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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를 따라라! (성소주일)
작성자이현철 쪽지 캡슐 작성일2005-04-15 조회수864 추천수3 반대(0) 신고

십자가를 안테나로!

이번 주일인 부활 제 4주일은 성소주일입니다. 얼마 전에 선종한 착한 목자이셨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추모하는 시기에 맞는 성소주일이어서 그런지 더욱 착한 목자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뼈저리게 절감하고 있습니다. 이번 18일부터 시작되는 새교황 선거에 성령강림의 은총이 있기를 기도하면서 로마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는 황 인수수사님이 올린 지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장례미사 강론을 퍼드립니다. 가브리엘통신

 

 

   <4월 8일 바티칸 성베드로 광장에서 있은 요한 바오로 2세 장례미사의 강론입니다. 교황의 장례는 추기경단의 공동 집전으로 치러졌는데 강론은 추기경단의 데까누스인 신앙교리성 장관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이 맡았습니다. 이 강론은 요한 바오로 2세의 일생을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나를 따라라!”(요한 21, 19)

   부활하신 주님은 자신의 양을 치도록 선택한 제자, 베드로에게 이렇게 마지막 말씀을 주십니다. 나를 따라라이 간결한 그리스도의 말씀이 세상을 떠난 우리의 사랑하는 교황, 오늘 우리가 슬픔 가득한 마음으로 그러나 깊은 감사와 기쁨에 찬 희망을 갖고 불멸의 씨앗으로서 땅에 그 시신을 묻는 요한 바오로 2, 그의 삶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될 수 있습니다.

 

.....<중략>.....(신자들, 내빈에 대한 간략한 인사말임)

 

 "나를 따라라!.."

  젊은 학생 시절부터 카롤 보이티와는 문학과 연극, 시를 사랑했습니다. 나찌스의 공포에 둘러싸여 위협을 받는 한 화학 공장에서 일하면서 그는 주님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나를 따라라! 이러한 매우 특별한 상황에서 철학과 신학 서적을 읽기 시작했고 이어 사피에하 추기경이 세운 지하 비밀 신학교에 들어갔으며 전쟁이 끝난 뒤 크라코프의 자겔로니카 대학 신학부에서 학업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자전적인 책들과 사제들에게 보내는 서한들을 통해 그는 참으로 자주 1946111일 서품된 자신의 사제직에 대해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이 글들에서 자신의 사제직을 특별히 세 가지 주님의 말씀을 통해 설명합니다.

  가장 먼저 이 말씀 여러분이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여러분을 선택했습니다, 여러분이 떠나가서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남아 있도록.(요한 15,16).

  두 번째 말씀은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요한 10,11).

  그리고 마지막 말씀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한 것처럼 나도 여러분을 사랑했습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무십시오.(요한 15,9)

  이 세 말씀 안에서 우리는 우리 교황의 영혼 전체를 볼 수 있습니다. 남아 있는 열매, 그 열매를 맺기 위해 사실 그는 지칠 줄 모르고 어디든지 갔습니다.

 

  일어나 갑시다!는 그가 마지막에서 두 번째로 쓴 책 제목입니다. 일어나 갑시다!.... 이 말로써 지친 신앙으로부터, 과거와 현재 제자들의 잠으로부터 우리를 일깨웠습니다. 그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합니다. 일어나 갑시다!그 다음으로, 교황은 참으로 마지막까지 사제였습니다. 그의 양들과 전 인류를 위해 매일매일, 특별히 최후의 몇 달 간의 어려운 시련 동안 교회에 대한 봉사에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하느님께 자신의 생명을 바쳤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는 자신의 양들을 사랑하는 선한 목자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끝으로 내 사랑 안에 머무십시오.모든 이와 만나려 애썼던 교황, 용서할 줄 알고 모든 이를 위해 마음을 열 줄 알았던 교황은 오늘도 주님의 이 말씀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머물며 그리스도 사랑의 학교에서 우리는 참사랑의 방법을 배우노라고.

 

   나를 따라라!

   19587월에 젊은 사제 카롤 보이티와에게 주님과 함께 가는 여정, 주님의 뒤를 따르는 새로운 여정이 시작됩니다. 카롤은 평소처럼 카누를 좋아하던 젊은이들과 휴가를 함께 보내기 위해 마수리 호수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 통의 편지를 가지고 갔었는데 그 편지는 폴란드의 수석 주교인 비진스키 추기경에게 오라는 내용이었기에 그 만남의 목적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즉 크라코프의 보좌주교로 그를 임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일을 그만두는 것, 젊은이들과의 이 열정적인 통교를 그만두는 것, 인간 창조의 신비를 이해하고 풀어내는, 그리하여 오늘의 세계에 우리 존재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해석을 내어 놓는 이 굉장한 지성의 시합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것..... 이 모든 것은 그에게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이 젊은 사제의 인간적 정체성 자체를 잃어버리는 일로 비쳤습니다. 나를 따라라......카롤 보이티와는 교회의 부름 안에서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느끼며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다음의 주님 말씀이 얼마나 옳은지를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하려는 자는 잃을 것이고 그것을 잃어버리는 자는 구할 것입니다.(루가 17,33).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교황은 결코 자신의 생명을 구하려 하지 않았고 자신을 위해 지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최후의 한 순간까지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하여 우리를 위해 남김 없이 자신을 주기를 원했습니다. 바로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주님의 손에 맡겼던 모든 것이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말씀에 대한 사랑, 시와 문학에 대한 사랑은 그의 사목적 사명에 있어 본질적 부분이었으며 그것이 반대의 표지일 때도 복음의 선포에 새로운 매력을 주고 새로운 현실성, 신선함을 제공했던 것입니다.

 

  나를 따라라!

  197810월 추기경 보이티와는 다시 주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오늘 미사의 복음에 나오는 베드로와의 대화가 되풀이됩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 나를 사랑합니까? 내 양떼들을 돌보시오!카롤 나를 사랑합니까?라는 주님의 물음 앞에서 크라코프의 대주교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대답합니다. 주님 당신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을 당신은 아십니다.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사랑하는 우리 교황 안에 있던 가장 큰 힘이었습니다. 그가 기도하는 것을 본 사람, 그가 강론하는 것을 들은 사람은 압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린 덕분에 그는 순수하게 인간적인 힘을 넘어서는 부담, 즉 그리스도의 양떼 들을 돌보는 목자라는 무게, 그리스도의 보편 교회의 목자라는 무게를 운반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이토록 풍요로운 이 교황의 개개 내용에 대해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저는 그의 선포의 중심 요소들이 드러나는 오늘 전례 말씀 중 두 부분을 읽고자 합니다.1독서에서 성 베드로는(성 베드로와 함께 교황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진실로 나는 깨달았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차별하시지 않고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행하는 사람은 환대하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평화의 복음을 전하면서 이스라엘 후손들에게 말씀을 보내셨는데 바로 이분이 만민의 주님이십니다.(사도 10,34~36). 그리고 제 2독서에서 성 바올로는(성바올로와 함께, 세상을 떠난 우리 교황은) 목소리를 높여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나의 사랑스럽고 그리운 형제들, 내 기쁨이며 면류관인 여러분,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시오. 사랑하는 여러분!(필립 4,1)

 

 나를 따라라!

 자신의 양을 치도록 보내면서 그리스도는 베드로에게 그가 순교할 것임도 함께 알립니다. 보편 목자로의 파견과 사랑에 대한 대화의 요약적이고 결론적인 이 말씀으로써 주님은 최후의 만찬의 맥락 안에 놓여있는 다른 대화를 이끌어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가는 곳에 여러분은 올 수 없습니다.베드로가 물었습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내가 가는 곳에 당장은 당신이 나를 따를 수 없습니다. 하지만 훨씬 뒤에 나를 따를 것입니다.(요한 13,33.36). 예수께서는 (최후의)만찬에서부터 십자가로, 부활을 향해 가십니다....부활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아직 그분을 따를 수 없습니다. 이제... 부활 이후에... 훨씬 뒤인 이 순간이 옵니다. 그리스도의 양떼를 돌보면서 베드로는 부활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고 십자가와 부활을 향하여 갑니다. 주님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 당신이 젊었을 때는 .... 원하는 곳으로 갔었지만 당신이 늙을 때는 두 손을 내밀 것이요 다른 이가 허리띠를 매어주고는 그대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입니다.(요한 21,18) 교황직의 첫 시기에 아직 젊고 정력이 넘치던 교황은 그리스도의 인도 아래 세상의 경계 끝까지 갔었습니다. 그러나 뒤에는 점점 더 그리스도의 고통의 통교 안으로 들어갔고 점점 더 다른 이가 당신을 맬 것이라는 말씀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로 고통 받는 주님과의 이 통교 안에서 그는 지치지 않고 더 새로워진 지향을 가지고 복음을, 끝까지 가는 그 사랑의 신비를 선포하였습니다(요한 13,1 참조).

 

  우리를 위해 그는 부활의 신비를 하느님 자비의 신비로 풀이해주었습니다. 마지막 책에서 그는 악에게 주어진 한계는 결정적으로 하느님의 자비라고 씁니다(기억과 아이덴티티, 70). 그리스도에게 가해진 위해를 묵상하면서 그는 우리 모두를 위해 고통 당하심으로써 그리스도는 고통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셨다. 즉 고통을 하나의 새로운 차원, 새로운 질서 안으로 이끄셨으니 바로 사랑의 차원이다. 사랑의 불꽃으로 악을 살라버리고 없애버리는 것, 죄로부터 선을 여러 모습으로 꽃피우는 것은 바로 고통이다.(앞의 책, 199) 라고 씁니다. 이와 같은 전망으로 영감을 받아 교황은 그리스도와의 통교 안에서 고통 받고 사랑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고통과 침묵의 메시지는 이처럼 웅변적이고 이처럼 풍요로웠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

  교황은 하느님의 어머니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 보다 순수한 묵상을 길어냈습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었던 교황은 참으로 천상 어머니를 사랑했습니다. 그는 십자가상 주님의 말씀을 바로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알아들었습니다. 보십시오. 당신의 어머니입니다!그리고 사랑 받은 제자가 했던 것처럼 그분을 존재의 친밀함 안에 맞아들였습니다(eis ta idia, 요한 19,27)..... Totus tuus. 어머니로부터 그는 그리스도에 일치하는 것을 배웠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삶의 마지막 이 부활 주일 날 교황이 고통이 역력한 얼굴로 다시 한 번 사도직궁의 창에 다가와 마지막으로 축복을 주시던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교황이 지금 아버지 집의 창가에 계시면서 우리를 보시고 축복하고 계시다는 것을. 그렇습니다. 교황님, 우리를 축복해주십시오. 우리는 사랑하는 당신의 영혼을, 매일 매일 당신을 이끄셨고 이제 그의 아들이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영광 안으로 이끄실 당신의 어머니, 하느님의 어머니에게 맡겨드립니다. 아멘.>

                                             (로마에서 황 인수 수사님이 올린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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