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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CQ! 사람아! (성소주일)
작성자이현철 쪽지 캡슐 작성일2005-04-16 조회수905 추천수3 반대(0) 신고
 

                      CQ! 사람아!(사람아, 응답하라! 오버)


  십자가를 안테나로!

  토요일 학생미사 전에 고백소에서 학생들의 떠드는 소리 속에 고백자들의 고백을 듣노라니, 마치 20여년 전에 강력한 혼신음(QRM)속에 미약한 출력의 라디오 베리따스(Radio Veritas) 방송을 청취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대학시절, CQ! 하느님!(하느님, 응답하세요! 오버!)하며 각종 교회활동과 아마추어무선(HAM)을 하다 마르코니회(가톨릭 아마추어무선사회)를 창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던 중 우연히 단파청취(SWL)를 하다 필리핀에서 방송되던 가톨릭 방송인 라디오 베리따스 방송을 청취하고 그것을 모니터하면서 ‘방송 수신증’(QSL)과 카세트복사한 것을 가톨릭 매스컴위원회를 통해 필리핀에 보내드리곤 하였습니다. 필리핀에서 고생하고 계시던 수녀님들께 안타까운 마음과 격려의 마음에서 동요 ‘개구리 노래’에 이런 가사를 붙여 보내기도 했었지요.^^*


베리 베리 베리따스 방송을 한다

신부, 수녀, 평신도, 다~모여

밤새도록 하여도 듣는 이 없어

듣는 사람 없어도 날이 밝도록

배리 베리 베리따스 방송을 한다

베리 베리 베리따스 출력 약하다!



  아무튼 저는 ‘라디오 베리따스’ 라는 주님의 낚시(?)에 단단히 걸려들어 주님의 일꾼(신학교 입학)이 된지도 벌써 20여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저나름대로 아마추어무선, 저술등의 다양한 사도직을 통해 여러 가지 벽들(종교, 문화, 정치 등...)을 뛰어 넘어 보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번번이 역부족이라는 것과 저의 한계를 느끼곤 합니다. 그런데 저와 비슷한 시기에 주님의 일꾼이 되었던 고 민성기 요셉 신부는 이러한 벽들을 지혜롭게 허물고 또 깨뜨리기도 하였던 것 같습니다. 수년 전에 그분이 석탄절이자 성소주일이었던 어느 주일에 하셨던 강론 ‘내일을 사는 사람들’을 퍼드립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부르심(CQ! 사람아!)을 통해 ‘내일을 사는 사람들’, ‘사람’을 다시 창조하고 계시지 않을까요? 가브리엘통신

 

                                            <내일을 사는 사람들>


가수 김수철 선생이 작사 작곡하고 부른 <내일>을 노래하면서

우리의 묵상을 시작하겠습니다.


스쳐 가는 은빛 사연들이 밤하늘에 가득 차고

풀 나무에 맺힌 이슬처럼 외로움이 찾아드네


별 따라간 사랑 불러보다 옛 추억을 헤아리면

눈동자에 어린 얼굴들은 잊혀져간 나의 모습


흘러 흘러^ 세월 가면 무엇이 될^^까

멀고도 먼 방랑길을 나 홀로 가야하나

한 송이 꽃이 될까^^ 내일 또 내^일

 

  부처님 오신 날을 함께 기뻐합니다. 또한 오늘은 성소 주일입니다. 우리 부산 대연동 공동체는 해마다 두, 세 가정에서 사제성소와 수도성소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는 축복 받은 공동체입니다. 올해는 어느 가정이 하느님의 축복 받는 가정으로 부르심을 받을지 궁금합니다. 우리 가정에서 특별히 우리 가족 가운데 하느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을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면서 '내일을 사는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성소를 받는 사람들이 살아야 할 삶의 양식에 대하여 묵상합니다.


   성소를 받는 사람들, 그들은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양들입니다(요한 10, 27~30). 그들은 '큰 환난을 겪어낼 사람들'(묵시 7, 14)이며 '이방인의 빛이며 구원의 등불이 될'(사도 13, 47) 사람들입니다. 저는 이렇게 부르심을 받을 사람들, 성소를 받을 사람들 특히 내일을 향하여 도전하는 사람들을 '육화' (kenosis, incarnation)의 개념으로 풀어봅니다. 「제논의 역설」이 출판되어 나왔을 때 저는 다시 빨마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양산 무아의 집을 찾았습니다. 굴속에 소개된 표구로 만들어진 서예작품 '만(滿)과 공(空)'을 다시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무아의 집 성전에 모셔져 있던 만(滿)과 공(空)은 원래의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불교 냄새가 난다 하여 떼었노라고 그곳 수녀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다시금 성전으로 들어보니 제대 벽면으로 모셔져 계신 십자가상의 예수님이 왠지 외로워 보였습니다. '만과 공'에서 저는 어느 곳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었던 육화의 의미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로 사도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 8장 9절의 말씀이 이 육화의 의미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요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써 여러분은 오히려 부요하게 되었습니다." 육화하신 그리스도, 부요하신 분이 자기 스스로 가난해지신 신비스러운 사건, 육화 안에서 저는 성소를 받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양식, 그리고 앞으로 성소를 받을 사람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양식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몸소 보여주셨고, 저는 이 육화의 신비를 부처님에게서, 그리고 프란치스꼬 성인에게서 다시금 읽을 수 있었습니다.


   육화하신 예수님, 가난하신 예수님은 광야로 들어가시고 예수님 스스로 죽음을 택하십니다. 부처님과 프란치스꼬 성인은 죽음을 체험함으로써 깨달음을 얻고 스스로 광야로 나아갑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비롯한 모든 피조물의 구원을 바라십니다. 부처님과 프란치스꼬 성인은 중생의 구원을, 모든 영혼들의 구원을 위하십니다.


   부처님, 즉 붓다(the Buddha Gautama)는 인도의 왕자였습니다. 바라문,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로 일컬어지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의 그 넘나들 수 없는 계층의 벽을 허무십니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차별화 된 제도 하에서 부처님은 누릴 수 있는 모든 특권, 모든 부요함을 버리고 가난한 탁발승이 되었습니다. 부유한 왕의 아들이 제 스스로 가난한 탁발승이 된 것입니다. 영주(귀족)와 농노로 차별화된 봉건주의 시대인 12세기에서 13세기로 넘어가는 길목에 부유한 의류상인의 아들인 프란치스꼬, 그도 부의 추구를 포기하고 제 스스로 가난을 받아들였습니다. 모든 특권, 모든 부요를 버리고 자발적으로 가난한 탁발승이 된 것입니다.


   사제가 된다는 것, 수도자가 된다는 것, 즉 성소를 받는다는 것이 어떤 특권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부유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가 되어 사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하게 되어 가난하게 사는 것입니다. 부요한 자가 가난한자 되신 예수님처럼, 부처님처럼, 프란치스꼬 성인처럼 스스로 가난해지는 것입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애착의 삶이 아닌 이탈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제논의 역설을 사는 것입니다. 제논의 역설을 사는 것이 바로 가난을 사는 것입니다. 성소를 사는 것입니다. 사제가 되는 것이요 수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제를 존경하고 수도자를 존경하는 것입니다.


   재속 프란치스꼬 구미 형제회의 야외미사를 봉헌하는 길이었습니다. 한국 외방 선교 수녀회 수녀님들과 함께 대구 한티 성지로 가는 도중에 경산 휴게실에 들렀습니다. 덩치가 큰스님이 슬그머니 우리 자리에 함께 하였습니다. 스님은 울산 용계 칠은사 주지로 계시는 지은 스님이었습니다. 수녀님들이 스님에게 큰 빵과 우유를 보시로 드리자 스님은 '내 평생에 이렇게 큰 빵을 보시받기는 처음입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여러 법문을 말해 주셨는데 그 중의 하나가 용처였습니다. 스님은 수도자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용처에 견주어 말씀하셨습니다. "불자들은 부처님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지 않습니다. 모든 중생에 깃들어 있는 불성을 찾다보면 결국 부처님이 다른 곳에,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 게 됩니다." 그러면서 스님은 우리 교회의 수도자들에 관하여 나름대로의 의견을 표현하셨습니다. "수도복을 입고 있다는 것이 거룩함의 상징은 아닙니다. 어쩌면 수도복은 바로 우리의 허물을 감추는 속임수입니다"라고 거침없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끔씩 승복을 벗을 때가 있는데 그때만큼 자유로울 수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교회의 수도자들에게 권고하셨습니다. "나의 그리스도를 만들지 마십시오. 내가 생각하는 그리스도를 만들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를 내 안에 구속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는 자유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자유롭게 놓아두십시오. 그리스도를 자유로우신 그리스도로 바라볼 수 있는 수도자가 참된 수도자입니다. 그리스도를 자유로우신 그리스도로 바라볼 수 있는 신도가 바로 참된 신도입니다."


   우리는 부르심을 받는 사람들, 성소를 받는 사람들이 살아야 할 삶의 양식으로서 <내일을 사는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가난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가난이 외적으로 드러난 표지를 동반의식(同伴意識: companionship)과 측은지심(惻隱之心, 동정, 연민: compassion)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동반의식의 영어말 표기, companionship은 라틴말의 '함께' 또는 '더불어'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com'과 빵을 이야기하는 'panis'의 합성어입니다.  이 말뜻을 풀이하면 '빵을 함께 먹는다(co-eating of bread)'는 뜻이 됩니다. 함께 빵을 먹는다는 것은 인생의 단맛 쓴맛을 다 함께 겪는 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측은지심의 영어말 표기 compassion은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연민을 느끼고 그 '아픔을 함께 한다(co-suffering)'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내어 주시는 몸과 피를 마시는 것이 바로 동반의식이요 측은지심입니다.


   부처님과 프란치스꼬 성인, 두 분 다 다른 사람들 특히 불행한 사람들에 대한 커다란 연민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러한 연민이 심지어 미미한 피조물들에게까지 나타났습니다. 살생유택(殺生有擇)을 이야기하는 부처님과 '태양의 노래'를 통하여 모든 피조물을 하느님 찬미에로 초대하는 프란치스꼬 성인에게서 이를 읽을 수 있습니다.


   구급상자를 들고 다니면서 고통으로 몹시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부처님을 따르는 제자들. 아픈 환자들을 돌보아 주고, 고름에 절은 나환자들의 곪아터진 상처를 깨끗이 씻어주며 옷을 갈아 입혀주는 프란치스꼬와 그 형제들. 이들에게서 우리는 행복의 참된 의미를 읽을 수 있습니다. 제 스스로 연민의 길, 동정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 지상의 부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부를 포기함으로써 가난의 위대함을 몸소 보여주는 사람들의 예를 우리는 부처님과 프란치스꼬 성인, 그리고 그 제자들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제자들과 프란치스꼬 성인의 제자들은 탁발승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난을 택하였고 가난을 살았습니다. 부처님과 프란치스꼬 성인이 사셨던 삶을 구태여 비교해 보면, 붓다와 프란치스꼬는 아주 유사합니다. 두 분 다 단지 형식에 치우치는 종교와 카스트의 정신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쾌락과 육정의 생활을 거절하였으며, 모든 세상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한 수단으로서 절대적 가난을, 육신에 대한 금욕을, 그리고 영적 통찰력을 지녔습니다. 두 분 다 집이 없이 떠돌아다니는 방랑하는 공동체를 창설하셨으며 그들을 따르는 형제들이 세상 도처에 온 세상에서 가난을 살고 가난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상은 부처님의 삶을, 프란치스꼬 성인의 모범을 따르지 않고 세상이 좋아하는 바대로 프란치스꼬의 아버지의 길을 따랐습니다. 이에 필요한 것이 바로 성소입니다. 세상의 논리대로 따라가는 삶이 아닌 제논의 역설을 살아가는 사람, 가난을 사는 사람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부처님과 프란치스꼬 성인이 사셨던 가난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특히 가난의 특징인 동반의식과 측은지심, 예의(courtesy), 온화(gentleness), 삶의 단순성(simplicity), 그리고 부와 물질적 이득보다는 영적인 풍요로움을 추구하고자 내일을 향해 가난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그렇게 부르심을 받는 사람들, 성소를 얻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특히 우리 가정에, 우리 가족들 가운데서 많은 성소가 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이 바로 가난에 도전하는 사람, 내일을 사는 사람입니다. 시인 용혜원 선생님의 시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에 나오는 사람이 우리가 만나야 할 사람입니다. 함께 묵상합니다.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사람이 만나고 싶습니다

누구든지 아니라

마음이 통하고

눈길이 통하고

언어가 통하는 사람과

잠시만이라도 같이 있고 싶습니다


살아감이 괴로울 때는

만나는 사람이 있으면 힘이 생깁니다

살아감이 지루할 때면

보고픈 사람이 있으면 용기가 생깁니다


그리도 사람이 많은데

모두 다 바라보면

멋쩍은 모습으로 떠나가고

때론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외면합니다


‘사람’이 만나고 싶습니다

‘친구’라고 불러도 좋고

‘사랑하는 이’라고 불러도 좋을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민신부님의 ‘일상의 신화를 찾아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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