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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물을 맑게 하는 십자가 (성금요일 복음 묵상)
작성자이현철 쪽지 캡슐 작성일2005-03-25 조회수857 추천수8 반대(0) 신고

                                        물을 맑게 하는 십자가

 

    십자가를 안테나로!

    은혜로운 성금요일입니다. 각 본당에서는 수난복음을 듣고 또 십자가의 길을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서 박미라님의 묵상글과 저의 글을 퍼드립니다. 님들도 각자의 십자가의 길을 통해 하느님의 뜻과 일치를 이루며 1급수에 산다는 산천어, 금학이 되시길 바랍니다....가브리엘통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물고기가 자신의 근원지를 찾아가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샘물이 펑펑 솟아나는 높은 산 계곡에서 살아야 하는 물고기가 죽게 되어 아무런 힘도 없이 점점 더 더러워지는 흐르는 물을 따라 아래로 아래로 떠내려오다가 다시 살아나게 되어(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죽어있었기에 계속 떠내려가던 흘러가는 더러운 물'에서 방향을 바꾸어 자기가 태어난 근원지로 가기 위해 '흘러 내려왔던 물'을 거슬러 되돌아가는 일을 시작하여 마침내 위로 오를 수 있는 장소에 도달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은 물고기는 내려갈 곳이 더 남아있으면 계속하여 떠내려 가든가 물이 고여 있으면 물이 움직이는 대로 왔다 갔다 하면서 더러운 물에 자신을 내맡깁니다.....하지만 살아있는 물고기는 자신이 속해 있던 물이 더럽다는 것을 느끼기에 그 물로 인해 더러워진 자신을 더 이상 받아줄 수가 없어 과감히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이 태어난 깨끗한 물을 찾아가기 위해 위로 올라가기로 작정하고, 근원지로 나아갈 수 있는 장소를 찾아갑니다. 그곳을 찾은 그의 앞에는 위로 오르는 험한 계곡이 펼쳐집니다. 위로 오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가 오르는 길에는 부모도 친구도 아무도 함께 할 수 없고 오로지 혼자서 외로이 힘겹게 가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 곳에 도달한 때부터 벌써 자신의 온 몸을 감싸고 있는 전보다는 깨끗한 물의 감촉을 느낄 수 있으며 자신의 몸 안으로 들어 온 물은 벌써 그를 예전보다 더 깨끗하게 해줍니다. 

  그 물은 위로 올라가면 갈수록 더욱 더 깨끗해져 그 물을 먹고 사는 물고기를 점점 더 깨끗하게 해주며, 마침내 죽음의 관문인 12처를 통과하면 맑디맑은 물이 있는 자신이 태어난 곳에 도달하게 되어 물고기는 태어날 때의 깨끗한 자신의 본모습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박미라님의 묵상글 중에서-



 

                             윗물이 맑아야...(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학자 기념일)


    얼마 전에 충격적인 밀양 여중생 성폭행사건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경찰이 그 수사과정과 보도과정에서 피해자, 가해자들의 인권을 유린했다고 하여 그 파문은 일파만파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어느 경찰이 학생들에게, “너희가 밀양물을 흐려놓았다...”라고 꾸지람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그 학생들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요? 오히려 그 학생들이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지요!” 하고 반문할 지도 모릅니다.


  오늘 복음(마태 21, 28- 32)에서 예수님께서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이런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 라고 하시며, 세리와 창녀들은 세례자 요한의 말을 믿고 회개를 하였지만 오히려 요한의 목을 베게 한 소위 지도자들의 교만과 죄를 고발하십니다. 그들은 세리와 창녀들이 예루살렘의 물을 흐려놓았다고 걱정했지만 실상 하느님의 나라의 물을 흐려놓고 있는 것이 정작 자신들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민성기 요셉신부님의 저서인 일상의 아름다움 즉 ‘일상의 신화’에서 발췌한 ‘학이야기’를 퍼드립니다. 이 학이라는 새는 아주 깨끗한 물이 흐르고 공기가 맑은 곳에만 산다고 하는데, 우리의 청소년들도 이러한 백학, 현학, 금학의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혹시 우리가 물을 흐려놓아 그들을 까마귀로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의 마음에서 말입니다.


  <정화-조명-일치의 단계를 살아가는 영적성숙의 관점에서 학의 유형을 말한다면 백학-현학-금학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백학은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있는 학입니다. 그러나 현학을 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흔히 볼 수 없는 학이기에 현학은 백학과 차원이 다른 삶을 사는 학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영적 성숙의 과정에서 정화를 거쳐 조명의 단계에 이른 사람을 현학에 비유합니다. 그만큼 영적 성숙의 과정인 첫 단계인 정화의 단계조차도 사실 살기는 어렵습니다...  수도생활을 하거나 성직생활을 한다고 해서 다 영적 성숙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백학으로서의 정화의 단계를 살아가는 사람이 우리 그리스도인 가운데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물며 백학으로 이야기되는 정화의 단계를 거쳐 현학의 단계인 조명의 단계를 사는 사람도... ‘아는 만큼 보인다’고 현학의 삶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십자가의 성요한이 ‘어둔 밤’이라고 일컬었던 조명의 단계를 사는 사람만이 현학을 넘어 금학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금학이라? 세속적인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금학, 아니 우리 주변에 살고 있으면서도 전혀 눈에 띠지 않는 신비의 학인 금학, 결국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사람만이 금학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영적 성숙의 길에서 하느님과의 합일, 즉 일치의 삶을 사는 사람을 일컬어 금학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학마을을 다녀왔습니다.>


                                    -민신부님의 ‘일상의 신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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