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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주간 수요일 복음묵상(2005-03-23)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5-03-23 조회수1,018 추천수1 반대(0) 신고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아 같이 음식을 나누시면서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 제자들은 몹시 걱정이 되어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물었다.(마태 26, 20-22)
 

지난 사순 제5주간 월요일부터 어제 성주간 화요일까지 평일미사의 복음

 

으로 요한복음이 봉독되었지만 오늘 성주간 수요일에는 마태오복음에 담

 

겨 있는 수난사화의 한 부분을 듣습니다. 오늘 복음은 유다가 대사제들로

 

부터 은전 서른 닢을 받고 예수를 넘겨주기로 이미 약속했고, 무교절 첫

 

날, 과월절이 시작되는 저녁 시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시는 과월

 

절 만찬에서 유다의 배반을 결정적으로 예언하심으로써 본격적인 수난사

 

화의 도입부 역할을 담당합니다. 이는 예수께서 아직 오지 않았다고 자주

 

말씀하셨던 '당신의 때'가 드디어 왔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 때는 '제자

 

의 이율배반적인 행동'과 과월절 만찬에서 스승이 발설하신 '제자의 배반

 

예고'로 시작됩니다. 스승의 제자가 스승을 넘겨주기로 약속했고, 스승은

 

제자의 배반을 예고한 것입니다. 참담한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제는

 

요한이 쓴 비극을 접했고, 오늘은 마태오가 쓴 비극을 접합니다. 성주간

 

화요일과 수요일에 연이어 같은 비극을 들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요한의 기록과 마태오의 기록이 마지막 만찬의 틀 안에서 수난사

 

화의 시작으로 제자의 배반을 주제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전후 문맥상 많

 

은 차이점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수난사화의 도입부에 있어서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가장 큰 차이점

 

은 최후만찬의 시점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과월절을 하루 앞두고

 

(요한 13,1) 마지막 만찬으로 추정되는 제자들과의 식사를 나누는 식탁에

 

서 세족례를 행하시고 유다의 배반, 새계명 선포, 베드로의 배반을 차례로

 

예고하시면서 길고 장황한 고별사를 행하신 것으로 보도하는 한편, 공관

 

복음은 무교절 첫날(마태 26,17; 마르 14,12; 루가 22,7) 과월절이 시작하

 

는 시각에 제자들과의 최후만찬, 이 자리에서 유다의 배반 예고, 성체성사

 

제정, 그 후 올리브산으로 향하는 도중에 베드로의 배반을 예고하고 있습

 

니다. 
 

마르코와 루가는 무교절 첫날에 과월절을 위한 양을 잡는 관습이 있었다

 

고 하는데, 무교절과 과월절은 동시에 시작되는 축제(출애 12,1-20)입니

 

다. 참고로 유다인의 모든 축제들은 안식일과 마찬가지로 전날 저녁 해질

 

무렵부터(대략 6시경) 시작됩니다. 따라서 최후만찬의 시점이 요한복음에

 

는 과월절 하루 전 저녁 6시 이후로, 공관복음에는 과월절이 시작하는 바

 

로 그날 저녁 6시 이후라는 점은 확실합니다. 왜 같은 사건을 이렇게 다른

 

시점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어느 쪽이 정확한지를 따져 묻는 것은

 

사실 별 의미가 없습니다. 물론 성서학자들 간에는 다양한 의견이 있는데,

 

결국 요한복음사가가 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즉 요

 

한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과월절이 시작되기 전 낮에(또는 해질 무렵

 

에) 양을 잡는 예식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잠시 무교절과 과월절에 대하여 살펴보면, 원래 무교절(Mazzot)은 "누룩

 

없는 빵의 축제"로 농경사회였던 이방인 가나안의 축제였으며, 과월절

 

(Pesah)은 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탈출을 기념하는 축제로서 니산월(유대

 

력으로 1월) 15일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이 축제는 둘 다 이미 니산월 14

 

일 저녁부터 시작됩니다. 역사적인 이집트 탈출사건이 벌어진 훨씬 후에

 

기록된 출애굽기는 무교절과 과월절 축제를 한꺼번에 묶어 이스라엘의 해

 

방을 기념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출애 12,1-20)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

 

들은 니산월 10일에 어린양을 준비하여 두었다가, 이를 니산월 14일 해가

 

지기 전에 도살하여(대략 오후 3시~6시 사이) 누룩 없는 빵을 함께 준비하

 

여 놓고, 해가 저문 뒤에(무교절과 과월절의 시작) 불에 구운 양고기와 누

 

룩 없는 빵을 먹음으로써 축제를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누룩 없는 빵은 곧

 

정월 14일 저녁부터 20일 저녁까지 먹어야 했습니다.(출애 12,18) 
 

그런데 최후만찬의 시점이 정확히 언제였던가를 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왜 예수님의 최후만찬과 십자가 죽음이 무교절

 

과 과월절에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해결점은 '누룩 없는 빵'과

 

'어린양의 피'입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죄사함을 위하여 내어줄 자신의

 

몸과 피를 무교절과 과월절 축제의 의미로 부각시켜 신약의 새로운 축제

 

를 세우시려 하신 것입니다. 이로써 구약의 해방절 만찬은 제자들에게는

 

스승과 함께 나눈 최후의 만찬이 되었고, 예수님에게는 세상과 인류를 죄

 

와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구원의 징표요 새로운 계약의 설정이 된 셈

 

입니다.

 

 

유다의 배반에 관하여도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오늘 복음의 서두가

 

밝히고 있듯이, 유다는 대사제들로부터 예수를 넘겨주기로 약속하고 은전

 

서른 닢을 받았습니다. 이것으로 유다가 스승을 배반했다는 말은 없으나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보고 있었다하니 이미 배반한 것으로 간주해도 좋

 

을 것입니다. 유다가 왜 이토록 무모한 결정을 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

 

으니 전후 구절을 토대로 각자의 상상에 맡겨야 할 것입니다. 어쨌든 예수

 

를 넘겨주는 대가로 유다가 받은 은전 30닢은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이

 

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받은 은 20냥(창세 37,28), 들릴라가 삼손을 넘겨

 

주는 대가로 받은 은 1,100세겔(판관 16,5.18), 그리고 즈가리야 예언자에

 

게 팔아 넘길 양을 친 대가로 준 30세겔(즈가 11,12)을 떠올려줍니다. 
 

아무튼 유다도 12제자 중 하나이며, 예수님과 다른 제자들과 더불어 3년

 

간 동고동락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때'가 드디어 왔음을 아시고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하시는데, 이 식사

 

는 무교절과 과월절, 해방절의 만찬이요, 동시에 최후의 만찬입니다. 예수

 

께서는 해방절 만찬 식탁에 앉아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

 

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21절) 하고 말문을 여시자, 이에 제자들은 몹시

 

걱정이 되어 제각기 자기는 아닐 것이라고 반문합니다.(22절) 예수께서는

 

요한복음의 보도와는 전혀 달리 "지금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은 사람이

 

바로 나를 배반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성서에 기록된 대로 죽음의 길로

 

가겠지만 사람의 아들을 배반한 그 사람은 화를 입을 것이다. 그는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을 뻔했다"(23-24절) 라고 하십니다. 예

 

수님과 함께 그릇에 손을 넣은 사람이라니 그가 과연 누구였을까요? 사실

 

막막합니다. 물론 배반자 유다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죽게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사형언도를 받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마태 27,3-10), 아니면

 

은전 30닢으로 땅을 샀다가 거꾸러져 배가 터지는 극도의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는지(사도 1,16-20)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

 

 

아무튼 이 시점에서 예수께서는 누구 하나를 지목하신 것이 아니라 12명

 

중 누구든지 그가 될 수 있다는 의도로 배반의 가능성과 영역을 극대화시

 

키고 계십니다. 결국 제 발이 저린 유다가 걸려들었는데, "선생님, 저는 아

 

니지요?" 그러자 예수님은 "그것은 네 말이다" 하고 일축하십니다. 이건 또

 

무슨 뜻일까요? 첫째는 유다가 자기는 아니라는 말이 사실과 다른 말로서

 

"너만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고, 둘째는 "그것이 너의 말

 

이기는 하지만 나(예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라는 뜻이 될 수도 있습니

 

다. 대체로 후자의 의미에 동의하고 싶은데, 왜냐하면 예수님의 마지막 만

 

찬이 시작부터 제자의 배반으로 침울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제자의 배반 때문에 십자가의 길을 가시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

 

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의 관계상 아들로서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내

 

어 맡겼으며, 본성상 같은 하느님으로서 완전한 자유의지로 세상 구원의

 

십자가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람됨의 참 뜻일 것

 

입니다. 배반 때문에 십자가의 길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배반의 길과 십

 

자가의 길은 서로 완전히 다른 길이기 때문입니다. 
 

 

기다리시는 분
 
유다는 이미 스승을 팔아 넘기는 대가로 은전 서른닢을 받았습니다.

그러고도 예수께서 배반을 예고하실 때 자기는 아니라고 태연하게 말합니

다.

 

예수님은 유다의 음모와 속임수, 거짓을 다 알면서도 그의 선택을 강요하

지 않으십니다.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분인데 유다의 멸망을 바라셨을 리도 없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오히려 유다에 대한 그분의 가슴 아픈 연민을 드러내 줍니다.

적어도 최후의 순간에는 유다도 베드로처럼 용서받았으리라고 믿고 싶습

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어리석음과 죄를 다 알고 계시지만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고

내가 뉘우쳐 돌아오기를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기댈 곳이 있다는 믿음을 주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저희도 애틋한 사랑과 연민으로 팔을 벌리게 하시고
이웃의 의지가 되게 하소서
.

 

 

                                                                                - 출처: 단순한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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