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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 제2주간 화요일 복음묵상(2005-04-05)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5-04-05 조회수987 추천수2 반대(0) 신고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다. "새로 나야 된다.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시자 니고데모는 다시"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하고 물었다.(요한 3, 7-9)
 
엇그제 부활 제2주일로서 우리는 주님부활 팔일 대축제를 일단 마감했으

 

며 그 기쁨은 성령강림대축일까지 50일간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8일 동안 4복음서가 전하는 주님부활과 발현에 관한 성서말씀들을 묵상하

 

면서 부활사건 자체가 초기교회의 제자들에게 차원 높은 신앙의 도전으로

 

부각되었으나 여러 차례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제자들의 부활

 

신앙은 고무되었습니다. 주님부활에 관한 성서의 기록들이 공생활에 비하

 

여 짧고, 일관성이 부족하고, 내용상 서로간의 모순을 보이기도 했지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요한 20,30) 목적을 가진 기

 

록들이라는 사실에는 틀림이 없으며, 이 생명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책이

 

또한 성서입니다.

 

교회는 사실 어제부터 예수님의 부활사건에 관한 복음선포를 접어두고 성

 

령강림대축일 직전인 부활 제7주간까지 사람들이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통하여 얻게되길 희망하는 '생명'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작업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주님 탄생예고 대축일'의 경축이동으

 

로 인해서 오늘부터 시도합니다. 생명의 의미를 밝히는 작업은 무엇보다

 

도 이 시기동안 봉독되는 사도행전의 독서말씀과 요한복음서의 복음말씀

 

으로 시도되는데, 특히 '생명의 책'이라 불리는 요한복음에서 선택된(3장,

 

6장, 10장, 12-16장) 말씀들이 생명의 의미를 충분히 밝혀 줄 것입니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시작으로 그 시도가 시작됩니다.(요한 3,1-

 

8)

 

문맥상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요한복음의 3장 이전 부분을 잠시 보면, 거

 

기에는 과월절을 맞아 상경하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머무시는 동안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셨고 이 기적들을 본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합

 

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믿음도 아니고,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믿음도 아닙니다. 따라서 이 믿음은 영원한 생명과

 

는 무관한 믿음입니다. 그저 예수께 대한 호감이라 표현함이 적당할 것입

 

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사가는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셨

 

다"(2,24) 라는 표현으로 이 점을 암시하고 있는데, 이 암시는 곧 영원한

 

생명에 대한 예수님의 언명이 있어야 함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께 대한 호감 이상의 마음을 가진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를 찾아

 

와 묻습니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고서야 누가 선생님처럼 그런 기적

 

들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2절) 이 대목은 어느 율법교사가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

 

까?"(루가 10,25) 라는 질문과 비슷한 유형입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영

 

원한 생명'에 대하여 질문을 던질 만큼 준비되어 있지는 않은데, 그것이

 

그가 밤에 예수를 찾아온 이유입니다. 이는 유다인들의 지도자에 속하는

 

니고데모가 다른 유다인들의 눈을 피하고자 하는 속셈일 수도 있고, 니고

 

데모 스스로가 지금까지 몸담아 왔던 유다교 신앙에 대하여 혼돈과 의심

 

을 가지고 있다는 간접적인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가 던진 질문 이상의 차원으로 응수하시는데, "누구

 

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3절) 새로

 

태어나야 함의 의미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니고데모의 반문에 아랑곳

 

하지 않고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

 

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

 

다."(5-6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의 시작입니다. 누

 

구든지 하느님의 영에 의한 삶을 영위하려 하거나, 하느님의 나라를 직관

 

하려 하거나, 하느님의 나라에 입적하려 하는 사람은 물과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물과 성령의 세례'는 우선적으

 

로 내적 변화를 통한 새사람이 됨을 의미하나, 니고데모에게 주어진 과제

 

는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으로부

 

터 육체를 지배하는 율법에 의한 묵은 삶을 벗어버리고 영을 지배하는 사

 

랑에 의한 새로운 삶에로 초대받은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가 계속됩니다. 오늘 복

 

음의 대화는 물과 영으로 '새로 남'의 의미에 대한 추가설명(7-10절)과 예

 

수님의 자기계시적 가르침(11-15절)의 두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앞선 복음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최소한, 그러나 절대적인 조건으

 

로 '새로 태어나야 함'이 제시되었으나 니고데모의 생각은 더 이상 진행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한 번 태어난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올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따라서 예수께서는

 

'물과 영'으로 새로 태어나야 함을 제안하신 것이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습

 

니다. 
 

'물'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물은 생명과 정화를 상징

 

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생명과 깨끗함을 가져다줍니다. 문제는 '영'에 대

 

한 것인데, 영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히브리어의 '루아

 

흐'(Ruah)나 희랍어의 '프네우마'(Pneuma)는 구약성서에서 '바람, 호흡,

 

영혼, 정신' 등을 가리키는 의미로 다양하게 쓰이지만 예수께서는 '영'을

 

니고데모뿐 아니라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바람'에 비유하여 설명하십

 

니다.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8절)는 말은 '영'의 자유로운 속

 

성을 가리키는데, 바람이 부는 소리는 우리가 들을 수 있으나, 어디서 불

 

어와 어디로 가는 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오늘날 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기상대가 관측하여 바람의 방향을 예보할

 

수는 있으나, 예보는 어디까지나 예상이며, 가정입니다. 따라서 바람의 방

 

향은 언제나 불확실합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바람의 성질을 통하여 영

 

의 역동성과 창의성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곧바로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

 

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8절)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여기서 '성령'이라고 말하지만, 희랍어 원문에는 그냥 '영'으로 기록되어

 

있음에 주의해야 하는데, 아직까지 하느님 성삼의 구조를 언급할 단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대목의 '성령'은 그저 '거룩한 영'으로 알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언급을 한다고 해도 하느님에 대한 유일신 사상을 전

 

부로 알고 있는 니고데모가 이를 이해할 턱이 없으며, 따라서 니고데모의

 

반문은 하느님 '성령'이 아니라 막연한 '영'에 의해 "어떻게 그런 일이 있

 

을 수가 있겠습니까?"(9절) 라는 식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의 "너는 이스라엘의 이름난 선생이면서 이런 것들을 모르느

 

냐?"(10절)라는 꾸중은 니고데모가 '영'에 대한 사고의 지평을 넓혀야 함

 

을 고무하는 말씀인 셈입니다.

 

이제 '정말 잘 들어 두어라'(11절)라는 요한복음의 특유한 표현으로 두 번

 

째 단락이 시작되는데, 즉 예수님의 자기계시적 가르침이 주어진다는 뜻

 

입니다. 이 가르침은 단지 니고데모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니고데

 

모가 앞선 복음에서 "선생님, 우리는..."(3,2) 하고 시작했던 물음의 서두를

 

기억하여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포함한 '우리는'이라는 표현과 니고데모와

 

같은 부류에 속하는 유다인들을 지칭하는 '너희는'이라는 표현으로 가르

 

침을 내리십니다. 이 가르침은 '너희'를 포함한 세상에 대한 예수님의 자

 

기계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자기계시는 그분이 말씀하시는 '하늘의

 

일'인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자기계시적 가르침은 사실상 보류되고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예고하는 암시로 마무리됩니다. 그것은 니고데모를

 

포함한 세상 사람들이 '세상의 일'(바람에 비유된, 또는 바람과 같은 영의

 

의미와 능력) 조차도 깨닫거나 믿지 못하기 때문에 '하늘의 일'을 깨우치

 

거나 믿는다는 것은 더욱 어렵기 때문입니다. 성서학자들은 십자가 죽음

 

에 관한 예고의 대목(13-15절)을 예수님의 직접적인 발설이라기보다는 요

 

한복음저자의 독자적인 편집으로 간주합니다. 그것은 공관복음에서 세 번

 

씩이나 발견되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예고가 요한복음에는 없기 때문

 

이며, 물과 영으로 다시 태어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십자가

 

에 달리신 예수께 대한 믿음에 연결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물과 영으로 새로 태어남'은 분명 세례성사를 의미합니다. 또한 세례성사

 

에서 물의 역할은 아주 중요합니다. 모든 성사에서 합법적인 성사거행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것은 형상과 질료인데, 세례성사에서 물은 질료에 속

 

합니다. 물은 생명과 정화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생명과 깨끗함을

 

가져다준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물이 성사를 베푸는 것은 아닙니다. 물은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것이죠. 따라서 세례성사가 목적으로 하는 '새로 태

 

어남'을 가능하게 하는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힘, 새 생명을 가져다주는 힘

 

은 바로 하느님의 영입니다. 이는 세상을 창조한 하느님의 기운(창세 1,2)

 

이며, 진흙 인간이 숨을 쉬도록 생명을 가져다 준 하느님의 입김(창세 2,7)

 

입니다. 하느님 성령은 "모든 사람에게 숨길을 불어넣어 주시고"(민수

 

16,22), "땅위에 움직이는 모든 것들에게 숨결을 주시며"(이사 42,5), "마르

 

고 비틀어진 뼈들 속에 숨을 불어넣어 다시 살려주시는"(에제 37,6) 힘입

 

니다. 이러한 하느님 성령의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이 세례성사 안에

 

서 드러나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 맞물려 작용하기 시작한다는

 

것이 바로 오늘 복음의 핵심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세례 받은 사람은 이미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하느님의 영에 따라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출처 : 단순한 기쁨 (dayen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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