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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5주간 화요일 복음묵상(2005-03-15)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5-03-15 조회수711 추천수4 반대(0) 신고

 

예수께서는 "너희가 사람의 아들을 높이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누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또 내가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것만 말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은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 두시지는 않는다. 나는 언제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하고 말씀하셨다.(요한 8, 28-29)
 

요한복음의 전체 구조를 잠시 살펴 보면, 우선 요한복음의 1장은 프롤로그

 

(서문)와 세례자 요한의 증언, 요한의 퇴출과 예수의 등장을 다루고 있으

 

며, 2장부터는 예수의 본격적인 공생활이 시작되어 12장에 이르기까지 꼬

 

박 3년간의 자기계시적 가르침과 활동을 들려줍니다. 13장부터 17장까지

 

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제자들과의 만찬석상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고별사

 

를, 18장에서 19장은 체포, 심문, 사형선고, 수난, 죽음과 무덤에 묻힘을,

 

20장에서 마지막 21장은 예수부활, 발현사화, 그리고 에필로그(맺음말)로

 

요한복음은 끝이 납니다. 요한복음이 그리스도교 신학 전반에 걸쳐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그 중에서 하느님 삼위

 

일체론과 그리스도론을 정립할 수 있도록 제공된 정보들은 참으로 심오하

 

고 귀중하고 값진 것입니다. 특히 요한복음 1장은 '전실존적 그리스도

 

론'을 2장부터 12장은 '하향 그리스도론'과 그리스도 신성의 하느님 본성

 

과의 일치성을, 13장부터 17장은 성령론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값지고 귀중하고 심오한 진리가 당장 그 자리에서 진가를 발휘한

 

것은 아니었는데, 우선 하느님의 진리는 유다교의 지식층으로부터 많은

 

반대와 오해를 받았고, 갈등과 논쟁을 초래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예수님의 진리선포와 자기계시는 계속되는데, 그것이 곧 하느님의 일

 

이며,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7장에서 8장

 

은 어떤 특별한 육체적 활동 없이 예수님의 순순한 자기계시적 가르침을

 

피력하고 있는데, - 물론 후대에 삽입된 요한 8,1-11(간음한 여인에 대한

 

유다인의 고발과 예수님의 용서의 이야기)을 빼고 봐도 좋고, 넣고 봐도

 

무방합니다. - 7장이 예수의 메시아적 기원에 관한 논쟁과 증언을 다루고

 

있다면, 8장에서는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자기증언으로 예수님의 자기계

 

시가 고조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7장은 나자렛 예수의 인성에 대한

 

논란을 통하여 메시아적 신성에로의 도약을 꾀하고 있는 반면, 8장은 예수

 

님의 신성에 중점을 둡니다.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는 정말 그리스도인가? 질문하는 편과 대답하는 편

 

의 간격은 갈수록 멀어지고 더 이상 오갈 수 없는 절벽으로 벌어집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법대로 처리하려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냉정함과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과 자비로 용서를 베푸는 예수님의 입장

 

(8,1-11)이 한 몫을 합니다. "나는 간다. 그러나 너희는 그곳에 오지 못한

 

다. 나는 위에서 왔지만, 너희는 아래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해 있

 

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이러한 언명은 예수님과 유다인 지

 

도자들 사이에 절벽만 있을 뿐 더 이상 이해 가능한 지평이나 공감대가 없

 

음을 뜻합니다. 예수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모르는 유다인들이 예수가 어

 

디로 가는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오신 곳으로

 

다시 가실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요?"라는 그들의 질문에 예수께서는 더욱 확실한 대답

 

을 주시는데, 물론 질문하는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대답이지만 군중

 

으로부터는 믿음을 얻습니다(30절). 예수께서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

 

는 데 있어서 하느님 자기계시의 한 방법인 '나는 ~ 이다'(ego eimi; 에고

 

에이미)라는 도식을 이용하는데,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자주 이

 

도식으로 자신의 정체를 밝히십니다. 가장 결정적인 대목은 물위를 걸어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겁에 질린 제자들에게 "나다. 두려워 할 것 없

 

다"(6,20)라고 하신 부분입니다. 그 외에도 예수께서 '나는 빛이다. 길이

 

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포도나무다. 착한 목자이다. 생명의 빵이다'라

 

고 하신 말씀은 모두 이 도식에 속합니다. 
 

이 도식은 참으로 엄청난 진리를 담고 있는데, 일찍이 하느님의 이름을 묻

 

는 모세의 조리 있는 질문에 하느님께서는 "나는 곧 나다"(출애 3,14)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곧 나다'는 뜻이 '야훼'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야

 

훼'라는 하느님 이름의 참 뜻은 무엇일까요? 우선, 이는 '나는 있는 자 그

 

로다'는 뜻으로 스스로 존재하는 자존자임을 말합니다. 둘째로, 이는 "나

 

는 있게 하는 자 그로다"는 뜻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있게 만든 자, 즉 창

 

조주임을 말하며, 나아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필연자임을 뜻합니

 

다. 셋째로, 이는 '나는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 자 그로다'는 뜻으로 하

 

느님의 자유와 초월을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이 도식을 사용하실 때

 

에는 하느님께서 본성에 의거하여 소유하시고 누리시는 모든 특성이 예수

 

님께도 가감없이 똑같이 해당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유

 

다인도 이런 사실을 알아차릴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사람의 아들이 십자가에 높이 달려질 때 가서야 예수님의 정체가 어

 

느 정도 밝혀질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십자가는 예수님의 운명입니다. 수

 

난과 죽음이 없이는 부활이 있을 수 없듯이, 십자가 없이는 예수의 정체성

 

에 관한 정확한 진리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십자가가 목적이거나 끝은 아

 

닙니다. 예수를 반대하고 거부하는 자들에게 십자가는 목적이요 끝이겠

 

죠.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로 내몰아 죽이면 모든 것이 다 끝난다고 생각합

 

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예수께서 오신 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길목입

 

니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에 대하여 더 많은 진리를 얻을 수 있는 열쇠이

 

기도 합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운명을 목전에 두고도 아버지께서 기뻐하

 

는 일을 한다는 예수님의 입가엔 미소가 도는 듯합니다. 나의 십자가가 하

 

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나도 웃으며 내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을

 

지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십자가

  
"너희는 아래에서 왔지만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 당연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분은 완전하시나 우리는 불완전합니다.

그분이 구세주로 오셨지만 우리는 자칫 그분을 놓칠지도 모릅니다.

그분은 온전히 하느님과 일치해 사셨지만 우리는 자주 그분을 배반합니

 

다.

하지만 그분이 누구신지 극명하게 드러난 것은 십자가상에서입니다.

그분의 십자가는 그분과 나 사이의 근원적 간격을 뛰어 넘게 해줍니다.

내 삶의 여정에도 짊어져야 할 십자가가 무수히 많습니다.

내 인생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사순절입니다.

내가 지는 십자가에 예수께서 나와 함께 못박히십니다.

아니,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십니다.

그래서 나의 십자가는 내가 예수님을 만나는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제 십자가에 저와 함께 못박히시는 주님,

그 신비를 깨달아 십자가를 통해

구원의 길로 나아가게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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