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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빨래는 얼면서 마르고 있다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5-03-18 조회수877 추천수2 반대(0) 신고

 빨래는 얼면서 마르고 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주제랄까, 강조하는 내용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이 물음을 던졌더니 수녀원 미사에서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고, 병원 미

 

사에서는 아주 여러 명이믿음이라고 대답하더군요. 수녀님들은 너무 쉬운

 

질문을 하면 무시한다고 생각하셔서 그런지 대답을 잘 안 하셔요. 그런데

 

사실 대수로운 일이 아닌 것 같지만 대답을 해 주는 것이 얼마나 힘이 되

 

는지 몰라요. 함께 호흡한다고 할까, 그런 것이 느껴지거든요, 함께 하는

 

것이 참 중요해요. 늘 보면 오히려 병원 미사에서 신자들에게서 반응이 있

 

기 때문에 더 열정으로 강론을 하게 되지요. 대개 양쪽에서 조금은 다르게

 

하지만 제가 강론 한 후에 느낌이 참 달라요. )

 

 

  예, 오늘 우리에게 묵상하도록 초대하는 주제는 믿음이예요. 오늘 독서

 

히브리서는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을 확증

 

해 줍니다. 라고 하면서 믿음의 선조 아브라함에 대해 간결하면서도 매우

 

함축적으로 전해 줍니다. 믿음을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마는

 

저에게 인상 깊게 남아 있는 정의는 폴 틸리히라는 신학자의 말이지요. 믿

 

음이란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용기이다.

 

 

  그래요. 실제로 우리네 삶에서 보증해 주고 확증해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참 용기가 필요하지

 

요. 저는 믿음을 희망, 바람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고 봐요. 믿음은 지

 

금의 상황으로 보면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그분에 대한 신뢰 때문

 

에, 오늘은 아니라도 내일은 그분이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리라는 바

 

람을 지니고 어떤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라고 생각해요. 그것이 없다

 

면 우리네 삶은 너무나 절망적일 때가 많지요.

 

 

  아브라함을 봐요. 당시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어요. 인간

 

적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지만 궁극적으로 선으로 이

 

끄시는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시리라는 희망으로 낯선 타향을 향해 길을

 

떠날 수 있었고, 외아들 이사악을 바치라는 터무니없는 명령에도 묵묵히

 

밤길을 걸어 모리악 산으로 향할 수 있었겠지요.

 

 

  오늘 독서에서 머물게 된 대목은 이것입니다. 이 지상에서는 자기들이

 

타향 사람이며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실지로 그들이

 

갈망한 곳은 하늘에 있는 더 나은 고향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

 

라보아야 하는 곳은 이승의 고향만은 아닙니다.

 

 

  나희덕 시인의 빨래는 얼면서 마르고 있다라는 시를 읊어 주었지요.

 

  이를테면, 고드름 달고

 

  빳빳하게 벌서고 있는 겨울 빨래라든가

  달무리진 밤하늘에 희미한 별들,

 

  그것이 어느 세월에 마를 것이냐고

  또 언제나 반짝일 수 있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대답하겠습니다.

  빨래는 얼면서 마르고 있다고,

 

  희미하지만 끝내 꺼지지 않는 게

  세상엔 얼마나 많으냐고 말입니다.

 

  상처를 터뜨리면서 단단해지는 손등이며

  얼어붙은 나무껍질이며

 

  거기에 마음 끝을 부비고 살면

  좋겠다고, 아니면 겨울 빨래에

 

  작은 고기 한 마리로 깃들여 살다가

  그것이 마르는 날

 

  나는 아주 없어져도 좋겠다고 말입니다.

 

  어린 시절, 겨울 빨래를 널어놓으면 물이 빠지면서 고드름이 달렸지요.

 

그때는 왜 그렇게 추웠는지요. 고드름이 달린 빨래가 어떻게 마르겠는가

 

생각하지만 놀랍게도 빨래는 얼면서 마르고 있습니다. 시인은 어린 시절

 

어머니들에게서 듣던 새로울 것이 없는 사실을 들려주면서 삶을 돌아보도

 

록 초대합니다. 빨래가 마르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지요. 그래도 시간이

 

흐르면 빨래가 조금씩 마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눈에 보이지 않

 

고, 도저히 그럴 것 같지 않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연이라든가, 세상의 이치라든가 그런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닐까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이나 고통도 참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받아들이려

 

고 용기를 갖게 되는 것은 그분이 우리 안에 심어 주신 겨자씨만 한 믿음

 

이겠지요. 우리가 그것을 조금씩 키워 나가야 하리라 다짐해 봅니다.

 

 

  지금 바라보는 하늘은 달무리 져서 별들이 희미해 보이지만 내일 뜨는

 

별은 초롱초롱 빛나리라는 바람과 희망을 지니면서 우리가 향해 가는 여

 

정은 이승의 고향이 아닌 영원한 본향임을 잊지 않기로 해요.


                      

 

                                                                                                 -류해욱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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