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부활 팔일축제 내 화요일 복음묵상(2005-03-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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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노병규 | 작성일2005-03-29 | 조회수985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왜 울고 있느냐?" 하고 물었다. "누군가가 제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다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리아가 이렇게 대답하고 나서 뒤를 돌아다보았더니 예수께서 거기에 서 계셨다. 그러나 그 분이 예수인 줄은 미처 몰랐다.(요한 20, 13-14) 요한복음은 예수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20장과 21장에 기록하고 있는데,
이 두 장의 내용을 읽어보면, 요한복음은 원래 20장을 마지막으로 편집되
었고, 21장은 나중에 추가로 편집되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21장을 단락으로 구분하면, 갈릴래아 호수에서의 발현, 예수와 수제자 베
드로, 예수와 애제자, 에필로그(맺는 말)의 4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을 곰곰이 살펴보면, 이 대목을 추가로 편집해야 했던 의도, 또한
쉽게 밝힐 수 있는데, 즉, 예수님을 이미 배반한 적이 있는 베드로(요한
18,15-18.25-27)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단의 으뜸으로, 그리고 초대교
회의 수장으로 인정하고 내세우기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과 베드로의 특별
한 관계를 엮어주려는 의도가 깔려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첫 단락 마지막
에 "예수께서 부활하신 뒤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이것이 세 번째였
다"(21,14) 라고 명기함으로써 앞서 두 번의 발현(20장)이 있었음을 확인
하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아무튼 요한복음사가의 원복음은 20장으로 끝이
납니다.
요한복음 20장은 총 5단락으로 편집되어 있는데, 첫 단락은 빈무덤 사화
(1-10)로써 부활대축일 낮미사 복음으로 읽은바 있고, 두 번째 단락은 예
수께서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발현하신 내용으로(11-18) 오늘 복음에
해당합니다. 세 번째 단락은 예수의 제자들에 대한 첫 번째 발현(19-23)을
기록하고 있으며, 네 번째 단락은 예수님의 첫 발현 때 그 자리에 없었던
제자 토마의 불신앙과 이에 대한 예수님의 두 번째 발현을 통한 부활확인
을 다루고 있으며, 다섯 번째 단락은 에필로그에 해당합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단락은 서로 연결 지어 볼 수 있는 것으로서 다가오는 부활제2주
일 복음으로 듣게될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20장을 읽으면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점은 1,2,3 단락은 단 하루(안식일 다음 날 새
벽에서 저녁까지)에 일어난 사건을, 4단락은 정확히 여드레 후 같은 날 있
었던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첫 번째 단락의 내용을 다시금 정리해 보면, 안식일 다음 날 이른 새벽 막
달라 여자 마리아가 무덤에 갔을 때 무덤을 막았던 돌이 이미 치워져 있었
습니다. 그녀는 곧바로 달음질을 하여 수제자 베드로와 애제자 요한에게
가서 누군가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간 것으로 알리자 이 말을 들은 두
제자는 곧 무덤으로 달음질쳐 갑니다. 애제자가 더 빨랐으나 안에 들어가
지는 않고, 곧 뒤따라온 수제자가 무덤 안에 들어가 보지만 수의만 있고
예수의 시체는 없었습니다. 그제야 애제자도 들어가서 보고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을 믿게됩니다. 그들은 그 때까지도 예수께서 죽었다가 반드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성서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제자는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데, 결론은 빈무덤에 대한 믿음입니다.(20,1-
10)
오늘 복음은 요한 20장의 두 번째 단락으로서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나
타나신 예수님의 첫 번째 발현을 다루고 있습니다. 두 제자가 무덤을 떠난
후에도 막달라 마리아는 그 자리에 남아 울고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머릿
속은 주님이 없어졌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고, 게다가 울고 있었기에
객관성에 대한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따라서
그녀가 무덤 안에 나타난 두 천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자기 뒤에 서 계신 예수를 보고도 동산지기로 오인하여 없어진 주님을 내
놓으라고 하게됩니다. 결국 예수께서 그녀에게 "마리아" 하고 이름 붙여
부르자 "라뽀니" 하고 응답함으로써 그분이 주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마
태오 복음사가는 이와 비슷한 대목에서 여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붙잡
도록 허용했습니다.(마태 28,9) 그러나 요한 복음사가는 마리아를 곧 바로
부활증인으로 임명하고 부활소식을 전하는 사도로 파견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을 잃은 슬픔에다 시체 없는 빈무덤 때문에 슬픔이 가중되
어 울고만 있었고, 그녀의 생각과 시선은 빈무덤에 고착되어 있었습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것이 전부 다 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진
데, 슬픈 일이나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우리는 자주 그 일에만 시선을 집
중하여 아파하고 걱정하고 억울해 하며, 때로는 땅을 치며 웁니다. 그러니
자기 뒤에 무엇이 있는지, 주위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 깨달을 수가 없
습니다. 이럴 때 귀를 세우고 마음의 눈을 떠야 합니다. 그러면 변화가 일
어날 것입니다. 빈무덤이 부활신앙의 씨앗이 될 수는 있으나, 빈무덤 자체가 부활신앙은
아닙니다. 마리아는 이름으로 그녀를 부르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요
한 10,1-6: 목자와 양의 비유 참조) 그분이 주님이심을 깨달아 부활신앙을
얻습니다. 이 때 얻게된 신앙은 자기만을 위하여 고이 간직되는 것이 아니
라 파견과 선포의 임무로 이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
께서 마리아더러 "나를 붙잡지 말고, 가서 전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
것은 마리아가 얻은 부활신앙이 자력에 의한 신앙이 아니라 주님께서 베
풀어주신 은총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 출처: 단순한기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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