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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23) 나쁜 소식 먼저, 그리고 좋은 소식!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5-04-22 조회수1,019 추천수7 반대(0) 신고

2005년4월22일 부활 제4주간 금요일ㅡ사도행전13,26-33;요한14,106ㅡ

 

     나쁜 소식 먼저, 그리고 좋은 소식!

                                            이순의

 

 

섬 집에를 다녀올때 마다 짝궁은 섬마을의 소식들을 물어 나른다. 특별하게 마음이 쓰이는 소식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도 나지 않는 소식도 있는데, 몇몇 경우에는 꾸준히 소식을 모아오는 경우도 있다. 그 중에서 나쁜 소식을 먼저 전하고 다음으로 좋은 소식을 전해볼 것이다.

 

섬마을에서는 공소생활이라는 종교활동이 있지만 특별나게 누군가 신앙에 대하여 깊이 알려주는 이도 없고, 그렇다고 명목있는 활동을 장려 받을 일도 없다. 오로지 성령의 뜻에 의해 그 명맥이 차단되지 않는 것을 보면 하늘의 기운이 대단하다는 감동을 낳는다. 내가 다니던 공소에는 이웃에 살던 저수지 뚝방의 아짐이 계신다. 일찌기 아주 일찌기 라고 들었지만 언제인지는 잘 모르겠고, 아짐은 일찌기 혼자 되셨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나 장부께서 정착해 살지 않은 탓에 어쩌다가 몇 년에 한 번 집에 오셔서 아이만 만들어 놓고 가셨다고 하던가?

 

그러니까 요즘 말로 한다면 그러고도 시집이라고 살아야했던 어른들의 삶이 안타깝기도 하지만 이해되지도 않았다. 아짐이 알고있는 신앙의 지식은 몇 가지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열심한 열정의 소유자는 더욱 아니다. 하지면 변함이 없었다. 꾸준히 그저 빼지 않고, 마음에 동요없이 주일을 지키는 교우시다. 그래서 그분의 신앙생활이 나에게는 존경스러운...... 농촌이라는 한계적 공간 안에서 신심들은 수시로 편리를 따른다. 경우에 따라 소견에 따라 이유를 마음에 품고 들기도 하고 나기도 한다. 그런데 아짐은 그러지 않으셨다. 그런 변덕을 마음에 품으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주변의 동무들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짐은 그런 동요에 결코 동의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얼마 전에 아짐의 말문이 막혀버렸다고 한다. 갑자기 말만 못하게 되셨다고 한다. 아짐은 말을 안하려는 것이 아닌데 말이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말을 못 하시면서도 마음은 변덕으로 동요하지 않고 성당에는 꾸준히 다니고 계신다고 한다. 그 가슴 아린 소식을 듣고 그래도 덤덤히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얼마 전에 하나 뿐인 며느리가 집을 떠났다는 소식이다. 아짐의 아들은 재혼을 했다. 섬마을의 노총각들이 중국에 가서 조선족 아가씨들을 골라 장가를 들 적에 한 물결을 탔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모두모두 아이를 잘도 낳아 기르는데 아짐만 손주 구경을 하시지 못 했다. 전해 듣기로는 처음 며느리가 나가게 된 이유도 아이를 생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재혼 마저 아이가 없게 되고, 도시의 큰 병원에 다니며 노력을 하는 것 같았지만 후사는 보지 못 했다. 혼인의 세월이 보태지는 걸 지켜 보면서 관심들은 조심스러워지고, 걱정들은 현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남의 깊은 심중이야 누구도 알 길이 없다지만 아짐은 말문을 닫아 버렸고, 급기야 또 혼자 남는 아들을 지켜보아야 했으니...! 그 절명한 고통의 어머니를 누가 감히 위로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의 소곤거림은 아이를 생산하지 못하는 쪽은 아짐네 아들이었을 것이라는! 그러니까 조강지처랑 그대로 살았어야 한다고도 하고....? 아짐을 보아서라도 하늘께서 너무 무심했다고도 하고....? 그토록 정이 많으셨던 아짐의 비극을 전해 들으며 저승의 복락을 청해 드려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가슴에 아팠다. 

 

사람이 자기도 알지 못하는 인생을 평생 감당하며 살아낸다는 것 자체가 외줄 위의 곡예이며 스스로에게 속아서 살아가는 마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산다는 것이 두려워지는.....!

 

좋은 소식도 역시 공소의 소식이다.

드디어 섬 두 개를 합하여 신부님 한 분께서 부임을 하셔서 고생을 하고 계시다고 한다. 공소가 여러 개가 되다보니 돌아가면서 미사를 하시는데 오히려 서울의 큰 본당보다 미사 수가 많다고 한다. 어찌보면 미사 수는 많은데 나올 것은 없는 미사가 섬마을의 미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만큼 본당 운영이 어려운 현실적 대안을 안고 신부님께서 부임 하셨을 것이다. 먼저 그곳에 친히 용기를 내셔서 부임하신 신부님께 찬사와 박수를 보낸다. 짝()!  짝()!  짝()!  짝()!  짝()!  짝()!  짝()!  짝()!  짝()!  짝()! 

 

짝궁은 그래도 큰 물에서 놀아 본 탓인지?! 강론에 대하여 문제 제기를 하면서 말을 꺼내 놓았다. "거 신부님이 보기에는 안 그렇게 생겼는디 그것이 강론이라고 허시는지? 말이라고 허시는지? 쪼꼼 이해가 안가드구먼?! 자네가 그 신부님을 아는가?"

후후후후후! 서당 개가 10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짝궁이 세례한지도 19년이 되었다. 히히히히히히! 사실 섬에서의 신앙생활은 영성이라고 내어 놓을 것이 신학은 아니다. 전에 공소에 오셨던 학사님께 드린 부탁 중에 필수조건이 몇 가지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첫째가 신학교에서 배운 신앙은 모조리 잊어버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흙 속에서 존재하는 생태적인 신앙을 발견하고 뿌리를 찾으라는.

 

아마도 공소에 첫 주임 사제로 오신 신부님께서는 내가 가르쳐 드리지 않았어도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오신 것 같다. 차라리 가능했다면 제대에 막걸리 사발이라도 올려 놓고, "거 할매도 한 잔 허시고, 거 할아배는 주정이 심하신께 냄새만 맡으시고....!" 하는 미사가 훨씬 합당 했을지도 모른다. 그 신부님을 만나 본 적은 없지만 이름 석자는 익히 많이 들어서 잘 알고 있다. 원래 신부님들은 지역구이지만 수녀님들은 전국구라는 말이 있다. 신부님들은 교구별로 움직이시니까 지역구이고, 수녀님들이나 수도회 신부님 수사님들은 전국으로 이동하시기 때문에 전국구라고 한다. 서울에 사는 내가 지역구의 신부님을 알 턱이 없으나 내 고향이 그쪽이기 때문에, 또 섬마을의 공소를 사랑하기 때문에 관심을 기울인 때문이다.

 

무조건 신부님께 감사를 드린다. 그 용기에 찬미가를 불러드릴 것이다. 지금 현재 이 나라의 모습이 얼마나 기형적으로 발전해 가는지에 대하여 인식하지 않는 분야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기형의 모순에 대하여 개선을 실천하는 곳은 거의 없다. 실천한다고 해도 행정적 이론과 실제적 살이에 대하여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농촌은 더 이상 주거지가 아니다. 도시에서 살면서 출퇴근 하는 곳이 되어버렸다. 선생님도, 면직원도, 심지어 농사를 짓는 농부도, 작업을 하는 작업꾼들도, 도시에 생활권을 두고 출퇴근하는 이상의 의미 부여가 되지 않고 있다. 철저하게 소외된 계층의 집단들로 전락하는 곳이 농촌일 것이다. 일터일 뿐, 생활권이 될 수 없는 소외!

그곳에 교회가 사제의 발을 딛어 놓았다.

 

국가는 이번에도 농부들을 소외시키고 말았다. 어쩔 수 없는 무역마찰의 희생양으로 생명의 기초공급원인 농업을 볼모로 삼고 있다. 선진 서양국가들은 그런경우에 공산품에서 얻는 소득의 몇 퍼센트를 농부들에게 적극 환원 장려한다고 들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기업의 이익을 위해 국가가 농업을 희생시키면서도 그런 순환이라는 환원 정책을 펴고 있지 못하다. 그 결과는 생명유지의 기초단계인 농업이 피폐해져가고 급격하게 상실 될 것이다. 이는 지구에 쓰나미와 같은 불시의 식량 위기가 발생했을 때 이 나라 국민은 굶어야 한다는 경고를 누누히 설명하고 있지만 아직도 우리나라의 농업정책은 기업 이익의 우선에서 희생되고 있다. 아마 불시에 다가올 지구의 위기에서도 굶어 죽어야 하는 쪽은 그들이 아니라 대다수의 평범한 백성의 차지가 될 것이기 때문인가?

 

국가의 현실이 곧 종교의 현실이다.

국가가 소외시키는 곳에는 종교도 머물지 않는다는 지론은 결코 헛 말이 아니다. 종교는 국가와 인간의 기본 생활권을 기반으로 발전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국가가 어떤 정책에 눈을 돌리면 종교는 그에 따른 더 빠른 대안으로 그 정책들이 종교안에서 실현되고 성공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국가가 외면하는 분야에 대하여는 성공할 수 있는 비중이 낮을 뿐만 아니라, 비용에서 엄청난 손실을 가져오기도 하고, 그것을 성공으로 이끌어 가는 경우는 거의 희박하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의 종교적 현실은 국가를 등에 업고 발전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가 그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는 나의 고집스런 주장은 그곳에 신앙이 있기 때문이다. 신학교의 철학은 없어도 사람의 이치가 있고, 신학교의 윤리는 없어도 사람의 도리가 있고, 신학교의 영성은 없어도 사람의 바람이 있고.... 그러므로 그곳에는 철학과 윤리와 영성이 함께 머물러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권의 국가 계층이 그들과 함게 할 수 없다면 종교는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신학적 요소들이 좌절할 수도 있다는 매우 위험한 현실이라는 것이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 켈커타의 빈민들과 묵숨을 걸어야 했던 상황과도 너무나 다르다. 그들은 절대적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극빈의 빈민 계층은 결코 아니다는 사실이다. 그냥 소외라는.....! 그러므로 그곳에 머무는 사제의 신앙은 아무 사제나 가질 수 없는 무엇이 필요해야만 한다. 그 무엇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안고 신부님께서는 그 공소에 첫 주임신부님으로 오신 것이다. 그것이 나에게 몹시 기쁜 소식이었다. 또한 교회의 새로운 도전이 될 것이다.

 

사람이 자기도 알지 못하는 신앙의 길을 열어간다는 것 자체가 하느님의 지휘봉에 따르는 은총이며 스스로에게 삶의 가치를 보장해 준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신앙을 산다는 것이 의미있는.....!

 

ㅡ너희는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리고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요한14,1-2ㄴㅡ

 

 

 

이것은 오리가 아니고 거위입니다. (-_*)!

오리는 주둥이가 노랑이고 거위는 이마까지 노랑인데다가 이마에 성질을 가득 담은 뭉치가 툭 하고 불거져 나와있고 오리보다 훨씬 큽니다. 호수의 오리들이 거위에게 무시당하는데도 왜 함께 머무를 때가 많은지 이해가 안갑니다. 그래도 같은 물 위의 짐승이라고 아롱이 다롱이 모여 놀아야 좋은지? 하느님만 아시것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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