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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5주간 목요일 복음묵상(2005-03-17)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5-03-17 조회수901 추천수2 반대(0) 신고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 말을 잘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그러자 유다인들은 "이제 우리는 당신 이 정녕 마귀 들린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소.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죽었는데 당신은 '내 말을 잘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하니 그래 당신이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더 훌륭하다는 말이오? 예언자들도 죽었는데 당신은 도대체 누구란 말이오?" 하고 대들었다.(요한 8, 51-53)
 

오늘 복음은 그 동안 지속되어 온 예수님과 적대자들 사이에 벌어진 격렬

 

한 논쟁(7-8장)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초막절 축제를 맞아 예루살렘에 상

 

경하신(7,10) 예수께서는 7일간의 축제기간 중간쯤 해서(7,14) 성전으로

 

올라가 가르치기 시작하셨고, 이 가르침은 바로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

 

다. 특히 8장 전체는 축제를 마감하는 제8일째 날에 거행된 '등불을 끄는

 

예식'에서 있었던 긴 논쟁과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간음한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용서로 시작된 요한복음 8장의 가르침과 논쟁의 핵심은 '나는 ~

 

이다'(에고 에이미)라는 하느님 자기계시(출애 3,14)의 도식 안에서 선포

 

되는 예수님의 신성이 주제입니다.

 

 

여기서 잠시 초막절에 대해 알아보면, 초막절은 이집트를 탈출한 조상들

 

의 40년 광야생활과 또 광야에서 초막을 지어 묵었던 사실을 기념하는 축

 

제로서 티쉬리달 15일부터 21일까지(9월말부터 10월초) 거행됩니다. 후에

 

추수감사절로도 불린 이 축제는 7일간 지속되었고 제8일째 마감됩니다.

 

초막절 축제기간에 유다인들에게는 따로 초막을 지어 그 안에서 7일 동안

 

지내는 관례가 있었고,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두 가지 관례가 있었는데, 첫

 

째는 축제의 시작과 함께 성전 제단으로 향하고, 헌금궤가 놓여있는 '여인

 

의 뜰'에 금으로 만든 4개의 대형 등(燈)을 높이 세우고 불을 밝혀 성전 마

 

당은 물론 온 예루살렘을 비추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이 불빛에 예수께서

 

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

 

의 빛을 얻을 것이다"라며 당신을 비유하십니다.
 

요한복음의 서술 순서를 따르면 8장 전체는 시간상 7일간의 초막절 축제

 

가 끝나고 제8일에 해당하는 시점입니다. 제8일에는 축제 전체를 마감하

 

는 예식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다름 아닌 7일내내 밝혔던 대

 

형 등불을 끄는 예식이었을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초막절을 맞아 대형 등

 

불을 밝힌 이유는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야로 행군할 수 있도록 야

 

훼 하느님께서 낮에는 구름기둥을, 밤에는 불기둥을 세워주신 것을 기념

 

하는 것이었습니다.(출애 13,21-22; 14,19) 광야의 조상들이 이 구름기둥

 

과 불기둥의 도움으로 이집트 군대의 추적을 따돌리고 생명을 얻을 수 있

 

었던 것과 같이,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이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입니다. 여기서 빛은 곧 생명인 것이죠. 둘째는

 

축제 제7일째 아침 제관들이 실로암 못에 가서 물을 길어다가 순례객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제단에 일곱 번 물을 붓는 예식을 행하는 관습인데, 이

 

두 번째 관례는 예수께서 축제 마지막 날에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

 

서 마셔라"고 외치셨던 말씀과 직접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유다인들이 믿고 있는 하느님의

 

신성과 같은 것이며,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로서 가지는 신성입니다. 따라

 

서 예수 또한 아버지처럼 영원한 생명을 주고 싶은 사람에게 줄 수 있으

 

며, 아브라함이 태어나기도 전에 계셨던 분입니다. 이는 곧 예수께서도 영

 

생을 주관하는 분이시며, 시간이 있기도 전에 존재해 온 분이심을 의미하

 

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이 사실을 계시함에 있어서 "정말 잘 들어

 

두어라" 하고 말씀하시는 서두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200주년 신약성서에서는 이를 '진실히 진실히 당신들에게 말합니다' 라

 

고 번역하였습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 말을 잘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

 

다"(51절), 그리고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

 

터 있었다"(58절)는 구절에서와 같이 예수께서는 특별히 자기 자신을 계시

 

하고자 하는 말씀에 이 서두를 붙임으로써 계시하시는 말씀의 내용을 한

 

층 강조하고 계시는데,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라는 서두말씀은 공관복음

 

에서는 찾아 볼 수 없고, 유독 요한복음에서만 발견됩니다. 공관복음에서

 

이와 견줄만한 어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마태 5,22.28.32.34.38.44; 19,9), 그리고 "나는 분명히 말

 

한다"(마태 17,20; 19,23.28; 21,21.31; 마르 12,43; 루가 21,3)라고 하신

 

서두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신성을 선포함에 있어서 하느님의 자기계시 방법인 '에

 

고 에이미' 도식을 사용할 때는 하느님께서 본성상 소유하시고 누리시는

 

모든 특성이 가감 없이 그대로 예수께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

 

다. 사람도 자기가 누구인지를 밝힐 때 '나는 ~입니다', '나는 (누구, 무엇)

 

입니다' 라고 말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이 진술하는 '나는 (무엇)이

 

다'라는 말은 사실상 '나는 그(무엇)가 아니다'라는 말로 알아들어야 하는

 

데, 사람의 그 무엇은 모두가 다 세상에 태어난 다음, 후천적으로 습득한

 

것, 또는 후천적으로 맺어지는 관계에 의한 것이며 그 관계는 살아가면서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관계 속에서만 실존합니다. 관계

 

없이는 실존할 수 없으며, 관계없이 있는 존재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늘 자신의 실존적 관계에 충실하여야 하며, 그 관계를 잘

 

가꾸고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나는 (무엇)이다' 라고 말씀하실

 

때, 어떤 '무엇'이 술어로서 주어인 하느님을 설명하거나 진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바로 그 '무엇' 자체라는 말입니다. 앞서 언급하였

 

듯이 사람인 내가 '나는 (무엇)이다' 라고 한다면, 나는 원래 그 '무엇' 자

 

체가 아니기 때문에 '무엇'이라는 술어는 주어인 나를 설명하거나 그 의미

 

와 관계를 밝혀줄 뿐이지만 하느님은 그 어떠한 경우에도 보어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이신 예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시면, 그분은 진실로 세상을 밝히는 빛이시며, 우리

 

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이시고, 진리요 생명 그 자체이시라는 말이 됩니다.

 

하느님만이 "나는 곧 나다"(출애 3,14; 요한 6,20)라는 분이신데, 하느님만

 

이 '그것일 수 있는' 이유를 모두 자기 안에 소유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빛이시요, 말씀이요, 진리요, 생명 그 자체이십니다. 누

 

구든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그 말씀 안에 머무르는 것이며, 나

 

아가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됩니다. 여기서 영원한 삶이란 지상에서 마냥 이어지는 '지긋

 

지긋할 수도 있는 그런 삶'이 아니라 죽은 후에 맞이하는 새로운 삶입니

 

다. 사실 영원한 생명의 삶이 지상과 연속된 삶이라면 오히려 불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생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전혀 다른 삶이 될 것입니다.

 

유다인들의 눈에는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하느님의 예언자들도 다 죽

 

은 것으로 보이지만, 그들은 하느님 곁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습니

 

다.(루가 16,19-31/ 부자와 라자로 비유; 마태 17,1-8/ 예수의 거룩한 변

 

모 참조.) 이 생명을 그들에게 주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신 예수님이십니

 

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보다 훨씬 전인, 천지창조 이전부터 계

 

시는 분입니다. 이러한 언명이 '전 실존적 그리스도론'을 가능하게 합니

 

다. 아브라함은 태어났지만(기노마이, ginomai), 예수님은 처음부터 계시

 

는 분이십니다(에이나이, einai). 사실 시간이 하느님을 구속하거나 제한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는 시간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있다

 

면 하느님은 이를 초월하여 계시는데, 하느님을 굳이 인간이 말하는 시간

 

영역, 즉 과거, 현재, 미래의 영역에로 끌어온다면, 하느님은 항상 현재에

 

만 계십니다. 시작이 없으시니 과거가 없고, 끝이 없으시니 미래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느님은 현재, 그것도 순수현재(pura praesentia)

 

에 존재하십니다. 따라서 하느님은 늘 산 자의 하느님이십니다.(로마

 

14,9) 오늘 복음을 통해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자기계시는 절정

 

에 이르렀고, 동시에 유다인들의 불신과 인내심도 그 한계에 달하여 손에

 

돌을 거머쥐었습니다. 이제 그 때는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권위
 
유다인들에게 아브라함은 대단히 권위있는 존재였습니다.

 

하느님 말씀만 믿고 미지의 길에 자신의 삶을 다 걸었으니까요.

신앙의 조상으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었다'는 예수님 말씀은

유다인들에게는 조상에 대한 모욕이고 동시에 신성모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돌을 집어 듭니다.

그러나 하느님이신 예수께 신성모독이라는 이유로 돌을 든다는 것 자체가

 

모순입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인간의 권위는 하느님의 권위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기 때

 

문입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인간의 권위에 걸려 넘어집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갈망했던, 하느님의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 실현됨을

 

보지 못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기 확신이나 자기 주장조차 포기할 수 있을 때 진정으로

 

믿을 수 있고,

 

또 믿는 자만이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 저를 비우고 또 비워
당신의 참된 권위 앞에 깊이 머리 숙이게 해주십시오.
그것만이 생명을 얻는 길임을 나날이 깨우쳐 주소서.

 

                                                                                 - 출처: 단순한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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