 "예수쟁이" 타령과 서슬 퍼런 시부모의 타박에

오랜 세월 냉담하고 계셨더랬습니다.

집안의 맏이가 어디 감히....뭐 이렇게 나오니,

며느리, 아니 여자의 삼종지도를 논하는 외가 집에서는

시댁에 순종하며 살아라...라고 눈물어린 질책 이외에는 대책이 없었지요.

 

친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가 재혼을 하시면서

분가해 나온 우리 집은 그렇게 따사로운 가정은 아니었던 거 같습니다.

아버지가 특별히 다정다감한 성격이 아니셔서

어릴 때의 기억은 엄마로 가득 차 있지 아버지는 별로 등장하시지 않는 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하고 돌아오신 아버지의 손에

"할렐루야 아줌마" 라는 책이 들려 있었습니다.

평소 무종교 주의자임을 자처하시는 아버지가

일명 "예수쟁이" 관련 서적을 들고 오셔서 우리는 깜짝 놀랐답니다.

누가 주길래 들고 왔노라 하시긴 했는데

그 책이 사단(?)이 될 줄은 모르셨겠죠.

 

엄마는 그 책을 읽고 울컥하고 맺혀있던 것들이

한꺼번에 쏟아진 듯 하셨습니다.

"그래....교회라도 나가야겠다."

몰래 몰래 살짝 살짝 주일이면 저와 동생을 데리고

개신교 교회에 다니시기 시작하셨답니다.

저야 뭐 생각이 깊을 나이도 아니니 그저 아침 9시에 하는

"말괄량이 꽈리"..."은하철도 999"..."들장미 소녀 캔디"..."천년여왕"..등과 같이

주옥 같은(?) 만화영화를 못보고 엄마 손에 질질 끌려 교회에 나가곤 했죠.

일요일이면 아버지는 늦잠을 주무시거나 낚시를 가시곤 했고

요리조리 시간 맞춰 집 앞의 교회를 나간 것도 꽤 오래 지속되었답니다.

저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의적으로 개신교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엄마는 그것도 언젠가 부터는 하실 수가 없게 되셨답니다.

 

어느 날인가 갑자기 이런 의문이 들었어요.

"낙인을 받고 떠돌던 카인은 누구랑 결혼을 한 것일까?

아담과 하와가 최초의 인류이고 우리가 그 후손이라면

또 다른 인간은 없었을 것 같은데... "

문제는 이런 의문을 목사님에게 여쭈었을 때 발생했습니다.

믿음이란 의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다 라고 아주 호통을 치시더군요.

 

한참 혈기왕성하고 삶이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춘기시절,

그 말씀은 너무나 막연했습니다. 물어보는 것도 안된 다고 하시는 분 앞에서

저는 할 말을 잃었고 방황했으며, 그리고 결론에 이르렀지요.

그 날부터 다니던 개신교 교회에 발을 끊고,

아니 그리스도교라는 전체에 등을 돌렸습니다.

정말 황당한 것은 그리고 나서 곧 아버지로부터 성당에 다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는 것인데, 종교의 자유는 가정에서도 보장된다고,

이왕 나가는 거 장인어른, 장모님처럼 성당이 더 좋겠다고 하시는 아버지.

엄마는 가슴 졸이며 살아온 세월도 잊으시고 그저 너무 기쁜 마음뿐이셨지요.

관면을 위한 동의는 나중에야 얻었지만 서도 어쨌든 그날로 동생은 예비자 교리를

엄마는 냉담을 풀고 기쁨의 미사 참례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모든 게 싫었어요. 저에게 강요하지 말라고 엄마에게 딱잘라 말하곤

모든 것에서 눈을 감아 버렸답니다. 외가댁에서는 경사가 났습니다.

그 얼마 전에 이모부랑 외사촌동생이 영세를 받았고

엄마랑 처지가 비슷했던 이모도 냉담을 풀고 하느님께로 돌아갔으니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정말 말할 수 없이 감사한 마음이셨을 꺼에요.

 

이모는 독실한 불교집안으로 시집을 갔더랍니다.

본인은 신자이며 고등학교도 천주교재단 학교를 나와 자연스레 신앙생활을 했지만

대학을 들어가면서부터, 이모 말을 빌면 ‘노는 게 더 좋아서’ 미사참례조차도

귀찮았답니다. 집은 부산인데 대학은 서울에서 다녔으니 방학 때 집에 돌아오면

식구들과 성당에 가는 것도 부담스럽곤 했다고 해요.

어찌 되었든 그러한 결과 종교가 다른 집안으로 시집가는 것도

사실 그 당시의 이모에게는 전혀 문제가 안 되는 것 이였지요.

이모 시댁의 어른들은 절에 위패를 모시고 있었습니다.

맏며느리가 기일에 절에 가서 참배하는 것은 당연한 것 이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인가 절의 법당 안에 들어서는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더랍니다.

한 발자욱만 벗어나도 씻은 듯이 낫는데 이상하게 법당 안으로 발만 들이면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와서 도저히 있을 수가 없어서 돌아오곤 그 뒤로

다시는 가지 않았습니다. 몸이 견디지 못할 고통이라서 엄두가 나지 않았던 거죠.

성큼 건너 뛰어 결론만 말씀드리면 이모 시댁식구 모두

(그 난리치시던 시아버지까지)

영세를 받고 성당에 나오고 계십니다. 그 사이에 일들이 정말 많았지만

너무도 자연스레 그 분들이 모두 자발적으로 하느님에 대해 알고 싶다면서

이모에게 도움을 청하는 결과가 되었지요.

제 신앙에 참 많은 영향을 주시기도 하는 우리 이모

 

다시 저라는 탕자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저는 대학을 서울로 왔습니다. 제가 대학을 다닐 당시 이모랑 외삼촌들이

이미 서울에 터전을 잡고 살고 있었으므로 저는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왠지 얼굴을 자주 대하면 성당 나오라는 이야기만 들을 것 같아서

아주 가끔 필요할 때만 찾아가곤 했어요.

사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저 혼자 지레 싫었던 거였습니다.

그렇게 잘난 척하다가 터무니 없이 이상한 곳에 빠져버렸습니다.

하숙집에 있던 선배언니의 인도로 들게 된 학교안 동아리인데

사실 그것이 종교였음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고

너무나 논리적이고 명쾌한 그 교리에 빠지게 되었지요.

그곳에서도 예수님은 위대하신 분이셨어요. 만약에 그들이 예수님을 비난했다면

저는 아마도 아니라고 반박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거기선 예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가를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이면을 보면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인간의 몸으로 우리를 위해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 이였습니다.

그저 훌륭한, 역사 속의 한 사람일 뿐, 진정한 메시아는 아니다.

우리나라 이 땅에 조선말에 이미 그분이 오셨었다.

전세계의 통일을 이루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피 흘림없이 하나가 되는 것은

질병이 퍼지고 또 그것을 구하게 되면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연스레 우리나라 아래로 전세계가 모여들게 된다.

등등 하여… 이른바 민족종교라는 것인데 그것도 참 여러가지의 파로 갈리더이다.

 

지금 생각하면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을 추구하던 제가 제 꾀에 넘어간거지요.

그들은 끊임없이 우리는 종교가 아니다 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면서 육임을 완수하라고(6명을 포교) 이야기하고, 성경이든 다른 예언서든

아전인수격의 해석을 하여 자신들의 논리를 뒷받침 했습니다.

뭐 특별히 이상한 광신 집단 같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로 가부좌로 앉아서 수도하는 거랑 공부하는 거 뭐 그런 정도였구요.

그게 더 나빴지요… 광신적인 뭔가가 있으면 더 빨리 빠져나왔을텐데…ㅜ.ㅜ

 

집에다가는 철저히 비밀로 했으며 그렇게 2년 정도 어영부영 시간을 보냈습니다.

머리로는 그런가 보다 해도 마음이 영 움직여지지 않아서 저는 적응이 쉽지가 않았지요. 그러다가 자연스레 그만두게 되었답니다. 특이한 사건이 있어서는 아니고 저를 인도했던 선배언니가 그 지도부 측과 마찰이 있어서 협박을 당하네 마네 하길래 사실 이때다 하고 그만 두었지요.

어차피 한명도 포교못했고 별 중요인사도 아닌지라 없어져도 그저 그런가 보다 하는 듯 했어요. 근데 나중에 보니 그런것도 아닌거 같더군요.

 

그리고 나서는 딱 이런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꼭 성전에 나가야 할 이유는 모르겠다’

‘황금 같은 일요일을 지켜 미사 참례하는 것이 자신없다.’

 

외할아버지랑 외할머니께서는 저와 제 아버지만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면 된다시며

저에게 언제 교리를 받을 꺼냐고 얼굴만 뵈면 말씀하셨고, 결국 제가 2001년 당시

7년후에 꼭 성당을 나갈 테니 그때까지 정정하게 사셔야 하다고

약속을 하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주님의 뜻은 다르셨지요.

여기서도 잠깐 쉭 하고 뛰어 넘어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번 부활절에 저와 제 신랑이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간의 이야기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고백하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많은 일이 있었지만 저를 하느님 앞으로 이끌기 위해

평생을 믿어온 개신교에서 걸어 나와, 어찌 보면 정말 낯설 수도 있는 천주교를

같이 다녀주고 예비자 교리 다 받고 이제 다시 영세받는 남편이 너무 고맙답니다.

그리고 저와 같은 탕자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가족과 또 교우여러분.

너무 감사합니다. 제가 이제 또다른 탕자를 위해 돌아오라고 기도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훨씬 더 고마운 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저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불러주신 하느님.

한분 뿐인 나의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바칩니다.

 

먼 길을 돌아왔지만 그래서 “감사”를 알게한 그 뜻에 머리숙이며……

 

어느 한 예비신자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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