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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역사 자료로 보는 독도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5-03-23 조회수777 추천수2 반대(0) 신고

역사 자료로 보는 독도

 

 

 

 

 

        

 

 



 

1. 512년 6월 (신라 22대 지증왕 13년)

1) 지금의 울릉도를 본도(本島)로 하고 독도로 인정되는 우산도(于山島)를 작은섬
으로 하는 우산국(于山國)이 라는 하나의 독립국(獨立國)이 있었다.

2) 신라 22대 지증왕은 아슬라주(阿瑟羅州) 군주(君主)로 이찬 벼슬에있던 이사부
를 시켜 우산국을 정복케 하였다.

3) 이사부는 나무로 만든 목우사자(木偶獅子)라는 무기를 써서 우산국을 정복한
뒤 6월에 신라에 귀순시켰다.

4) 그 뒤 우산국은 신라에 매년 토산물을 바쳤다.

고려시대

2. 930년 (고려 태조 13년)

고려 태조13년 우릉도-지금의 울릉도)에서 사절로 백길,토두 두사람을 보내어 조
정에 공물을 바쳤다. 이때 고려 조정에서 백길에게는 정위, 토두에게는 정조라는
벼슬을 내렸다. 이 때가 고려 태조 왕건이 길창(지금의 안동) 전투에서 후백제
견훤을 무찌른 해이다.

3. 1018년 (고려8대 현종 9년)

(우산국이) 동여진의 침략을 받아 항복하였으나 곧 조정에서 이완구를 시켜 피난
민을 우산국으로 돌려 보내고 농기구와 이물품을 전달

4. 1022년 (고려8대 현종 13년)

동여진의 침입으로 살기가 힘들어진 백성들을 예주에 살도록 했다.

5. 1132년 (고려 17대 인종 10년)

울릉도 독도에서 → 조정에 공물을 바침

6. 1132년 (고려 17대 인종 10년)

우산국대신 → 우릉(于陵 또는 羽陵)이란 이름으로 바뀌고 우산국주(宇山國國)대
신 우릉성주로(于陵城主)로 바뀜. 이는 우릉도와 우산도(독도)로 구성된 우산국
이 완전히 중앙정부의 직할아래 들어갔음을 의미함.

7. 1141년(고려 17대 인종 19년)

강원도인 명주도 감창사(溟州道 嵌倉使) 이양실이 울릉도에 사람을 보내 본토에
서 볼 수 없는 진귀한 과실과 나뭇잎을 채취하여 조정에 바쳤다.

8. 1157년 (고려 의종 11년)

명주도 전중내급사 김유림 파견 → 섬의 중앙 꼭대기 (지금의 성인봉)에서 동으
로 1만여보, 서로 1만3천여보, 남으로 1만 5천여보, 북쪽으로 8천여보에 달하고,
마을 7군데 등 보고.

9. 1197년 (고려 명종 27년)

동쪽지역으로 이주시켜 농사짓게 했으나 풍파가 심하여 다시 서쪽으로 이주.

10. 1242년 (고려 고종 29년)

실력자 최이에 의하여→울릉도 이민 사업 실시 → 풍랑등으로 시민사업 실패거듭


조선시대

11. 1416년 (태종 16년)

울릉도에는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비워두는 - 공도 정책 발표.

12. 1417년 (태종 17년)

삼척사람 김인우를 우산무릉등처안무사로 임명 → 울릉도 파견 → 15호 86가주민
이 있음 발견 → 3명만 안무사에게 설득되어 육지로 옮김→여기서 우릉도를 공도
정책으로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한 이유중에 주목할 점은 "강원도에서 무릉도까
지 풍랑속의 머나먼 뱃길로 수장될 위험을 무릎쓰고 이곳 무릉도에 와서 사람이
살게 된데는 고려말 나라의 부패와 정권의 불안정으로 가혹한 세금과 부역을피
하여 이 곳으로 왔기 때문이란 점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13. 1425년 (세종 7년)

태종 뒤를 이은 세종도 공도정책계승 → 김인우를 역시 "우산무릉등처안무사"로
파견. 여기서 "우산무릉등처"란 섬이 우산도와 무릉도 등 2개가 있다는 표현이
분명함.

14. 1438년 (세종 20년)

1) 울진 사람의 남회와 조민을 무릉도순찰경차관으로 파견

2) 남녀 66명을 수색하여 본토 송환 → 본국 모배죄

3) 주모자 김안 → 교수형, 나머지는 노복으로 삼음.

15. 1441 (세종 23년)

만호 남호에게 울릉도 수색지시 → 70여명 송환

공도정책 계속 이후 → 울릉도 독도에는 사람이 아무도 살지 않았던지 육지와 몇
년동안 소식이 두절됨 → 그 후 새섬이 있다는 설이 나돔.

16. 요도/신도설

그리하여 공도가 된 후 사람들이 항해 중 울릉도(무릉도),독도(우산도)를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새로 생긴 섬이란 신도설, 요도설이 떠돌았다. 조정에서 신도/요도를 확인하려 했다.

그 확인 기록이 바로 세종실록 지리지에 실려있다고 보면 된다.

17. 세종실록 지리지

강원도 울진 현조에 → 우산과 무릉의 두섬이 울진현 바다 한가운데 있는데 두섬의 거리가
멀지 않아 맑은 날에는 바라볼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18. 삼봉도


세종 뒤를 이은 성종때도 해안주민들 사이에 강원도 경내에 속하는 동해 한 가운데에
삼봉도가 있다. 부역이나 세금을 피해 도망간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소문이 조정에까지
들어갔다.


19. 삼봉도 수색

조정에서 파견된 강차관 박종원이 삼봉도에 다녀왔다는 김환경과 함께 삼봉도 수색했으나
실패 → 삼봉도는 독도이다

20. 성종 실록

김자주의 삼봉도(독도) 묘사 기록

25일에 섬서쪽 7∼8리 남짓한 거리에 정박하고 바라보니 섬북쪽에 세바위가 나란히 섰고
그 다음은 작은섬이 있고 다음은 암석이 나란히 섰으며 다음은 중도이고 중도 서쪽에도
작은섬이 있는데 그 모두가 바닷물과 통한다. 바다와 섬사이는 인형 같은 것이 별도로
30여개가 서있는데 의심나고 두려워 그섬에 접할 수가 없어 도형을 그려 돌아왔다.

[풀이하면]

섬북쪽의 세바위는 → 지금의 서도 북방에 솟은 세 개의 바위섬이고, 작은섬과 암석 →

동서도 사이에 무수히 흩어져 있는 바위들이고, 중도는 → 서도를, 중도 서쪽의 작은섬은

→ 동도를, 그 사이로 바닷물이 통한다 → 지금의 동도와 서도사이에 폭 110 ∼160m,

길이 330m 좁은 수도를 의미한다. 바다와 섬 사이의 인형은 → 물개로 바위에 앉아있던

물개의 일종인 강치를 보고 적은 것이다.

21. 1531년 (중종 26년)

신증동국여지승람」의 45권 울진현군에 → 우산도와 울릉도 두 섬은 울진현 정동에 있다.

(우산도) 세봉우리가 하늘로 곧게 솟았으며 남쪽봉우리가 약간 낮다.

날씨가 맑으면 (울릉도에서) 세봉우리가 위의 나무와 산밑의 모래톱이 역력히 보이고 바람

이 잦아지면 이틀에 도착할 수 있다.

22.「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독도에 관한 기록이 있다는 사실은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입증하는 확고한 증거가 되기 때문에 무척 중요하다.

→ 신라 지증왕13년 이래 → 세종실록 지리지 → 고려사 →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르기까지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일관되게 나타내고 있음은 독도가 우리영토임을 분명히 한 것이 틀림 없음

23. 1693년 (숙종 19년)

1) 대마도주가 동래부로 서계 보내옴 → 조선 어민의 죽도 출어금지 요청

2) 조정에서 →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확인하는 회신

3) 영의정 남구만 → 형세조사차 삼척첨사를 울릉도에 파견

24. 1693년 (숙종 19년)

안용복, 박어둔 등 40여명의 조선어부는 울릉도, 독도에서 조업중인 일본 어선 발견

→ 추방을 위한 격투 (독도 사수 - 안용복 장군편 참조)

25. 1697년 2월 (숙종 25년) 「신증동국여지승람권 45여지고」

일본 막부 → 독도는 조선영토임을 공식인정

1) 일본의 도쿠카와 막부는 대마도주로 하여금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확인하는 동시에

불법월경을 스스로 금지시키겠다는 서계를 보내었다.

2) 일본 도쿠카와 막부는 울릉도와 독도를 두고 "두섬은 조선의 영토"라는 서계를

휘하의 관백과 태수에게 쓰게 했을 만큼 독도의 조선 영유권 존중

3) 조정은 울릉도 수토제도를 체택하고 3년에 한번씩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에

관원을 보내 순검케하여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주권은 변함없이 행사함.

26. 1699년 (숙종 25년)

안용복 장군은 일본 에도 막부(정부)로부터 울릉도. 독도가 조선땅임을 인정하는 증서를 받음

(독도사수 -안용복 장군편 참조)


대한제국

27. 1900년 10월 25일 (고종 37년)

칙령 제 4호 울릉도는 울도로 개칭하고, 강원도는 울진현에 속해있던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를
묶어서 하나의 독립군으로 설치하면서 군청관할 구역을 울릉전도와 죽도 및 석도라고 못박았
다. 여기서 죽도는 울릉도 섬목앞의 실제 죽도이고, 석도는 → 석 즉 돌 → 독도를 의미한다.
<독도의 독은 홀로 (독)이라고 하고 돌 (독)이라고도 한다.>

28. 1904년 8월 23일 (고종 41년)

조일 의정서에 의거 → 독도에 → 일본 해군 부대 설치 (일본의 독도 유린 참조)

29. 1905년 5월 17일 (고종 49년)

일본 정부 → 독도를 죽도라 변칭하고 시네마현 토지대장에 기재하고 일방적으로 일본 영토
에 합병 선언

30. 1905년 11월 17일 (고종 49년)

을사늑약 체결로 조선국권 상실

31. 1910년 8월 29일 (순종 4년)

경술국치로 완전히 나라전체가 일본 식민지가 됨


대한민국

32.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 → 한국독립 → 독도가 우리나라 영토로 원상 회복됨

33.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 평화선 천명으로 독도에 일본의 접근 금지

※ [참조] - 이승만이 대한반도 주변의 수역(水域)에 한국의 주권(主權) 을 선언한 해양선

(海洋線). 해안에서 평균 60마일에 달하며, 이 수역에 포함된 광물(鑛物)과
수산자원을 보존하기 위하여 설정한 것임. 1965년 6월「한일 조약(韓日條約)」에
의해 철폐됨.

34. 1952년 4월 28일

전승 연합국 대일 강화조약 때 기준선을 제주도 ― 거문도 ― 울릉도를 포함한다고 하고 ―
독도 언급이 없음

1) 우리측 → 독도는 울릉도 부속섬이므로 언급 없이도 당연히 울릉도에 포함 됨.

2) 일본측 → 1910년 한일합방전인 1905년에 이미 시네마현 토지대장에 등재된 일본영토

이므로 연합군이 일본영토로 인정하고 이 조약에서 죽도(독도)는 당연히
빠졌다고 억지주장.

35. 1953년 7월 하순 또는 8월 초

1) 울릉군청과 경찰에서 → 일본 팻말 뽑아버리고

2) 경상북도 울릉군 남면 도동 표지판 세움.

3) 일본경비정 관망 후 뽑아버림.

36. 1953년 4월 2일 오전 8시 20분

우리측 민간인 독도수비대 독도 서도 상륙

37. 1954년 9월 15일

독도가 우리땅임을 확인하기 위한 3종의 독도도안 우표 발행.

38. 1955년 10월

국립 경찰 경비대 독도 상륙

39. 1965년

한일회담 타결의 걸림돌인 독도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김 종필/大平(김 오히라)메모에서
김 종필이 "독도를 비행기로 폭파해 버리자"는 황당한 말을 했음.

40. 1965년 6월 22일

한일 기본조약 체결 → 이 때 독도 문제를 분명히 하지 못한 것이 일본에게 빌미가 되어

일본의 독도 망언 등이 나오고 있는 것임.

41. 1996년 2월 10일

극일운동시민연합 등 전국 시민.사회단체 → "일본의 독도 망언 규탄시위"

<1996년 2월 11일자 조선일보 등 전국언론 참조>

42.1996년 3월 21일

극일운동시민연합 주도 <독도 동.서도 매립을 위한 독도 현장조사차 독도순례 황 백현 의장독도상륙>

43. 1997년 6월 1일

독도에 최초로 일반전화 개통 (0566-791-0001)

44. 1997년 12월 1일

1) 독도접안 공사 완공 (500톤급 정박 가능) 그러나 수면에서 너무 낮게 올라와 있기 때문에
사용 불가한 무용지물이 되어있음.

2) 어부의 집 건축 (서도에 어부의 집을 건축하면서 유일하게 독도에 주민등록이 되어있는
김 성도씨의 고기잡이 배를 올려놓는 선가장을 철거해 버렸기 때문에 김성도씨 마저
고기잡이 하러 독도에 가지 못하고 울릉도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음)

3) 극일운동시민연합에서 - 범국민 독도 순례운동 진행 중 → 현재에 이름

45. 1998년 9월 ― 신 한.일 어업협정으로 독도 영토훼손

1) 독도를 한.일 중간수역으로 일본에 반쯤 넘겨준 꼴 → 속칭 "신 한.일 어업협정"

2) 독도포함 - 울릉도 기점 35해리 (1해리 = 1.8531㎞. 35×1.8531)
즉, 64.8585㎞까지 일본에 내어줌 <울릉도∼독도거리 = 92㎞>

3) 일본으로부터 30억차관 받기로 한 댓가치고는 매국이 분명함

46. 1998년 10월

독도에 허가없이 입도 가능하도록 하겠다고 해경이 국회에서 답변

→ 쾌속정 소형이 없어서 - 현재 곤란

47. 1999년 11월 8일

황백현 극일운동시민연의장이 솔선수범으로 독도로 전가족 6명이 호적을 옮기고

<범국민적으로 독도호적 옮기기 운동을 시작하였음

(1999년 12월 21일현재 19세대 64명의 애국시민이 독도로 호적을 옮김)

48. 1999년 12월 1일

독도유인도화국민운동본부 발족

49. 1999년 ― 우리정부대책

무대책이 상책이라는 해괴망측한 정책 아닌 정책으로 일본의 「독도점령 시나리오」

제2번인<독도 한.일 공동관리수역>으로 하는데 합의해 주고 말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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